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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24화 (124/203)

124화. 도둑 키스 (1)

창을 열자 쌀랑한 공기가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예결은 방긋 웃었다.

청해로 돌아온 그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오죽하면 항상 쫓아다니는 삼랑이 이런 질문을 던졌겠는가?

“왜 그렇게 웃고 다니세요?”

삼랑의 질문에 예결이 되물었다.

“기분 나빠?”

“아뇨. 그보다는 좀…… 무섭다고 해야 하나?”

“저번 상행 때 거미도 맨손으로 잡지 않았어? 그런 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좀 웃었다고 무서워?”

심지어 나중에 설명을 들으니 그 계절에는 보기 드문 독거미란다. 흔치 않은 기회라 포획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거랑 이게 같나요?”

특유의 느릿느릿한 어투로 답한 삼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문 공자가 웃고 다니는 이유를 알게 되겠네요? 굳이 알고 싶진 않으니까 그냥 제가 질문한 것 자체를 잊어주세요.”

“애초에 왜 물어본 거야 그럼?”

“무심코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서 그만. 원래 안 그러고 다니시잖아요.”

무슨 소리인지 알 거 같기도 했다.

무표정하게 조각해 놓은 장승 입꼬리가 갑자기 올라가 있으면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게 아닐까 하고 심란해지기 마련이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겠다면 나야 다행이지.’

어차피 삼랑에게 말해줄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예결은 제 기분이 이토록 좋은 이유를 가만히 헤아려 봤다.

일단, 항주에서 대사형과 깊은 속내를 나누었던 일이 좋았다. 과거에 그가 일방적으로 떠난 것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암살에 어린 예결이 휩쓸릴까 걱정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좀 더 단단한 지반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또, 황보율희의 진실을 알게 된 덕도 있었다. 대사형이 황보세가와 연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이 크긴 했다. 그러나 일단 제하량에게 옛 연인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소리 아닌가.

그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푼푼해졌다. 이제 예결은 아주 관대한 마음으로 황보약린의 삼처사첩을 빌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핏 모든 상황은 순항 중인 것처럼 보이긴 했다. 적어도 예결에게 있어서는.

그러나 시소에 오른 이 중 한 명이 날아오르면 다른 한 명이 내려앉듯, 하량의 상황은 예결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그나저나 나 외출 금지 언제 풀려?”

예결이 삼랑에게 묻자 무언가 그물 같은 것을 성기게 뜨고 있던 삼랑이 답했다.

“어……. 백 년 뒤?”

“화가 많이 나셨나…….”

“그보단 걱정이 지나치신 거 같습니다.”

삼랑이 냉정하게 주군의 상태를 평가했다.

사천에서 돌아온 직후 찾아간 하량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귀에게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온 직후라서 그런 것 같았다. 마냥 언짢아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단지, 무언가 생각에 잠긴 기색이 역력했다.

“약속대로 장원으로 곧장 가서 삼랑을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더구나. 호위가 붙어 있긴 했지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쩔 뻔했니?”

슬쩍 눈을 내리깐 하량이 덧붙였다.

“너도 성인인 만큼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지만, 청해상단의 주인인 만큼 행보를 옮길 때 신중해야 한단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인만큼 쥐어짜기 좋은 대상이 없으니 말이야.”

“죄송해요…….”

하량이 알 건 다 알면서 이렇게 나온다는 걸 아는 예결도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걱정 같아서 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청해에서 머무르는 게 좋겠구나.”

“대사형이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예결은 그리 말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이 정도면 성과가 나쁘지 않아.’

하량은 충분히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껍질뿐인 관계로 남을지, 아니면 판을 엎고 백의 돌과 흑의 돌을 뒤섞어야 할지.

자신이 없는 사이 꽃을 가득 심어 놓은 화원을 산책하던 예결은 반대편에서 걸어가는 진영을 발견했다.

팔 만큼이나 긴 목함을 들고 있는 사내는 여느 때처럼 문사 같은 차림에 고지식한 얼굴이었다. 이쪽을 알아챘을 게 뻔한데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것까지 진영답다.

반가움보다는 장난기가 동한 예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삼랑은 예결이 또 무슨 속셈인가 하는 얼굴로 갸웃거리긴 했으나 그 뒤를 총총 따라갔다.

“오랜만입니다.”

“문 공자님. 청해에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군요.”

가능했다면 예결이 대사형에게 혼나는 모습을 1열 직관하고 싶어 했을 진영은 말만은 번드레했다. 매일같이 정해진 양식에 맞춰 서류를 작성하는 극한 사무직다웠다.

‘한 번 누를 때마다 경조사 문구가 튀어나오고, 두 번 누르면 계절에 따른 인사말이, 그리고 세 번 누르면 은근슬쩍 돌려썼지만 상대방 피 말리는 항의문이 출력되는 거지.’

“그게 뭡니까?”

“아.”

진영이 긴 목함을 살짝 들어 올렸다.

“주군의 물건입니다.”

예결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저렇게 조심스럽게 들고 가는데,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걸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질문의 의도를 이미 파악했을 진영이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그 내용물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탐구심이야말로 인류의 보배지.’

빠르게 결론을 내린 예결은 뒤를 따르던 삼랑에게 말했다.

“삼랑. 뺏어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냅다 땅을 박차려는 모습 그대로 멈춰 선 삼랑이 긴장감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저는 호위 임무를 수행 중인데요? 강탈 및 도주는 포함되는 거 같지 않아서요.”

“웬일로 상식인 같은 소리를 하는군.”

진영이 드물게 삼랑을 칭찬했다. 그러나 방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하지만 재미있을 거 같으니까 일단 해볼게요!”

미끄러지듯 움직인 삼랑이 진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빠르게 표정을 바꾼 진영이 목함을 품에 끌어안은 채, 다른 손으로 삼랑을 잡아당기며 뒤로 메쳤다. 상당한 수준의 금나수법이다.

매양 문사처럼 하고 다니는 진영이지만 그 역시도 삼랑에 버금갈 정도의 고수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함 때문에 한 손이 봉해졌음에도 이렇게 날렵하게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사형은 이런 사람들을 어디에서 끌어모은 걸까.’

가볍게 착지한 삼랑은 발을 탁 하고 튕겨서 진영의 얼굴에 모래를 뿌렸다. 목함을 소중하게 안은 진영은 얼굴에 흙이 튀기 전에 옷소매를 펼쳐서 시야를 가렸다.

삼랑은 그 틈을 노리고 매섭게 달려들었다. 보법까지 펼치며 거리를 좁혔으나 진영은 그녀가 어느 방향에서 노리고 오는지 짐작했다는 양 몸을 휙 돌려 피해버렸다.

삼랑에게 습격을 자주 당했는지, 관록이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찰나에 일어난 일이다.

‘에스퍼의 동체시력이 아니면 따라갈 수 없었겠군.’

무림인들은 역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예결은 내심 혀를 찼다.

“아, 여전히 끝내주네.”

삼랑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빛냈다. 평소의 졸음기는 어디로 갔는지 형형한 안광이 내려앉은 두 눈은 짐승의 것 같았다. 호시탐탐 진영과 손을 섞을 기회를 노려온 태가 났다.

예결과 나눈 티키타카마저 진영을 방심시키기 위해 쓴 수단이 아닐까 싶었다.

“너는 여전히 야만적이고.”

진영이 옷 소매를 탁, 하고 털어냈다. 잠깐의 접전으로 남겨졌던 흔적이 사라진 그는 다시 멀끔한 학자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주군께 물건을 가져다드려야 해서.”

여봐란듯이 목함을 툭툭 친 진영은 예결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어우 진짜. 여전히 귀신 같네.”

삼랑은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진영도 강하네.”

“뭐, 아무래도 살아남았으니까요.”

아직 머리에 열이 올라 무심코 답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삼랑이 슬쩍 덧붙였다.

“아시죠? 강호가 험한 거. 어, 그리고 상단도 이렇게 키우려면 별의별 일이 다 있다니까요?”

“흠…….”

눈을 가늘게 뜬 채 삼랑을 지켜보던 예결은 이번만은 넘어가 준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새 주군이 잠을 잘 못 주무시나…….”

삼랑이 갸웃거린 채 중얼거렸다.

“……잠을 못 주무신다고?”

예결이 멈칫 물었다.

“저게 뭔지 알아?”

“알죠. 연죽이에요.”

“연죽?”

담뱃대, 그거?

예결의 낯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걸 발견한 삼랑이 설명했다.

“원래 잠을 못 주무시는 편이라 연죽으로 약향을 태우시거든요. 수면제 같은 건 금방 해독되니까 신경을 가라앉히는 정도가 다지만 그래도 항상 들고 다니셨어요. 근래 들어서는 안 보였지만.”

“난 못 봤는데.”

안 보인 정도가 아니라 예결은 하량이 연죽을 들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없다. 한 번도 하량과 연죽을 같은 그림에 놓고 상상해본 적 없는데,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이드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망막과 뇌에 새기지 않으면 에스퍼 탈락이다.

“언제부터인가 안 쓰셨거든요. 그때가…… 아마 문 공자를 발견했을 즈음인가?”

아, 하고 손뼉을 친 삼랑이 말했다.

“아니다. 곤륜에서 다시 데려오신 후였다. 그때 완전히 목함에 넣어서 치워 두셨던 모양이에요.”

“오…….”

있는 힘껏 밀어보긴 했지만, 꽤나 흔들린 걸까?

‘너무 고생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놀랍게도, 하량이 더 불안해하고 더 흔들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진심인 만큼 그가 아프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자신의 곁으로 와 주길 바라는 마음도 진심이다.

“연죽이 확실해? 상자가 기니까 검일지도 모르잖아?”

“주군의 검은 저 목함보다 훨씬 길어요. 게다가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도 않으시고요.”

하긴, 어느 문파에 들어가든 검을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가르친다. 오죽하면 대련 중에 검을 놓치는 것을 수치 중의 수치로 여기겠는가.

“아니, 알고 있었으면 진영에게 목함 뺏어오라고 명령하기 전에 말해주면 좋았잖아?”

“에이.”

예결의 항의에 삼랑이 코끝을 찡그렸다.

“뭔지 알려드리면 진영하고 싸울 기회가 없어지잖아요. 그건 좀.”

정말, 부러울 정도로 손해 안 보고 사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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