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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29화 (129/203)

129화. 도둑 키스 (6)

선대 교주가 한 짓 수습한다고 한달음에 무한까지 달려갔다가 칼 맞은 걸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그러나 주군이 금쪽같은 사제에게 정체를 숨기기로 한 이상 삼랑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시치미 뚝 떼고 가만히 듣는 수밖에.

“하지만 정파무림에 타격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라, 호북의 무한에 있던 무림맹 본부는 낙양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삼랑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남궁운의 설명이 끝났다.

“그랬군요.”

일단 황보세가와 신월의 난이라는 정보를 얻는 것에 성공했다.

예결은 남궁운과 점심을 먹고 차도 한 잔 마신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랑이 슬쩍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전음을 보냈으나 예결은 이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검색엔진에 대고 신월의 난이나 황보세가 가계도 같은 걸 검색해볼 수 없는 지금의 예결에겐 남궁운만 한 대화상대도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올게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운은 예결을 문까지 배웅했다.

웃는 얼굴로 몸을 돌린 예결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그가 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닫기를 망설이던 남궁운은 예결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손을 뻗어 문손잡이로 가져갔다.

장지문이 탁, 하고 닫히자 남궁운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밀어냈던 행낭을 끌어당긴 남궁운은 그 안에서 백양진인과 주고받은 서신을 꺼냈다.

‘역시. 실종된 곤륜의 제자와 이름도 같고 외양도 같다. 하지만 사라진 뒤 청해상단의 주인으로 나타난 건 아귀가 맞지 않아.’

남궁운의 시선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음혼귀마가 훔쳐 간 영물을 되찾기 위해 곤륜에 올랐던 남궁운은 백양진인의 제자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만 해도 문예결이라는 이름 석 자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하지만.

교룡왕의 배에서 함께 갇힌 인질이 스스로를 문예결이라 소개했을 때부터 남궁운은 예결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정말 곤륜에서 사라진 바로 그 제자라면, 누군가에게 강제로 억류당한 상황이라면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궁 공자는 스스로를 지키세요.”

‘그런 말을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아 부드러운 손을 한 미공자였다. 칼을 찬 수적들에게 둘러싸인 게 두렵지도 않은지 남궁운의 걱정을 했다.

정작 남궁운은 본인이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명성에 목메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교룡왕이 될 정도로 수완이 있는 자라면 포로로 잡은 남궁운을 죽이기보다는 몸값을 받고 그를 남궁세가에 넘길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남궁운과 문예결 모두 교룡왕에게서 사지 멀쩡하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남궁운은 예결과 왕래하게 되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예결은 누군가에게 억압당하고 있다기엔 자유로워 보였다. 곤륜에서 사라진 바로 그 제자라기엔 그늘도 없고 변죽이 좋다. 상대가 누구든 쉽게 어울렸다.

고독이나 주술 같은 걸 쓴 사람은 저렇게까지 생동감이 넘치지 않는다. 적어도, 뇌리에 심어진 명령이 본인의 의지와 충돌할 때마다 고통이라도 느껴야 하는데 그런 기색조차 없다.

강제로 억류당한 곤륜의 제자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예결과는 그저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마음이 놓이는 가설이었다. 남궁운의 마음과 정황 모두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예결과 교류를 이어 나가는 동안에도 남궁운은 의혹의 한쪽 끈을 놓지 않았다. 이건 남궁세가의 후계자로서 교육받은 이의 습관 같은 거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것.

그래서일까.

다람쥐가 풀방구리에 드나들듯 사천에 오고 가던 예결의 걸음이 뚝 끊기자 남궁운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항주에서 돌아온 후에도 청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에 가만히 기다릴 수 없었다.

가주인 부친으로부터 안휘로 돌아오라는 명이 내려졌음에도 사천에 체류하던 남궁운은 그길로 청해를 향해 말을 달렸다.

개방을 통해 듣기로는 예결이 상단 본부에 보름에 한 번 정도 드나들까 말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에 남궁운의 가슴이 걱정으로 조여들었다.

‘정말로 예결이 백양진인이 말한 누군가에게 붙들린 채 협박당하고 있었던 거라면?’

자신이 너무 안일했던 탓에 그를 빼내 올 기회를 놓친 걸지도 몰랐다.

남궁운은 곧장 백양진인에게 서신을 보내서 그가 제자에 대해 기억하는 걸 최대한 많이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백양진인이 아는 건 별로 없는 게 분명했다.

서신의 행간에는 제자에 대한 무관심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 따위가 마구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이런 단서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예결이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남궁운은 청해상단에서 그를 빼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먼젓번부터 의심스러웠던 호위 한 명만 달고 나타난 예결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당세기의 연애사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누군가가 조종해서 꾸며낸 것 같진 않았다.

“소가주님.”

수하의 음성이 남궁운을 그의 상념으로부터 깨웠다.

“개방의 오결제자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이변이 있으면 보고하라 일렀으나 안휘도 아닌 서녕에서 개방의 제자가 실종된 건 남궁운의 소관이 아니었다.

“청해상단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 부탁한 자인가?”

확인차 묻자 수하가 부정했다.

“아닙니다. 저자에서 구걸하고 있었다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수상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개입할 일은 아니지.”

남궁운은 선을 그었다.

“예. 하지만 당시 청해상단주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연치고는 기이했다. 그 개방도가 무언가 봐서 안 되는 걸 보기라도 한 걸까?

“……개방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도록.”

“존명.”

***

하량은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나다가 이내 흩어졌다.

눈을 반쯤 감은 그는 연죽을 입술로 가져와 연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속을 들끓게 하는 감정은 서로 뒤섞이며 침전되어간다.

희석할 수 없기에 당장은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내는 게 최선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진영은 연죽을 든 하량을 발견했다. 주군의 낯에 익숙한 무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예결이 아는 제하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흑귀에 가까운 분위기를 두른 사내는 참으로 무료해 보였다.

“문 공자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결이가?”

연죽을 사용한 탓에 하량의 음성은 평소보다 탁하게 들렸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여운이 남았다.

“그래……. 남궁세가의 소가주를 만나러 객잔에 간다고 했었지.”

이미 올라온 보고를 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감정과 함께 밀려난 정보는 부연 연기의 너머를 잠시 헤아려야 다시 끄집어 올릴 수 있었다.

“사제가 참 바쁘군.”

길고 하얀 손가락이 연죽의 대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이렇게 쓸쓸할 줄이야.”

하량은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예결의 기쁨이 곧 그의 기쁨이라는 것처럼 착각하기 좋은 표정이었다.

진영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남궁운이 사제를 데리고 무얼 했지?”

“담소를 나눴다고 합니다.”

“담소라.”

그 긴긴 시간 동안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신경에 거슬렸다.

“남궁 공자가 항주를 다녀왔을 적의 일화나 사천당가 소가주의 연애사, 또 홀로 협행을 다녔을 때 녹림 산채를 토벌했던 경험담 같은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진영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하량의 눈은 서늘해졌다.

남궁세가 소가주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만 놀렸다는 게 같잖았다. 개방의 거지까지 동원해가며 사제와 마주치려 애를 쓰는 모습도 거슬렸다.

다시 이 연기에 머리를 푹 절여놓지 않았다면, 충동에 귀를 기울여 직접 나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하량이 남궁세가의 직계에게 손을 쓴다는 건 가까스로 불발시킨 정마대전을 앞장서서 일으키는 짓이나 매한가지였다.

‘왜 멈춰야 하지?’

그의 귓가에 환청이 들렸다. 하량은 본인의 음성으로 들리는 속삭임을 무시했다.

‘왜 참아야 하지?’

예전에는, 그러니까 마공을 처음 익혔을 때는 저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던 것도 같았다.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하량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답을 잃었다. 그의 저울은 수평을 잃은 지 오래다. 까닭에 하량은 스스로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오래전에 세운 원칙에 맞춰 움직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환청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다음은 환후일 테고 그다음은 환각, 마지막으로 환통이 찾아올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연죽을 가져오라 이르긴 했으나 약만으로 이 광증을 가라앉히는 건 무리였다.

그의 몸은 독과 약을 모두 해독해 버리지만 심마만은 고이 품는 까닭이다.

“또…… 황보세가와 신월의 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진영이 뜸을 들이다가 말하는 걸 보니 그의 본론은 이쪽이었던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하량의 치부를 건드리는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예결이 원한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들쑤셔도 괜찮았다.

“황보세가 건은 알아봐도 좋다고 풀어준 거나 다름없으니 상관없다.”

하량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꽤 발 빠르게 움직이는군.”

황보세가에 대해 물어보려고 의도적으로 남궁운을 만나러 간 게 아닐까, 하고 무심코 기대할 뻔했다.

하량은 상대가 누구든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을 고작 사제의 눈길 한 번에 값싸게 팔아치우고 싶어 안달이 난 제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사주기만 한다면 어디 가격이 문제겠는가.

“신월의 난에 대해서 남궁운은 뭐라고 설명했지?”

“마교가 무한에 놓은 함정 때문에 정파무림과 사파무림이 공멸 직전까지 갔으나 황보율희의 활약으로 천마가 물러나고 강호가 평화를 되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군.”

신월의 난.

이름은 거창하게 붙었으나 영웅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그래도 그런 내용으로 예결을 이 시간까지 붙들어놓은 걸 보면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이야기꾼의 자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량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옇게 흩어지는 연기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진영에게로 돌아왔다.

“이만하면 되었어. 사제가 흑귀에게 보낸 서신을 가져오도록.”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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