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도둑 키스 (2)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 목함 속에 들어 있다는 연죽이 신경 쓰였다.
‘잠을 못 주무시는 편이었다고…….’
그런 기색을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다.
무림인은 며칠 정도 밤을 지새워도 거뜬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잠들어 있을 때도 하량은 대체로 깨어 있는 편이었다.
“오늘은 상단에 내려가는 날이지?”
예결의 질문에 삼랑이 경쾌하게 답했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청해상단은 청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상단인 만큼, 본사라 할 수 있는 건물은 청해의 서녕성에 있었다.
어차피 대사형의 금족령은 청해 내로만 제한되어 있었기에 예결은 가끔 서녕성에 들러 일을 보고 장원으로 돌아오곤 했다.
“얼른 다녀오자.”
흘깃 대사형이 머무르는 건물 쪽으로 시선을 준 예결은 삼랑을 채근했다.
흐음, 하고 뭔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보던 삼랑이 앞서 나가며 답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
사천에 성도가 있다면, 청해에는 서녕이 있다.
청해의 사람과 물류가 모여드는 중심지인 만큼, 서녕성은 북적북적하고 볼 것도 많았다. 성도에는 비단 시장이 크게 발전했다면 서녕에는 마시장이 유명했다. 또, 성도에서는 운남에서 올라온 소수민족이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서녕에는 유목민이 자주 오갔다.
이토록 다채로운 풍경 속을 거닐고 싶을 법도 하건만 예결은 상단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을 흘깃 쳐다본 것 외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무심한 낯으로 다시 정면을 향하는 예결의 얼굴을 삼랑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때면 주군 앞에서는 갓 찐 떡처럼 말랑말랑하게 구는 게 거짓말 같단 말이지.’
이럴 때의 예결은 진짜 탈속한 도사 같기도 했다. 삼랑은 새삼 예결이 제하량과 동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티 나지 않게끔 삼랑은 주의를 기울여 시선을 처리했다.
이렇게 예결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는 건 삼랑의 본인의 흥미 때문이 아니라 제하량의 명 때문이었다.
아끼는 사제와 함께 항주에 다녀온 주군은 삼랑에게 예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녀가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긴 눈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예결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삼랑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주군이 명령하면 다만 수행할 뿐,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계를 개입시키지 않는다.
“도착했습니다.”
먼저 문을 열고 주변을 살핀 뒤 날렵하게 뛰어내린 삼랑이 예결과 함께 상단 건물 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멀리에서, 삼랑과 다른 호위에 둘러싸인 채 상단 안으로 들어가는 예결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검댕이 묻은 손으로 턱을 문질문질 만진 거지가 날카로운 시선을 숨기며 인파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청해상단의 주인을 위해 마련된 집무실에 자리 잡은 예결은 그간 밀린 업무를 쓱쓱 쳐냈다.
‘진영의 스파르타식 교육이 효과가 있네.’
붓을 쓱쓱 움직이면서 예결은 조용히 감탄했다.
처음엔 장부를 읽거나 할 때 적잖이 어려움을 느꼈다. 전생에 한자를 배우긴 했지만, 까막눈이었던 세월이 더 길었던 탓이다. 게다가 거의 독학으로 익힌 탓에 부족함도 많았다.
적노개를 통해 곤륜이라는 글자를 읽게 된 예결은 항주에서 청해까지 가는 동안 그를 졸라 짬짬이 한문을 배웠다.
물론 그 정도 공부만으로는 자유롭게 읽고 쓰는 건 어림도 없었다. 까닭에 곤륜파에 입문한 후 여러모로 난항을 겪었다.
일단 사부인 백양진인은 자신의 제자가 글을 모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예결의 배경이 대단치 않다는 사실에 실망했는지 알아서 익히라며 무공이 적힌 책을 던져주었다.
당시만 해도 예결은 차마 이제 겨우 천자문을 뗀 게 고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갓 곤륜파에 도착한 직후의 그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곤륜은 모든 것이 크고 거대해 보였다. 눈 위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걷는 사부님은 신선처럼 보였으며 구름이 굽이굽이 머물러 있는 하얀 산봉우리는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곳 같았다.
‘다시 태어난 후에는 정말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산이기도 했고.’
무림 문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예결은 곤륜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부족함을 내색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까닭에 낮에는 피부가 벌겋게 타는 줄도 모르고 기본 검식을 연습하고, 밤에는 사형제들 모르게 글을 읽고 또 읽었다. 하루라도 빨리 번듯한 곤륜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다가 새벽이면 한여름에도 살을 엘 것처럼 차가운 물로 씻었다. 추위로 손이 곱아들어 덜덜 떨려도 예결은 몸에 물을 끼얹었다. 행여 악취라도 난다면 역시 출신은 속일 수 없다고 손가락질당할까 두려웠다.
예결은 자신이 이 하얀 산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곤륜에서 태어난 구름으로 빚어진 듯 고아하고 완벽한 사내를 언제나 바라보고 있었기에.
“문 공자님.”
잠시 붓을 내려놓고 있던 예결에게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상단에 올 때 수발을 드는 하인이 저 남자로 바뀌고 한 달쯤 지났음에도 여전히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예결이 원체 제하량 외의 것에 관심이 없긴 하지만 이건 그 혼자만의 탓은 아니었다.
솔직히 달걀에 사람 얼굴을 그려서 세워놓은 게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하량이 부리는 이들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여기에서 비슷하다는 건 생김새가 아니다. 절제된 움직임, 어떤 명령을 누가 받아도 같은 반응, 그리고 무감정한 표정이 한 사람처럼 똑같았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림자처럼 미끄러지듯 다가온 하인의 말에 예결은 의아해졌다.
“손님?”
무림에 별 연고도 없는데 누가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남궁세가의 남궁운 공자십니다.”
“아아.”
초대한 적은 없으나 축객령을 내릴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잠시 별실에서 만날 테니 그리 전하도록. 삼십, 아니 이 다경만 기다려 달라고.”
처리하던 죽간을 옆으로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물처럼 서 있던 삼랑이 그의 뒤를 쫓았다.
뱀뱀이가 있다지만 예결에겐 언제나 한 명 이상의 호위가 붙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들고 있던 장부를 마저 확인한 예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결은 별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럭저럭 교분을 나누긴 했으나 남궁운이 청해로 찾아올 만한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나면 알게 되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선 예결은 선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남궁운을 발견했다.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는 한 자루의 검처럼 서늘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대 남궁세가의 직계, 그것도 차기 가주가 될 것이 정해져 있는 소가주라기엔 단출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이는 남궁운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절벽 위의 소나무를 보듯, 독야청청한 특유의 기질이 선명하게 와 닿는다.
“오랜만입니다.”
예결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보는 이의 눈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잘생긴 데다가 번듯한 성품의 가이드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남궁, 아니. 운.”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사람처럼 아차, 하고 입을 가리는 예결을 모습에 남궁운의 눈에 훈기가 머물렀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예결. 그간 잘 지냈습니까?”
“물론이지요.”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예결은 조금 놀랐다. 딱히 남궁운과 어디 가서 무얼 한다고 서신을 주고받을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현대라 메신저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연락을 주고받는 건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편지 한 통을 보내려 해도 사람을 구해 인편으로 보내거나 전서구나 전서응을 띄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직접 전달하는 건 오래 걸리고, 잘 훈련된 전서구나 전서응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아아. 상단 일로 항주에 다녀왔습니다.”
차마 면전에 대고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라고 물을 수 없었기에, 예결은 그간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렸다.
뜻밖에도, 남궁운은 이미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당 공자가 항주에서 예결을 만났다고 자랑하더군요.”
청해에서 지내는 동안 당세기도 사천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궁운을 붙잡고 황보율희 이야기를 반나절 동안 했을 거다.
‘성격도 좋은데……. 거절도 못 하고 들어주다가 귀에서 피 나는 거 아닌가?’
“아쉬웠습니다.”
남궁운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이런 대목에서 말을 끊는 건 법으로 금지해야 했다.
“무엇이요?”
“항주라면 안휘와 가까우니……. 저와 함께 가도 좋았을 것 같아서요.”
예결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일 관련으로 간 거 아닙니까.”
일은 무슨, 완전히 대사형과의 밀월여행이었다.
‘단둘이 웨딩카……는 아니지만 적뢰도 탔고, 허심탄회하게 과거도 털어놓았지. 취미 생활…… 비슷한 뭔가도 했고. 한 침대에서 잠도…… 같이 잤고.’
여기에 충분한 선동과 날조만 곁들이면 대사형과 혼인신고서에 사인한 뒤 법원에 제출하고 왔다고 주장해도 무방하다.
어차피 여기에 반박할 에스퍼는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동의하면 전원 만장일치나 다름없지.’
중원무림을 혼자 쓰는 에스퍼다운 뻔뻔함이었다.
“다음엔 호위로라도 데려가 주십시오. 이래 봬도 제가 검을 좀 씁니다.”
허리춤에 찬 검집을 툭 건드리는 남궁운이 씨익 웃었다.
너무 단정하게 생겨서 은근히 차가워 보이는데 또 이렇게 웃으니 싱그러운 느낌이 났다.
“고작 호위 문제 때문에 운을 번거롭게 만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결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사형 때처럼 숱한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을 용봉지회의 회주를 호위로 부려 먹었다가는 여러모로 눈총을 살 것이다. 게다가 여기는 무림이라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남몰래 쓱싹해버릴 수도 있다.
남궁운의 눈썹이 살짝 아래로 쳐졌다. 예결이 진심으로 부담을 느낀다는 걸 알아챈 눈치였다.
“그래도 운이 찾아와 줘서 기쁩니다.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네요.”
“아. 그거 말인데.”
남궁운이 예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요새는 사천에 오시질 않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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