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22화 (122/203)

122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10)

정작 술에는 취하지도 않는데, 주변을 메우고 있는 주향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넘실대는 파도 위의 조각배처럼, 예결의 몸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둔부를 단단하게 붙든 채 하량이 쳐올릴 때마다 민감해진 내벽이 아우성을 쳤다.

예결은 이미 몇 번이나 절정에 도달했음에도 하량은 안에 두어 번 파정한 게 전부였다. 그동안 계속 물리고 빨린 가슴은 상대가 움직일 때 생기는 작은 바람에 닿기만 해도 아릿했다.

“아흣, 흑!”

드디어 하량의 양물이 그의 밀지에 정액을 토해냈다. 살 기둥이 서서히 물러나고, 질척한 액체가 그 뒤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하량의 허리에 다리를 두른 채 매달리고 있던 예결의 몸이 서서히 뒤로 무너졌다.

열락이 휩쓸고 간 자리에 예결은 사지를 늘어뜨린 채 숨만 쌔액쌔액 내쉬었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도 지금의 자신보다 다리를 잘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를 부드럽게 당겨 안은 하량이 제 몸 위에 예결을 얹어놓았다. 이 와중에도 예결을 차가운 식탁에 눕힌 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단단한 손이 그의 유두를 은근히 눌러왔다. 후희라 하기엔 교묘한 손길에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제발…… 이젠 그만…….”

목소리는 어느새 잠겨 있었다.

아쉽다는 듯 가슴에서 손을 뗀 사내는 이제 예결의 살갗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간지럽다고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참을만한 편이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하고 고민하는데, 흑귀가 은근슬쩍 속삭였다.

“흑점에 여의주라는 소문이 따라붙을 정도로 큰 야명주가 들어왔습니다.”

“……야명주요?”

“작은 연못에 넣어 놓고 감상하면 별을 가져다 놓은 듯 밝답니다. 물장구를 치면 퍽 재미있을 겁니다.”

그렇게 큰 야명주라면 엄청 비쌀 게 분명했다. 야명주라 함은 무림의 다이아몬드 아닌가.

예결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자 흑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백오십 년 전의 천하제일인이 썼다는 검도 있지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솔깃해할 이야기다. 천하제일인이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신병이기 취급받는 무기는 종종 강호에 혈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예결은 그보다는 하량의 가슴팍에 기댄 채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보주나 무기에 별 관심이 없다면 명필로 이름난 자가 직접 쓴 시는 어떻습니까?”

“그런 게 매물로 나오는 일은 드물지 않나요?”

“원래 낙양의 한 문장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 이번에 들어왔습니다. 반역죄에 휘말려서 달아나야 한다며 급하게 매물로 내놨더군요. 다행스럽게도 흑점에서 전부 확보했습니다.”

예결이 흥미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흑귀가 제법 길게 설명해 주었다.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을 거 같은데…….”

“대신 안남(安南)1)으로 가는 길을 마련해 주어야 했지만 남는 장사였지요.”

도주로와 문장가의 작품을 맞바꾼다, 라.

무엇이든 고객이 원하는 걸 제공하고 그 대가는 철저히 챙기는 흑점다운 수완이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드리지요.”

보다가 질리면 수집가들에게 팔아치워도 된다며 흑귀가 속살거렸다.

“……괜찮아요.”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야명주나 보검, 그리고 붓글씨보다도 흑점에 더 관심이 갔다.

전생에서 무림에 암시장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긴 했다. 다만 그 내용은 괴담에 가까웠다. 사람의 목숨과 인육을 사고파는 비밀스러운 가게가 강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량의 흑점은 다소 불법적인 구석이 있기는 해도 반인륜적인 거래를 일삼는 것 같진 않았다.

대사형이 흑점을 만든 건지, 아니면 기존에 있던 것을 바꿔버린 건지 알고 싶었다. 청해상단이나 흑점 외에도 제하량이 무엇에 손을 댔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도 궁금하다.

사고 후 강호로 넘어오고 시간이 제법 흘렀으나 예결은 여전히 제하량과 곤륜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요약하자면, 예결은 그가 없는 동안 하량의 삶이 그려낸 궤적을 전부 파악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이번 황보율희 일처럼 당황할 필요도 없을 테고.’

“욕심이 지나치게 없으시군요.”

“……흑귀 님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예결은 꽤나 불퉁하게 답했다.

“제가, 욕심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하량의 손길이 멈칫 굳었다.

“매번 거래라고 무언갈 가져가겠다고 엄포만 놓고, 갑자기 무언갈 주지 못해 안달이시잖아요.”

대사형과 흑귀는 그게 참 비슷했다.

설령 제하량이 가이드가 아니었다고 해도, 예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정체를 꿰뚫어 봤을 거라 확신했다.

“흑귀 님은 장사 같은 거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예결은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손해 보고 살면, 삼 대가 빌어먹을걸요?”

눈이 가려진 덕에 시야가 어두워 잠이 솔솔 왔다. 예결은 작게 하품하고는 흑귀의 품 안에 옹송그린 채 잠들었다.

***

잠들었나.

규칙적으로 변한 호흡에 하량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예결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몸을 숙인 하량은 술에 젖은 예결의 머리카락 끝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달짝지근한 향기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기절한 이를 상대로 헛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지만, 이러다가 언젠가는 사제가 혼절했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그를 탐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알면서도 참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

가늘게만 느껴지는 허리를 붙든 채 예결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을 때면 죄책감이 욕망에 희석되는 걸 느낀다.

여리게만 느껴지는 예결이 이대로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멈출 수 없다.

그러다가 무르기 짝이 없는 살갗에 이를 박아넣을 때면 하량은 언젠가 자신이 사제를 남김없이 집어삼키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흑귀라는 허울은 그를 실로 많은 것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지켜주려 했는데…….’

하량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예결에게 해가 될 것을 알았다.

심지어 그건 정념 앞에서 자신이 이렇게 속절없이 휘둘릴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을 때의 판단이었다.

하량은 잠든 이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직 깊이 잠든 건 아닌지 예결의 입에서 으으,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쉬이……. 더 건드리지 않을 테니 푹 자렴.”

담백한 손길로 등을 몇 번 토닥이자, 예결의 가지런한 호흡이 돌아왔다.

‘이렇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는데.’

기실, 하량은 몸을 섞는 일에서 기쁨을 찾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아직 마교의 포로 신세였을 적에 성교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법을 강제로 훈련받은 적이 있었다.

마의가 좀체 꺾이지 않는 하량을 길들이기 위해 잠시 내돌리던 시절이었다. 다들 떠맡기 싫어하는 짐처럼 이리저리 떠넘겨지던 하량은 세작 훈련을 받게 되었다.

말이 세작 훈련이지, 그 안에는 온갖 게 다 들어 있었다. 빼어난 화술을 쓰는 법, 은신술과 암기를 사용하는 법, 용독술, 미인계, 그리고 색사에 대해서도 익혀야 했다.

당시 색사 훈련을 담당하던 색마는 하량에게 수치심을 주고 싶어 했다. 곤륜의 도사를 꺾으면 본인의 영웅담이 하나 늘어난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의의 엄중한 명령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색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하량을 몰아붙였다.

음란한 내용이 적힌 춘화집을 펼쳐놓고 묘사해 보라든가 시범을 보일 때 사용하는 장난감을 하량에게 가져오라 이르고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말하게 종용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나중엔 본인의 노리개를 데려와 하량이 보는 앞에서 정사를 나누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제하량이 곤혹으로 얼굴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량은 오히려 그 덕에 덤덤할 수 있었다. 살면서 그를 한 번이라도 꺾어보려 하는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저, 색마가 사용했던 수단이 낯설었을 뿐이다.

자존심이 상한 색마는 급기야 하량에게 미혼약을 먹였다. 사지가 불타는 것 같은 감각에 휩싸인 하량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스스로 살갗을 베어냈다. 하량은 색마가 즐겨 쓰던 채찍으로 방심한 놈의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하반신을 세운 채 바지를 적신 시체가 흉물스러웠고, 마의가 헛수작을 부리는 일이 줄어들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량의 혈관이 터져나가기 직전에 그를 발견한 마의가 해독제를 내줬다. 아주 중요한 대법에 쓰일 재료가 상할 뻔했으니 그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때 하량에게 심어진 색마에 대한 혐오감은 성적 쾌락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애당초 하량은 생식 행위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본능적으로 기피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는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이였다. 곤륜에 들어가 도사가 되면 후사를 볼 수 없다는 말에 기꺼움마저 느꼈다.

‘엉뚱하기는.’

하량은 기절하듯 잠든 예결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여전히 코끝에 발그레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바람에 한들한들 떨어진 꽃잎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제가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량이 그렇듯, 예결 역시 그에게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다.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항주에 어렸던 예결을 두고 갔기에 자라났던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엽고, 그 때문에 멀쩡한 날개를 접고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거라면 달가웠다.

‘하지만 네가 외로운 건 싫구나.’

하량은 지금은 끊어낸 옛 인연을 떠올렸다. 완전히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인 관계였으나 어떤 것들은 온전히 잘라낼 수 없는 모양이다. 운명의 농간일까, 예결은 그 얼마 남지 않은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러니 하량은 사제를 충분히 안심시켜줄 생각이었다. 다시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필요 없게, 존재하지 않는 외로움에 슬퍼하지 않게.

예결의 모든 생각과 감정,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향하도록.

1) 베트남

(12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