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18화 (118/203)

118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6)

흑귀의 제안은 곧 예결이 원하는 답이나 다름없었다.

이토록 태연하게 알아봐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대사형과 황보약린 사이에 별일이 없었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정말로 자식이 있다면 여기에서 예결을 희롱하며 농탕질을 할 게 아니라 지금은 바쁜 일이 있다든가 하는 핑계를 대고 휙 나가 버렸겠지.

힘이 탁 풀렸다. 이대로 기절할 수도 있을 것처럼 말이다. 항주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예결은 긴장을 풀지 못한 채 하염없이 만약을 생각했다.

‘이제 됐어.’

채봉은 그에게서 대사형을 앗아가지 않을 것이다.

때마침 흑귀가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원한다면 그 대사형이라는 자가 가족의 존재를 인지하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는…….

“흑점의 귀빈에게만 제공되는 특별한 상품이지요.”

화들짝 놀란 예결은 흑귀를 만류했다.

“그냥 정말 대사형의 딸인지만 알면 됩니다. 나는 그걸로 됐어.”

다짐하듯 거듭 말하며 흑귀의 팔을 꼭 붙들고 매달렸다.

“절대로 그녀를 죽이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암. 암.

일단 황보약린이 토끼 같은 남편을 만난 건 확실한데 화목한 가정에서 잘 자라는 황보율희를 건드려야 쓰겠나.

예결은 앞으로 채봉의 딸까지 무병장수하고 잘 살기를 기원해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대사형과 아무 연관이 없는데 왜 채봉의 딸이 그렇게 생긴 거지?’

아무리 하늘 아래 똑 닮은 사람이 셋은 있다지만 제하량과 황보율희, 그 두 사람은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이었다.

“딸?”

흑귀가 잠시 그 단어를 곱씹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심중에 예결은 알 수 없는 짐작이 지나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사형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었는데.’

혹 그게-

시기적절하게 흑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예결은 일단 눈앞의 사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설마 죽여 없앤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저, 정보와 증인을 조금 꼬아서 두 사람 사이의 연관성을 지워 드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만…….”

본인이 무언가를 생각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이유에서인지 예결의 혼을 쏙 빼놓기 위해 둘러대는 말이 일품이었다.

“상당히 품이 들지만 감쪽같이 관계를 끊어놓을 수 있습니다. 사람 한 명 죽이지 않으니 이상한 걸 알아채는 이도 적지요…….”

놀림당한 걸 알아챈 사람답게 예결은 눈을 흘겼다.

“……대가로 무얼 치러야 할지 말해 주십시오.”

예결의 낯에는 어서 이 일을 해치우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량은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벗어 보시지요.”

“……여, 여기에서?”

예결은 주변을 휙 둘러보며 되물었다.

특실이라곤 하나 장지문은 고작 한 겹에, 사람들이 얼마든지 지나다닐 수 있는 복도가 바로 앞이다.

그사이 해가 저물었으니 주루의 밤은 이제 막 시작이다. 손님들이 몰려들 테고 이 주루에서 일하는 자들이 복도를 바쁘게 오가리라.

“장소가 편치 않으시다면 흑점 말고 다른 곳에서 당신을 도울 사람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다른 이를 찾을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놓는 어깃장이다.

어차피 예결이 어딜 가든, 누굴 찾든 그 과정과 결과는 전부 하량의 손에 쥐여 있었다.

“소리, 소리를 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을 겁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 그렁그렁하게 느껴지는 눈이었다.

흑귀는 혀를 찼다.

“무얼 해야 하는지 말씀도 안 드렸는데 벌써 머릿속이 울 생각으로 가득하신 모양이군요.”

“흑귀 님이 옷을…… 옷을 벗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결은 수치스러움을 애써 삼키는 양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많이 봐준다는 양, 흑귀가 말했다.

“바지만 벗고, 상의는 끌어 올려 입에 무십시오. 그럼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예결은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내내 욕구불만의 상태였다. 그런데 항주에서 떠나기 직전, 하량이 몸에 지펴 놓은 불길은 도통 가실 기미 없이 예결의 자제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바지를 끌어 내리자 흰 다리가 드러났다. 전생에는 이보다 더 까무잡잡한 편이었기에 예결은 괜히 몸을 움츠렸다.

그는 대사형에게 숨기는 게 지나치게 많았고 이건 그 비밀 중 하나였다. 언젠가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예결이 달콤한 행복을 맛볼 때마다 그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상의를 끌어 올리자 예전보다는 조금 도드라진 유두가 보였다. 아무도 손댄 적 없는 양, 처음처럼 도홧빛을 그대로 머금고 있으면서, 정작 흥분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이 상황에 달아오른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야 그 차이를 모를 테지만, 하량은 제가 입혀놓은 색이 이렇게나마 남아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팔을 뻗어 예결을 떠밀었다. 식탁에 털썩 주저앉은 사제를 두 팔 사이에 가두며, 하량은 처음부터 꼴 보기 싫었던 술병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몇 병은 비어 있었으나 아직 술이 남아 있던 병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흑귀는 제 옷이 젖는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예결을 감상했다.

애써 다리를 오므린 예결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옷을 물고 있느라 입을 앙다문 옆얼굴에서는 모종의 결연함마저 느껴졌다.

예결이 얼마나 쉽게 흐무러지는지 알기에, 흑귀는 저 말캉한 뺨을 깨물어 잇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손을 가져다 대는 족족 발갛게 물드는 살갗은 그 위를 덧칠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동질했다.

주체할 길 없는 의심과 소유욕을 달래기 위해 사제의 뒤를 쫓았던 하량은 마땅한 ‘대가’를 선별했다.

“문 공자께서 직접 수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수, 수음?”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뱉어낸 예결이 되물었다.

“설마, 수음이 무언지도 모르시진 않겠지요?”

“……압니다.”

하필 마지막에 대사형과 살을 맞댄 채 했던 일이 흑귀의 입에서 나오는 게 어디 우연이겠는가.

이건 전적으로 제하량이 심술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려는.

“하겠, 할게요.”

옷을 추슬러 다시 입에 문 예결은 천천히, 항주에서 대사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몸에 긴장을 풀고, 뒤로 기대렴.”

기댈 곳이 없어 몸을 뒤로 눕히자 등 뒤에 차가운 탁자가 느껴졌다.

“다리를 벌리고…… 옳지.”

약간의 심적인 저항감은 있었으나, 예결은 다리를 벌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허벅지에서 달큰한 살 내음이 풍기는 듯했다.

흑귀는 무얼 하고 있나 살피자 팔짱을 낀 채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사내가 보였다.

그는 예결의 몸을 음미하듯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이렇게 쥐고, 천천히 앞뒤로 흔드는 거다. 너무 거칠게 손을 움직이면 예민한 살갗이 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 충분히 젖은 후에는……. 괜찮지만.”

예결은 성기를 감싸 쥐었다.

자꾸 목검을 쥐던 대사형의 손 모양이 떠올랐지만 애써 쫓아 보냈다. 다음 차례로 떠오른 건 연무장에서 온종일 연습하던 하량의 곁을 지날 때 맡았던 냄새였다. 체향과 뒤섞여 있는 땀 내음마저 날 것 그대로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그게 설렘인 줄도 모르는 시절부터 예결은 하량을 좇고 있었다.

뭔가 결심하기도 전에 손이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너무 거칠어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몽롱한 가운데 꿈속을 유영하듯 손을 놀리던 하량을 본능적으로 흉내 내는 모습을 흑귀가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강하게 쥐지 말고. 이렇게……. 살살 달래주렴.”

욕망은 너무도 쉽게 성급해진다. 예결은 조바심을 느꼈다.

젖어, 적셔야 해.

옅은 흐느낌이 예결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갔다. 천을 입에 물고 있어 다소 뭉개진 신음이었음에도 야릇하기 짝이 없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주향 때문에 취하지도 않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듯했다.

가이드가 정말 지척에 있는데,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홀로 쾌감을 얻어보려 낑낑대던 예결은 뭉근하게 달아오르는 몸에 애가 탔다.

‘조금만 더. 조금만……!’

절정에 오를 듯 말 듯 쾌감이 찰랑거렸다. 그러나 흘러넘치려 들지는 않는다.

예결은 그 이유를 알았다.

가이드의 손에서만 가는 호사를 누린 몸이 이제 혼자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거다.

땀이 눈물 대신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설마 했더니, 정말 수음하는 법을 모르시는군요.”

어린 짐승처럼 낑낑대는 예결을 지켜보던 흑귀가 매섭게 일갈했다.

예결은 손을 멈췄다.

‘분명 대사형이 가르쳐준 대로 했는데?’

시키는 대로 잘했던 예결은 혼란스러워졌다. 입술이 벌어진 탓에 물고 있던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손을 뻗은 흑귀는 예결의 다리를 붙들고 들어 올렸다. 대사형일 때와 달리 흑귀 특유의 두툼하고 굵은 손가락이 회음을 은근슬쩍 누르며 뒷구멍으로 향했다.

“여기를, 뒤를 만지셔야지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흑귀의 얼굴은 지독하게 사나워 보였다.

해갈되지 못한 욕망이 그의 눈 안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어차피 앞만 만져서는 그렇게 느끼지도 못하시지 않습니까?”

항주에서 직접 수음하는 방법을 알려준 사내가 지금 예결에게 다른 걸 요구하고 있었다.

“뒤를……? 하지만.”

예결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흑귀의 손가락이 하문을 꾹 눌러왔다. 등골이 오싹하고 허리가 저릿저릿했다. 이걸 원했다는 듯 입 안이 바싹 말라갔다.

“혹, 이것도 직접 가르쳐 드려야겠습니까?”

안에 집어넣기 직전에 손을 뗀 흑귀가 여봐란듯이 영견을 꺼내 손을 닦았다. 이물질이 묻었다는 양 구는 행동은 예결의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함이었다.

예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잘 차려진 상처럼 반라가 되어 식탁 위에 몸을 눕히고 있으니 얼굴을 가리기도 여의치 않았기에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인 수치심이 하량의 시야에 오롯이 담겼다.

어차피 예결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충분히 드라마틱해질 타이밍을 기다린 예결은 그가 유일하게 매달릴 수 있는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르쳐, 읏!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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