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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26화 (126/203)

126화. 도둑 키스 (3)

“청해에서 처리할 일이 많거든요.”

예결은 이런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유려하게 답했다.

대사형이 금족령을 내렸다고 구구절절이 설명할 이유가 없었다. 예결은 다른 사람에게 제하량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하량과 사형제지간이라는 걸 밝히면 필연적으로 그가 곤륜에서 파문당했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의 주홍글씨지.’

무림에서 파문은 무겁기 짝이 없는 무게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세 유럽의 왕들이 교황에게 파문당하는 걸 두려워했던 것과 비슷하다.

파문당한 사람은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보통 기사멸조를 저지른 이들이 파문당한다. 동문을 살해하거나, 사문의 무공을 빼돌려 팔아치우거나 경지를 높이기 위해 사마외도의 길을 택한 자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니 파문당했다는 건 이마에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돌아다니는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죄의 경중에 따라 사문에서 배운 무공을 쓰지 않게끔 맹세하는 정도로 끝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단전을 폐하거나 한술 더 떠서 사지근맥까지 잘라버린다.

남궁운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가이드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정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오대세가 소속이라는 사실과 별개다.

예결은 남궁운은 퍽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언정 그의 신념까지 믿지 않았다. 그는 분명 제하량을 조심하라고 할 거다.

‘흑귀는 대사형 본인이니까 험담 좀 해도 참았지만 남궁운은…… 해당 사항이 없지.’

정파, 그것도 구파일방 중 하나인 곤륜파에서 파문당했다는 건 사파무림에서나 대단한 훈장으로 쓰일 뿐이다.

파문당한 대사형이 부끄러워서 말을 삼가는 것이 아니다. 예결은 제하량이 부정적인 의미로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자신이 없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일이 어떻게 되었길래 하량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예결에게 있어서 하량은 언제까지고 귀한 집 도련님이었으며 곤륜의 모두가 우러르던 대사형이었고, 또 강호의 젊은 영웅이었다.

“항주에 다녀오며 한 공방과 독점 계약을 맺기도 했고…….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았습니다.”

예결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진실을 깔끔하게 은폐했다.

“그런. 전혀 몰랐습니다.”

남궁운은 삼랑 쪽을 흘깃 바라보는 듯하더니 예결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해서 찾아왔는데, 얼굴이 이토록 좋아 보이니 되었습니다.”

화상통화도 안 되는데 넓기는 더럽게 넓은 중원무림에서 고작 두어 달 못 봤다고 걱정했다니, 남궁운이 대범한 성격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은근히 섬세한 구석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첫 만남 직후 교룡왕에게 인질로 끌려갔던 기억 때문에 남궁운이 저를 유독 연약한 종이 인형처럼 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에 치이느라 운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게 부끄러워지는군요.”

선량한 가이드에게 힘자랑 같은 몹쓸 짓을 하지 않는 에스퍼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청해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여기에 찾아오면 예결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확답하긴…… 어렵네요.”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바쁘다고 했는데, 정작 상단에는 이레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여봤자 수상할 뿐이다.

그러니까 얼버무려야지.

“알겠습니다.”

남궁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저자에 있는 달양객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예결이 편할 때,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혹 제가 자리를 비우고 있다면 점소이에게 언질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여태 마셔본 것 중 가장 좋은 고정공주를 팔고 있더군요.”

슬쩍 솔깃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남궁운의 말에 예결은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어서 일을 끝내고 한잔 기울이러 가고 싶어지는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상단 건물 밖까지 남궁운을 배웅한 예결은 휙 돌아서서 집무실로 향했다. 예결이 장부를 쓱쓱 처리하고 옆으로 밀어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장원으로 돌아갈까?”

“네. 모시겠습니다.”

돌아갈 생각에 기뻐졌는지, 씩씩하게 답한 삼랑이 문을 열어젖히려다 말고 불쑥 물었다.

“그나저나, 언제 그렇게 그 남자랑 친해지셨어요?”

“남궁 공자?”

겉옷을 걸치다가 멈칫한 예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법 비즈니스적 응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삼랑이 보기엔 좀 달랐던 모양이다.

“저번에 술자리를 가져서 그렇게 보이나?”

“그런 거치고 퍽 살갑던데요?”

“고마우니까 그러지. 왜 당세기도 소개해줘서 사천당가랑 불편한 사이로 발전하지 않은 거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우. 그래도요. 남궁세가의 젊은 용이 사실은 빙룡이라는 소문도 도는데, 문 공자한테 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삼랑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게다가 무려 남궁세가 소가주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태중 약혼했다는 제갈세가 소저도 그렇게는 못 부를걸요?”

“당연히 나처럼은 안 부르겠지.”

별거 아니라는 듯 예결은 손을 휘휘 내저은 예결은 성큼성큼 삼랑의 곁으로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대며 덧붙였다.

“운 가가라든가?”

현대에서 애인을 두고 자기 허니 여보 달링 하듯 무림에서도 애인을 칭할 때 이름 뒤에 가가를 붙였다. 여자의 경우에는 매를 붙여서 부른다.

손을 뻗어 문을 열어젖힌 예결은 그 앞에 우뚝 선 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운 가가?”

모양 좋은 입술에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사형!”

무려 일터까지 제하량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예결은 그 목소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참으로 드문 상황으로 인해 번진 반가운 마음이 눈치를 압도해 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거의 돌진하다시피 안겨드는 예결을 단단히 받친 하량은 부드러운 어투로 답했다.

“네가 상단과 장원만 오가는 것이 갑갑할 듯하여……. 함께 외출이라도 할까 하고 찾아왔단다.”

“대사형…….”

항주에 다녀오느라 하량은 한동안 바빴다. 그런 이가 숨 돌릴 틈이 생기자마자 금족령에 발이 묶인 사제를 생각해서 여기까지 와준 거다.

예결은 제하량의 사려 깊음에 감동이 넘실넘실 차오르는 걸 느꼈다.

정작 그 금족령을 내린 게 바로 하량이라는 사소한 사실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그럼, 너만 괜찮다면 나갈까?”

하량이 예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결은 좋아라고 이를 덥석 잡았다.

“어서 가요.”

먼저 청한 것은 하량이지만 예결은 어느새 한 걸음 앞서나가고 있었다. 픽 웃은 하량은 삼랑에게 눈짓을 건넨 뒤 예결이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상단을 나선 둘은 앞에 대기 중인 마차를 본체만체 지나쳤다. 청해상단의 본부는 번화가와 가까웠기 때문에 몇 걸음 옮기지 않아 북적이는 거리에 당도했다.

“이렇게 놀러 나온 건 처음인데, 어디 가볼 만한 곳이 있나요?”

“나도 이 근방을 잘 아는 편은 아니라.”

하량은 멋쩍은 듯 웃었다. 먼저 놀러 나가자고 불러놓고,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듯 서툴러 보이는 태에 예결은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오래전에도 느꼈지만,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그런지 하량은 의외의 구석에서 요령이 없었다.

“그럼 발 닿는 대로 가보죠.”

예결은 하량과 함께 저자를 누볐다.

“이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그래? 그럼 저쪽으로 가볼까?”

델리만쥬 냄새에 홀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면 빈손으로 돌아올 수 없듯, 제하량 앞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한 순간 예결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시작은 만두였던 거 같은데……. 닭고기 꼬치구이에 이건, 음. 뭐지?’

노점상 몇 개를 지나쳤을 뿐인데, 그동안 하량이 사서 들려준 음식으로 손이 다 미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많이는 못 먹는데.”

예결이 남들 모르게 소매 속의 뱀뱀이에게 익힌 고기를 한 조각 주며 말했다.

배가 터져도 대사형이 준 걸 남과 나눠 가질 생각은 없지만 뱀뱀이는 예외였다.

“그나저나……. 이거 양념을 한 고긴데 줘도 되는 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예결이 손을 물리자 뱀뱀이가 충격받은 듯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잘 먹고 다음 한 입을 기대하는 중에 뺏길 위기에 처해서 억울한 눈치였다.

지나가는 이들이 금빛 뱀을 볼 수 없게끔 예결을 교묘하게 가리고 서 있던 하량이 손을 내저었다.

“영물이니 괜찮을 거다.”

“아, 맞다.”

번개도 잘만 집어삼키는데 사람 먹는 음식 좀 먹는다고 탈이 날 리는 없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번화가를 누비는 두 사람은 은근히 시선을 끌었다. 다 큰 성인, 그것도 사내 둘이 손을 잡고 다니는 일은 흔치 않았다.

예결이 워낙 신난 기색이 역력한데 하량이 이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각별한 형제 정도로 보이기도 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기루의 담벼락 아래 그늘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는 이가 있었다. 허리에 다섯 개나 되는 매듭을 찬 그는 개방의 오결제자였다.

개방도는 빠르게 거적을 치우고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너덜너덜한 종이를 몇 장 헤집었다.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데. 아……. 왜 이리 낯이 익은 얼굴이지? 젠장, 기름이 여기저기 번져서 알아보기 힘들잖아. 분타주가 또 깜빡하고 용모파기로 구걸 받은 음식을 싸 놓았나.’

욕지거리를 삼키던 거지는 그 용모파기 중 하나를 끄집어냈다.

[천마.]

더듬더듬 글을 읽은 개방도의 눈이 튀어 나갈 것처럼 커졌다.

“헉.”

천마라 함은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하는 마교의 주인일진대 종이에 그려진 것은 흉신악살도 아니고 삼두육비의 괴물도 아니었다. 그 대신 용모파기에 그려진 것은 젊고 헌앙한 무인이었다.

고작 그림에조차 도도히 묻어나는 청수한 풍모는 인간이 아니라 검을 든 신선처럼 보였다.

‘정말 천마란 말인가?’

용모파기가 실물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저 잘난 낯짝이 이 세상에 둘 이상일 리 없다. 그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용모파기를 뒤적거릴 수 있었다.

이번 대의 천마는 선대를 찢어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다고 알려졌다.

처음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건 무한에서 일어난 신월의 난 때였다.

삼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신월무제의 심득과 무공이 잠들어 있다는 무덤으로 가는 장보도를 중원에 퍼트려 강호를 피로 물들인 주역이 젊은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게 알려졌을 때 무림인들은 경악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거지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분타주에게 천마가 서녕성의 저자를 누비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러 가야 했다. 그게 개방의 청해 분타에서 다른 지부는 모르는 마교의 극비 정보를 숙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역대 천마가 십만대산을 떠날 때는 항상 중원 침공을 위해서였다……!’

마교의 침공을 가장 먼저 알아채기 위한 척후조로 청해에 심어졌다곤 하지만 정작 위기가 코앞에 닥치자 식은땀이 비처럼 줄줄 흘렀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상냥한 여인의 음성이 거지의 귓가로 미끄러지듯 흘러들었다.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 목에 무언가 차가운 날붙이가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주군의 기분이 더러우신데 근처에서 정파의 개가 깔짝거리면 곤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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