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도둑 키스 (5)
다음 날, 장원을 나선 예결은 서녕으로 향했다.
“어째 사천 가시는 사람치고는 짐이 가볍더라니.”
“내가 왜 사천에 가.”
삼랑의 말에 예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꿀 발라 놓으셨잖아요.”
“내가 그랬나?”
대충 상황을 알고 있을 삼랑의 앞에서 시치미를 뚝 뗀 예결은 저자에 들어섰다. 남궁운이 머무른다는 서녕의 달양객잔은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돈깨나 쓴 티가 나는 건물이었다. 적당히 품위도 있고 정원도 넓어서 거부의 장원처럼 보였다.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도 상당히 절도가 있어 보였다.
예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남궁 공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선약이 있으십니까?”
“청해상단의 문 공자가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주실 겁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하인은 동료를 두고 안으로 달려갔다.
“금족령이 풀리자마자 여기 오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요.”
등 뒤에 서 있던 삼랑이 속삭였다.
“삼랑도 흑귀가 상단에 선물 보낸 거 봤잖아.”
“잘 지내보자고 보냈겠지요.”
“내가 흑귀와 어떤 사이인지 삼랑은 대충 알고 있을 텐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예결은 짐짓 정색했다. 삼랑을 본인만 모르는 이중 첩자 비슷한 걸로 활용하고 있는 예결은 그녀에게 성의 성심껏 반응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진 나름 괜찮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건 맞아. 좀 복잡한 사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데 기본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 적은 없다고. 상단에 선물을 보낸 게 사과의 뜻일 리는 없으니 뭐겠어?”
삼랑은 답하지 않고 코끝을 찡그렸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남의 연애사라지만 또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건 상사의 연애사다.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거라는 선전포고지.”
“그래서, 남궁운을 통해 균형을 꾀해 보시겠다는 건가요?”
“균형은 무슨.”
예결은 잠시 몇 마디를 삼키다가 말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덩치를 부풀리는 거지.”
삼랑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주군 몰래 사파의 무인과 어울리고 있었다는 게 불편하신 건 알겠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피할 이유가 있나요?”
내막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던진 삼랑의 질문은 도발적이었다.
“……피할 이유가 있지. 있고말고.”
예결은 자조적인 투로 중얼거렸다.
“그 남자의 손에 내 비밀이 있으니까.”
삼랑은 잠시 미간을 좁히고는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뭐라 더 말할 줄 알았던 예결은 장원 안쪽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덩달아 침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운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예결?”
남궁운은 두 눈으로 확인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지 예결을 불렀다. 정작 예결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운이 씻는 중이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는데요.”
매사 단정하고 번듯한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더 검어 보였고 평소보다 느슨하게 묶은 허리끈 때문에 벌어진 옷깃 사이로 잘 단련된 가슴이 보였다.
‘무림인들은 정말…… 노출에 경각심이 없다니까.’
생각해보면 한여름에도 만년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추운 곤륜에서도 수련 중인 제자의 삼 할은 옷을 훌렁훌렁 벗곤 했다.
“이런.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앞서서 그만……. 흉한 꼴을 보였군요.”
흉하기는 무슨.
예결은 손사래를 쳤다.
“흉하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남궁운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차갑게 생긴 얼굴에 감도는 훈기는 보는 이를 미소 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름 오대세가의 직계라 그런지 수치심은 탑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말리셔야겠습니다. 청해의 공기는 차가운 편이니까요.”
예결은 장난스럽게 남궁운이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툭 건드렸다. 물방울이 떨어지며 옷을 적시는 게 보였다.
“이거 봐요. 이러다가 감모 들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지요.”
반쯤 얼어붙은 남궁운은 예결이 떠미는 대로 뻣뻣하게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삼랑이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예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삼랑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진영처럼 그녀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많이 바쁘다고 하셔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거의 안 하고 있었습니다.”
남궁운은 달양객잔을 통째로 빌려 쓰는 것 같았다. 그는 예결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건너편 의자에 걸쳐 놓았던 행낭을 옆으로 치운 뒤 마주 앉았다.
이제 갓 서녕에 도착했다지만 정돈되지 않은 방에 손님을 들여 허둥지둥하는 게 느껴졌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친우가 놀러 온 것 아닙니까.”
“제가 예결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남궁운은 빈말을 진지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워낙 사람이 무게감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호위와 함께 오셨군요.”
삼랑은 본인이 거론됨에도 무관심한 낯으로 예결의 뒤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예. 서녕성 안이라지만 주변에서 염려가 커서요.”
예결은 남궁운과 단둘이 남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담백하게 답했다.
“염려요?”
“왜, 저번에 선박이 통째로 납치당했으니까요. 상단 차원에서도 손해가 만만치 않았던 터라……. 운신에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달고 다닌다는 소리였다.
“그렇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운은 호위 같은 거 필요 없죠?”
예결이 장난스레 묻자 남궁운은 잠깐 망설이다가 진지하게 답했다.
“저도 혼자 고개를 넘으면 종종 녹림도나 산짐승을 마주치곤 했습니다. 여럿이 다닐 때보다는 확실히 위험하더군요.”
“결국 혼자 헤쳐나왔다는 거잖아요.”
여기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만 봐도 뻔하다.
예결이 눈을 흘기자 남궁운은 멋쩍은 듯 영견으로 머리를 말리는 척 얼굴을 가렸다.
“한 번에 산적을 몇 명이나 상대해 봤어요? 열일곱 명?”
“가장 강한 한 명만 잡아 본보기를 보이면 나머지는 달아났기 때문에 셋 이상 상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내심 강호의 남궁휘혈 전설을 기대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렇군요.”
대사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겸손한 성격의 남궁운이 본인의 무용담을 즐겁게 떠벌릴 리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항주에 다녀오는 길에 별문제는 없었습니까?”
“안전하게 다녀왔죠.”
대사형과 함께 간 덕도 있지만 역시 그보다는 적뢰가 큰 역할을 했다.
녹림도가 영업을 개시하려 해도 지나가는 과객을 못 잡으면 끝 아니겠는가. 홍여가 애지중지 키우는 그의 붉은 말은 산비탈도 너른 평지처럼 가볍게 내달렸다. 심지어 하량이 쳐준 기막 덕분에 벌레 걱정도 없었다.
“항주에서 당 공자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포목점에서 황보율희라는 소저를 만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던데요?”
“원래 당 공자가 극도로 긴장하면 그렇게 됩니다.”
남궁운이 짤막하게 긍정했다.
“세상에. 정말 강호의 절반이 당 공자의 연정을 알겠군요.”
“예. 당 공자가 황보 소저를 좋아하는 건 용보지회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황보 소저는 당 공자의 마음을 모르시는 거 같던데.”
“아마……. 우직한 성격이라 직접 고백할 때까지는 모르는 척하실 겁니다.”
“그렇구나. 두 분이 잘됐으면 좋겠네요.”
예결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의 그는 누가 봐도 남의 연애에 호기심 많아 보이는 젊은이였다.
“아. 잠깐.”
문득 생각났다는 양 예결이 입을 열었다.
“분명 당 공자가 사천당가의 소가주 맞지요? 그런데 지금 황보세가에……. 직계는 황보율희 소저 한 분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예결은 자연스럽게 낚싯대를 던졌다.
기왕 남궁운을 만난 김에 같은 오대세가 내에서 도는 정보를 알차게 빼먹을 작정이었다.
“예. 맞습니다. 황보 소저는 황보세가의 소가주이기도 합니다.”
“허어 그럼…….”
예결은 본인이 다 안타깝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설령 두 분의 관계가 발전하더라도 한계가 있겠군요.”
“아마 그래서 당 공자도 마음 앓이만 하는 걸로 압니다.”
“지금 가주님께 다른 자식은 정말 없으신 거군요.”
남궁운은 긍정했다.
“황보세가의 현 가주께서는 무한에서 벌어진 신월의 난 당시 활약하며 무명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천마에 의해 큰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무한에서 산동으로 돌아가는 즉시 어린 딸을 후계자로 정하셨다는 걸 보면 아마…….”
신월의 난? 이라는 사건으로 황보약린이 불임이 된 모양이었다.
‘역시 중원에서 천마는 만악의 근원이야.’
이제 황보약린이 남이 아니라 제하량의 이부누이라는 걸 알게 된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신월의 난이라면…….”
“아. 십 년도 더 된 일인데다가 강호의 일이니 민간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남궁운은 알아서 예결의 변명을 만들어줬다.
“천마가 중원 침공을 위해 벌인 사건입니다. 삼백 년 전의 천하제일인, 신월무제의 무공이 그의 무덤에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지요.”
“오.”
익숙한 음모의 냄새가 났다.
“무덤의 위치가 두루뭉술하게 적힌 장보도가 강호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누구든 신월무제의 심득을 얻으면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지요. 온갖 문파와 소속 없는 낭인까지 무한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무림인들이란.
가만 생각해보면 정말 선불 맞은 멧돼지가 따로 없다.
어딘가에 무공이, 영약이 있다는 소문과 함께 장보도가 돌면 일단 멧돼지처럼 돌진한다.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만분의 일이라도 그 장보도가 진짜일 거라는 가능성에 목숨까지 내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함정이었다?”
“예.”
예결의 질문에 남궁운은 쓰게 웃었다.
“저는 당시 어렸지만, 대단한 혈겁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무공에 눈이 멀어 정파, 사파 가릴 것 없이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고 또 같은 편을 배신하길 서슴지 않았다고……. 그렇게 간신히 무덤에 들어서자 그 안에 설치되어 있던 기관과 함정이 발동해 생존자들을 중독시켰습니다.”
클래식한 마교의 행보 그 자체였다.
정파무림하고 사파무림을 이간질해서 힘 빼놓고 마지막에 뒤통수 치기.
“다행스럽게도 황보세가의 현 가주인 태산검귀 황보약린 선배님이 함정이라는 걸 간파해서 정파무림의 주요 세력은 궤멸을 면했습니다. 수일의 잠복 끝에 생존자를 처리하러 온 마교의 간악한 무리를 물리쳤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곤륜에 큰 애착을 가진 건 아니라지만 대사형을 죽이려 들었던 마교가 큰코다쳤다니 아주 깨소금 맛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삼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여간 정파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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