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도둑 키스 (4)
“음?”
순간 비강에 와 닿는 비릿한 냄새에 예결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피 냄새 같은데…….’
“거기 뭐가 있니?”
하량이 예결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아뇨. 무슨 소리를 들은 거 같아서. 제가 착각했나 봐요.”
항주만큼은 아니어도 서녕의 치안이 마냥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호위와 함께 행동하지 않았다지만 대사형의 걱정이 좀 지나친 거 같았는데. 그냥 내가 안전불감증이었나.’
뒷골목으로부터 되도록 빨리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옮긴 예결은 어느새 저잣거리의 끄트머리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에서부터는 서녕성의 마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예결은 목을 길게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건장한 준마부터 시작해서 튼튼해 보이는 짐말까지. 다양한 종류의 말이 널찍한 우리 안에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말을 사러 온 것처럼 보이는 상인이 여럿이었다. 그들은 말에게 건초를 주며 이빨을 확인하고 발굽이 갈라진 정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마시장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구나.”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대사형의 말에 예결이 방긋 웃으며 오른쪽 소매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보다는 뱀뱀이가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에요. 적뢰와 친하게 지내더니, 말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기웃거리는데 간지러워요.”
“청해에는 명마가 많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하량이 덧붙였다.
“홍여도 서녕에서 만났단다.”
“서녕에서요?”
솔직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삼랑이지만, 예결이 가장 큰 호감을 느끼는 건 홍여였다.
곤륜으로 갈 때 호위로 붙은 야율홍여는 예결에게 적뢰를 부를 수 있는 피리를 건네주었다. 만약 적뢰가 아니었다면 예결의 두 번째 생은 곤륜 정상의 만년설 속에 파묻혔을지도 모른다.
또, 사천과 청해를 오갈 때라든가, 당서악의 뒤통수를 칠 때, 그리고 대사형과 항주로 여행을 다녀올 때도 홍여와 그의 애마는 예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
하량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홍여는 청해와 신강 변두리를 넘나들던 유목 민족 출신이란다.”
“그럼 서녕에는 말을 팔러 왔던 모양이네요?”
예결의 질문에 하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홍여는 여기에 상인으로 온 게 아니었단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그에게서 듣는 게 좋겠구나.”
아무리 수하라 한들 홍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멋대로 입에 담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음. 홍여는 얼굴을 보기 힘든데…….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물어볼게요.”
“홍여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매일 붙어 다니는 삼랑이 섭섭해하겠어.”
비단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예결은 대사형이 질투 비슷한 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숨기며 답했다.
“홍여는 상당히 과묵하잖아요. 삼랑은 엄청 시끄럽다고요.”
정말 장난 아니라고 덧붙인 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량은 호기심이 동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진영은?”
“진영은 표정이 시끄러워요.”
예결은 잔망스럽게 코끝을 찡긋거리며 하량에게 투덜거렸다.
“그래. 결이는 이 대사형이 제일 좋겠구나.”
맞아! 바로 그거야.
예결은 너무 반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에겐 대사형이 언제나 최우선이니까요.”
“기쁘구나.”
하량은 선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출발했을 때처럼 나란히 상단으로 돌아왔다. 딱히 관계의 진전을 논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주에서 저자를 거닐 때처럼 간질간질한 대기가 둘 사이에 머물렀다.
‘그래도 대사형이 일하는데 깜짝 방문도 다 해주시고. 너무 좋아.’
예결은 부푼 가슴을 안고 상단의 문턱을 넘었다. 이대로 장원으로 돌아가면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어?”
상단의 앞마당에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잠깐 나갔다 오는 사이 무슨 일이 터진 건가?’
명색이 여기 책임자이니 뒤처리할 생각을 하면 순간 아찔했다.
‘내 칼퇴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사슴처럼 청순하고 토끼처럼 귀엽고 여우처럼 요염한 대사형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갈 생각에 희희낙락했던 예결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상단의 앞마당. 그러니까 ‘앞마당이었던 것’은 온갖 물건을 잔뜩 부려 놓은 시전(市廛)의 매대처럼 변해 있었다. 차이라면 그렇게 늘어놓은 물건이 하나같이 귀한 비단 보자기에 싸여 있거나 단단히 봉해진 궤짝이라는 거였다.
총관이 예결을 발견하고 성큼 다가왔다.
“상단주님.”
“이, 이게 다 뭐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예결이 물었다.
“흑점의 사천 분타주가 보내온 선물입니다.”
선물에 점령당한 마당을 가리키는 총관의 얼굴에는 당혹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흑점……?”
예결의 바로 뒤에 선 하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뇌까림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사형.”
예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량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냐는 듯 선량하면서도 의아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이 정교한 우연을 설계한 당사자의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과 마주한 순간 예결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두려워서?
아니, 너무 좋아서.
‘이러려고 오셨구나.’
깨달음은 자연스러웠다. 그저 대사형이 왔다고 헤벌쭉하고 좋아하다가 함정에 빠져 습격당한 기분이었다.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났다. 심장은 사정없이 쿵쾅거렸고 입술은 바싹 말랐다.
“그. 부탁드린 물건이 없는데. 뭔가 착오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청해로 돌아온 예결은 금족령을 핑계 삼아 장원에 주저앉았다. 상단을 통해 흑귀의 서신이 몇 번 오긴 했으나 모조리 무시했다. 전부 계산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계획에 없었다.
‘그냥 웃어넘기실 수는 없으신 거지.’
예결이 흑귀에게 더는 그를 사적으로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무섭게, 하량은 흑귀를 판 위로 끌어들인 거다.
가슴에 전율이 번져나갔다.
“착오라니. 일단 뭐가 들었는지부터 확인해보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왔을 하량이 적당한 대사로 예결의 등을 떠밀었다.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네.”
서로 숨겨놓은 패를 배제하고 판을 드러난 그대로 읽는다면, 사형을 남몰래 마음에 담은 사제가 은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난 사내의 존재를 들킨 셈이다.
흑귀는 언제든지 예결에게 닿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그는 흑귀가 언제 협박이란 패를 꺼내 들지 몰라 두려워해야 한다. 또, 하량이 실수로라도 그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끔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여야 했다.
예결은 선물더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상황에 압도당해서인지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기분이다.
애써 긴장한 모습을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떨렸기 때문이다.
손을 뻗은 예결은 가장 위에 놓여 있던 궤짝 중 하나를 열었다.
“이건…….”
순간 얼굴에 닿는 빛에 눈이 부셨다. 몇 번이나 눈을 끔뻑인 후에야 예결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야명주다.
그것도 예결이 중원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컸다. 거의 아기 주먹만 한 물건은 낮에도 그 빛이 느껴질 정도로 밝으니…… 이건 상품(上品) 중의 상품(上品)이다.
‘아. 그때 잠자리에서 말한 그 야명주 같은데.’
뭐든 고르라며, 흑점의 보고 앞으로 데려가 준다고 했던 흑귀의 말이 생각나 예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빈말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은근슬쩍 거절한 뒤 그런 식으로 작별했으니 예결은 야명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야명주라……. 착오로 보냈다기엔 지나치게 귀한 물건이구나.”
하량이 중얼거렸다. 무언가 고심하는 듯 가라앉은 시선에 예결은 황급히 궤짝을 닫았다.
“한시라도 빨리 돌려보내야겠어요.”
희게 질린 예결의 어깨를 하량이 부드럽게 잡아줬다. 든든하게 버티고 선 하량의 존재는 안정감을 선사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저쪽이 실수로 보낸 거라면 결이 네가 책임질 일은 아니니까.”
예결은 자신을 다독이는 손길에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서신부터 보내는 게 좋겠구나.”
제하량의 입을 빌린 흑귀는 예결의 손에 강제로 붓을 쥐여줬다. 어디 또 무시해 보라는 듯, 그렇게.
하지만 예결은 착한 사제답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하량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예결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사람이었다.
“혹 의중에 담은 말이 있으시다면 가감 없이 들려주세요. 세이공청하겠습니다.”
예결이 먼저 청한 후에야 하량이 눈을 내리깔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결이 네가 정파와 사파의 인물을 두루 사귀는 걸 말릴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이 머물렀다.
“무림인은 위험한 존재이니 너무 가까이하지는 말렴.”
“예. 대사형의 말씀이니 항상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예결은 애써 밝은 얼굴을 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 깃들어 있는 시름을 대사형이 눈치채게 둘 수 없어서 필사적인 사제처럼.
“그래. 그럼 되었다.”
하량이 예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결은 속없이 웃으려 애쓰며 하량의 눈치를 살폈다.
사무치도록 다정한 손길을 지닌 사내의 눈은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 너를 청해에 붙들어놓으면 곤란해지겠구나.”
“붙들었다니요. 대사형의 곁을 지킨 건 자발적으로 한 일입니다.”
예결은 조금 여유가 돌아온 사람처럼 능청을 부렸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해 준다면야…….”
하량이 더없이 귀한 것을 대하듯 예결을 가볍게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이 우형이 항상 너를 걱정한다는 걸 잊지 말렴.”
진심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예결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금족령이 생각보다 빨리 풀렸네.’
삼랑을 보면 백 년이 뭐? 하고 비웃어야겠다고 결심한 예결은 상단의 마당을 점령한 궤짝 쪽을 바라봤다.
하량은 몸이 달았을 예결이 곧장 사천으로 달려갈 거라 예상하고 목줄을 풀어준 눈치였다. 거한 선물 꾸러미로 이목을 끌어놓은 일을 따지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대면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흑귀랑 그렇게 헤어졌는데 냉큼 사천으로 돌아가는 건 좀 어색하지.’
예결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갔다. 이 호재를 아무렇게나 쓸 수는 없다.
‘남궁운이 마침 서녕에 왔으니 당분간 어울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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