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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23화 (123/203)

123화. 드라마보다 더한 건 (11)

다시 눈을 떴을 때, 예결은 몇 번 다녀간 적 있는 흑점의 침실에 누워 있었다.

‘뒷정리는…….’

흑귀가 알아서 했을 걸 알지만 민망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쟁반을 든 흑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야 예결은 자신이 배고프다는 걸 깨달았다. 가까이 다가오니 쟁반 아래 함께 들고 있는 죽간이 보였다.

예결의 앞에 음식을 내려놓은 흑귀가 턱짓했다.

“먹으면서 들으십시오.”

뭔가 계란과 쌀이 들어간 것 같은 죽이었다.

하량이 속이 진탕이 됐을 걸 걱정해서 멀건 음식을 내온다는 건 알지만 멀쩡한 예결은 드물게 식욕을 느꼈다.

‘평소에 잘 안 먹는 편인 것도 이 걱정에 한몫했겠지.’

예결은 업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대신 점심을 거하게 먹기로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수저를 뜰 때까지 지켜보던 흑귀는 예결이 첫술을 넘기자 죽간을 펼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하량이라는 그 사내, 당신 전에 청해상단을 거느리고 계셨던 분이더군요. 덕분에 추적이 쉬웠습니다.”

수저를 놀리면서도 예결은 혀를 내둘렀다.

대사형이 이 기회를 빌어 본인 신분에 대한 보증도 한 겹 더 쌓아 버리시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보율희는 황보세가의 가주와 그 부군인 악주천 사이에 태어난 친딸이 맞습니다.”

“예?”

처음 듣는 소식인 양, 예결은 수저질을 멈춘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흑귀를 올려다봤다. 더 먹으라는 듯 턱짓하자 비로소 정신이 든 척, 예결은 허겁지겁 수저를 움직였다.

예결이 먹는 걸 본 뒤에야 흑귀의 느릿한 설명이 재개되었다.

“황보약린은 본인의 딸이 태어나기 삼 년 전부터 산동에 칩거했습니다. 가주 자리를 막 물려받고 내실을 다졌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 청해상단주 제하량은 지난 이십여 년간 황보세가가 있는 산동에 발을 들인 적이 없습니다.”

흑귀가 심드렁한 투로 덧붙였다.

“알아본 결과 당시 제하량은 청해에서 상단 키우기에 바빴더군요.”

“그럼…… 왜 황보율희는 대사형을 그렇게 닮은 거지?”

예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이레 만에 이 기록을 찾아서 대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지요. 그보다 더 과거사를 원하신다면 달리 대가를 치러도 됩니다.”

흑귀의 시선이 예결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예결은 수치심을 느낀 양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쏘아붙였다.

“됐습니다.”

그는 흑귀가 건네준 죽간을 펼치고 글자 위를 가만가만 더듬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는 것이겠지요.”

수치심을 느끼는 듯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실상 예결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나는 산동 출신이란다.”

산동에서 나고 자랐다던 대사형의 말.

처음엔 채봉이 출신지가 같다며 대사형과 말문을 튼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면?

예결은 하량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나를 귀한 집 도련님이라 여겼을 테지만, 사실 내 출생은 그리 번듯하지 않단다.”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까지는 가주님이 내 아버지라고 믿고 자랐다. 하지만 머잖아 누이가 태어났고-”

산동의 대단한 가문.

대사형이 곤륜에 입문했음에도 그를 감시할 정도로 집요하고 능력까지 갖춘 곳.

산동 출신이라 대사형과 교류가 생긴 줄 알았던 채봉 황보약린과 피가 섞이지 않은 완전한 타인이라기엔 대사형과 지나치게 닮아 있던 황보율희…….

‘설마…….’

“아, 그리고.”

퍼즐을 완성시키려던 순간, 흑귀의 말이 불쑥 예결의 사고를 비집고 들어왔다.

“조사하다가 좀 더 파고들어 가게 됐는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해서 공유해드리려 합니다.”

하량은 모호하게 웃었다.

“무엇이지요?”

예결은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퍼즐을 맞추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흑귀를 바라봤다.

하량은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황보가주…… 아, 그러니까 지금은 황보세가의 태상가주 말입니다.”

잠시 뜸을 들여 예결이 앞으로 몸을 숙여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을 즐긴 사내가 속삭였다.

“그자가 친우를 만날 때면 있지도 않은 아들 자랑을 했다는군요.”

예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해줄 거라곤 생각 못했기에 더 놀랐다.

“빼어난 무골에……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주변을 두루 배려하는 아이라던가?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아무튼, 여간 자랑을 하고 다닌 게 아닌 모양입니다.”

흑귀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입니까?”

예결은 굳이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지 않았다. 동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침착해도 수상하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의 부인이 낳은 건 딸 한 명뿐인데.”

철저히 흥미 본위로 꺼낸 이야기처럼, 하량은 흑귀의 얼굴로 그렇게 웃었다.

공들여 천박함을 가장하지 않아도 저열해 보이는 것이 이 끔찍한 얼굴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처음부터 여기까진 알려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황보율희와 제하량이 무관하다는 걸 말해준 이상, 사제가 이 사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량은 직접 예결에게 출생의 비밀까지 털어놓기까지 했다.

“……아.”

예결의 시선이 정처 없이 허공을 방황했다.

하량의 판단과 달리 진실을 안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사형이 이토록 남김없이 진실을 알려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보세가의 피 한 방울 잇지 않은 채 그 지붕 아래에서 태어난 사생아.

가주의 비호를 받았음에도 겉돌다가 모종의 이유로 쫓겨나듯 곤륜파로 떠나야 했던 외부인.

‘그럼 황보율희가 닮은 건……. 대사형이 아니라 외할머니인 건가.’

다시 말해, 제하량의 모친을 빼다 박은 손녀였던 거다.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예결은 선뜻 수저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정사 후 드물게 찾아왔던 입맛이 싹 달아난 탓이다.

“문 공자?”

예결은 그 부름에 뻣뻣한 고개를 돌렸다. 제법 얄궂은 투로 말하던 흑귀의 시선이 수저 끝을 쫓고 있었다.

‘더 못 먹겠다고 하면 걱정하시겠지…….’

예결은 수저를 움직였다. 얼마나 푹 끓였는지, 죽은 깔깔한 입 안에서도 부드럽게 퍼졌다. 그러나 지금의 심리로는 맛을 즐기기 어려웠다.

그릇을 전부 비울 때까지 예결은 기계적으로 수저를 놀렸다. 마침내 한 술도 남기지 않고 바닥이 보일 때, 수저를 내려놓은 예결은 선언했다.

“청해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창백한 예결의 낯을 잠시 바라본 흑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도와드릴까요? 타고 오셨다는 말은 제가 주루에서 데려왔습니다만.”

“아뇨. 먼저 장원에 가야 할 거예요. 아, 세상에…….”

공들여 표정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핼쑥해진 얼굴이 제법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사천에 오자마자 술 마시러 가느라 장원에 기별을 못 넣었는데. 이를 어쩌죠? 대사형이 알게 되시면…….”

“대사형, 대사형.”

흑귀가 짐짓 마음이 상했다는 양 중얼거렸다.

“말끝마다 그 사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군요.”

본인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재주가 대단했다. 정말 질투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질투인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예결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저희가.”

흑귀를 똑바로 바라보는 예결의 눈에는 새파란 날이 서 있었다.

“몸을 섞는 사이지, 마음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잖아요.”

속삭이는 것처럼 자그마한 목소리였으나 예결의 시선은 곧았다.

‘대사형이 균형을 잡을 때마다 무너뜨려야지.’

이대로면 제하량은 평소에는 좋은 대사형으로 남고, 흑귀일 땐 예결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그런 관계로 남으려 할 것이다.

그게 안전하니까.

예결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죽을 때까지 가이딩이 부족할 일은 없고, 제하량에게 버려질 리도 없으니 괜찮은 거래였다.

하지만 이번에 항주에 다녀오며 느꼈다. 고작 현상 유지 따위로는 자신이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예결은 제하량을 원한다. 그의 머리카락 한 올부터 발끝까지 전부를 가져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번에는 제하량을 흔들었으니, 이번에는 흑귀를 흔든다.

이대로는 절대로 안정적인 관계로 남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어야 했다.

“……대사형에 대해 알려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시는 흑귀 님이 그분 이야기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결은 욱한 나머지 말이 거칠게 나간 사람처럼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중하지만 서늘한 투로 말했다.

흑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입술을 달싹인 흑귀가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이 뺨에 닿는 동안에도 예결은 가만히 서 있었다. 내쳐질 거라 생각했는지 멈칫했던 손이 좀 더 과감하게 예결의 얼굴을 감싸왔다.

“매정하시군요.”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금 기어올랐다고 이렇게 가차 없이 물어뜯길 줄이야.”

단순히 기백만으로도 움찔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예결은 꼿꼿이 버텼다.

말뿐인 위협이라는 걸 아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원하는 건 전부 얻으셨으니 이제 그 사내의 품에 달려가시겠다는 거로군요.”

그 말에 예결은 입매를 굳혔다.

“혹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처럼 미천한 놈이 어디 문 공자를 잡을 깜냥이 되겠습니까?”

항복한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린 흑귀가 선뜻 말했다.

“가세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사내의 얼굴이 어둠에 반쯤 잡아먹히는 듯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평소보다 그늘진 음영을 머금어, 보는 이의 심장을 선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그 사내가 주지 못하는 걸 찾으러 돌아오게 될 겁니다.”

맞는 말이다.

예결은 웃었다.

“하지만, 흑귀 님도 대사형이 제게 주는 걸 절대 줄 수 없지요.”

웃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결은 고개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는 좀 더, 격식을 차린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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