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도둑 키스 (7)
예결은 일전 진영에게 화초를 마구 뽑아 건네줬던 정원을 거니는 중이었다.
요즘 심장이 젤리처럼 쫄깃쫄깃해진 기분이라 방에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대사형이 언제 어떻게 치고 들어올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 특히 제하량 보기에 초조해 보이는 게 영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예결은 정원을 빙빙 도는 중이었다.
‘슬슬 흑귀한테 보낸 답장이 올 때도 되지 않았나?’
야명주를 비롯한 선물 보따리를 돌려보내기에 앞서, 예결은 흑귀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대충 정중하게 다시는 이런 거 보내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오?”
그때, 꽃향기는 별로 안 좋아한다며 정원 밖에서 그를 치켜보던 삼랑에게 하인이 접근했다. 그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든 그녀가 예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사천에서 온 서신입니다.”
“올 때도 됐지.”
반쯤 넋을 뺀 채로 중얼거린 예결은 서신을 펼쳤다.
‘이게…… 뭐지?’
예상한 협박이라던가 회유의 글귀가 아니라 웬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까마귀 울어 버들꽃 뒤에 숨으면
그대는 취한 김에 저의 집에서 머무세요
박산향로 속 침향이 피어오르면
두 줄기 연기는 하나가 되어 선계까지 닿을 것을」
예결은 혀를 내둘렀다.
‘이백의 〈양반아(楊叛兒)〉였던가.’
전생에 글자를 익히는 게 고작이었던 예결이 이 시를 아는 이유는 환생 후에 만난 한문 선생님 때문이었다.
당시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슬로건에 꽂혀 있던 중학교 한문 교사는 수행평가 과제로 좋아하는 한시 세 수를 적어 제출하라고 말했다.
인터넷에 대충 유명한 한시 같은 걸 검색해서 통째로 긁어오는 애들이 더러 있다는 걸 알던 한문은 랜덤으로 몇 명 뽑아서 본인이 고른 시의 제목과 내용을 발표시켰다. 당시 손에 꼽힐 정도로 자주 언급된 시가 바로 〈양반아〉였다.
행간에서 읽을 수 있듯이,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은근한 암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형이 왜 이걸 골랐는지 알겠네.’
취한 채 흑귀의 품에 안긴 것만 두 번이다. 몸도 섞고 잠도 자고.
제법 시구와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결의 ‘대사형’이 볼 수 있는 곳에 선물을 잔뜩 부려 놓은 흑귀가 고작 풍류를 위해 이런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냈을 리가 없다.
‘협박이지.’
여차하면 예결이 흑귀와 어떤 사이인지 그의 대사형에게 알리겠다는 협박.
삼랑이 잘 볼 수 있게끔 예결은 서신을 와락 구겼다.
나중에 잘 펼쳐놓을 것을 다짐한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명주랑 선물을 사천으로 돌려보낼 사람은 다 구했나?”
“아무래도 상당한 수준의 호위를 붙여야 할 거 같아서 조금 걸립니다.”
“더 빨리는 불가능하고?”
“주군이 알게 되셔서 그나마 빠른 겁니다. 원래 일정 수준 이상 강한 무인은 돈이나 권력으로 움직이기 힘들잖아요.”
대사형 없이는 흑귀의 일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대사형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초조하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는 척, 예결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갑갑하네.”
“그럼 직접 사천에 가시는 게…….”
삼랑이 예결을 떠보듯 말했다.
“안 가. 누구 좋으라고.”
예결은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원래 위치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한 삼랑이 뚱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예결이 떨떠름하게 묻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무얼?”
“그, 말입니다.”
삼랑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예결이 손에 쥔 서신을 가리켰다.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예결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역시, 태울까요?”
“아니.”
슬쩍 손을 등 뒤로 숨긴 예결은 삼랑에게 턱짓했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보도록 해.”
“아, 설마 제가 훔쳐볼까 봐……?”
삼랑이 상처받았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눈매가 긴장 없이 나른하게 풀려 있는 걸 보면 정말 진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게 분명했다.
“딱히 그런 의심은 안 했는데. 난 삼랑을 믿어.”
“예? 저를요?”
그러면 큰일 난다는 듯 저를 쳐다보는 얼굴에 대고 예결은 진지하게 답했다.
“정말 빼돌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나한테 가져오지도 않았겠지.”
삼랑이 그건 그렇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예결은 그 얼굴에 대고 밉살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쪽으로 믿는다고. 왜, 기대했어?”
“오……. 살짝 그랬을지도요?”
예결은 애써 무뚝뚝한 낯으로 하량의 친필 서신을 옷소매에 수납했다. 본인 서체도 아니라 흑귀 버전으로 쓰인 시라니, 이건 희귀한 물건이다.
‘나는 왜 그동안 편지 한 장 쓸 생각을 못 했을까?’
대사형의 서신과 흑귀의 서신을 따로 수집할 수 있다는 걸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아날로그의 아름다움을 잊고 지낸 과거가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단……. 외출할래.”
삼랑이 코끝을 살짝 찌푸렸다.
“또 남궁 공자를 만나러 가십니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예결은 남궁운과 어울려 서녕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일단 서녕성에 갈 생각이긴 해.”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남궁운을 만나러 가는 게 목적은 아니다. 그보단 금족령이 없어졌음에도 부득불 사천을 안 가려는 모습을 대사형에게 주지시키는 중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남궁운은 외출의 핑계였다. 서녕성에 아는 지인이라곤 저 하나뿐이라고 하니 일부러 챙기는 중이다.
예결은 운이 좋았다. 남궁운은 명색이 오대세가 중 한 곳의 소가주면서 바쁘지도 않은지 그와 함께 어울려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붙어 다닐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순수한 호의를 이용해먹는 거 같아 흔적기관인 양심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만 빼면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남궁 공자가 서녕성에 머무르고 있는 걸 빤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도 좀 그렇잖아. 이 근방에 아는 사람도 없다는데.”
“여기가 청해라지만 정파 소속이라면 남궁세가 소가주가 지나간다는 말만 들어도 맨발로 뛰쳐나올걸요?”
삼랑이 퍽 신랄하게 답했다.
“사실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왜 남궁 공자가 불러낼 때마다 매번 어울려 주시는 겁니까?”
“아. 그게 사실.”
서신을 집어넣은 소매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인 예결이 답했다.
“남궁세가 소가주를 만나야 해서 청해를 못 벗어난다고 둘러대려고.”
“오…….”
삼랑은 예결의 자충수에 감탄했다.
흑귀가 사실은 주군이라는 걸 전혀 모르면서 상대방의 속을 뒤집어놓는 짓만 쏙쏙 골라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갑갑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명색의 흑점의 지부장이 그런 얕은꾀에 속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해 예결의 자승자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삼랑은 며칠 전, 진영이 주군의 연죽을 가져갔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별로 좋은 신호는 아니지.’
태어나기를 마교에서 태어난 삼랑은 마의의 실험체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초창기에는 살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실험체가 죽어가니 그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 썩어갈 정도였다. 마의는 마교를 위한 전투병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이 정도의 희생은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만약 당시의 교주가 중원 침공에 사활을 건 광인이 아니었다면 마의는 실각했으리라.
연이은 실패에 강경파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때, 마의는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마의가 무인의 신체를 이용해 만들어낸 강시는 지치지도 않을뿐더러 팔다리가 남아 있는 한은 기어서라도 술자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마의는 본인이 올린 성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더 완벽한 실험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곤륜파를 무너뜨리고 가져온 전리품에 마의의 관심이 쏠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의는 여태 다루던 것보다 정순한 심법을 익힌 곤륜파의 포로를 한 명도 빠짐없이 끌고 갔다.
삼랑은 그들 중 단 한 명도 살아서 십만대산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은 살아남았다.
지나치게 오래.
“속이려는 게 아니야.”
예결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속아달라는 거지.”
“흠……. 그게 문 공자의 뜻이라면야.”
삼랑은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반응을 내놓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으나 실은 삼랑도 주군이 어찌 나올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흑귀로서 예결을 옭아매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간 숨겼던 정체를 드러내고 직접 사제를 취할 생각인지.
어느 쪽이든 확실한 건 예결이 달아날 구석은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럼 외출 준비하겠습니다.”
삼랑은 본인의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오늘도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객잔의 이 층에 앉아 있던 남궁운은 예결이 오자 자리를 권하며 웃었다.
“이렇게 반겨줘서 고마워요. 운. 하지만 인사만 하고 바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예결은 짐짓 사양했다.
“그런.”
“서녕까지 왔는데 얼굴 한 번 안 보면 섭섭할 거 같아 잠시 들렀어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남궁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불쾌해서라기보다는 의아한 눈치였다.
그간 남궁운을 찾아온 예결은 항상 그하고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신세 지고 있는 분을 위해 선물을 사러 나와서요.”
예결의 발언에 뒤에 선 채 듣고 있던 삼랑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대체 왜 그런 기특한 짓을?’
제하량이 꼭꼭 숨긴 진실도 모르면서 선물을 사러 나왔다니.
일부러 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기가 적절했다.
삼랑은 슬슬 문 공자의 꼬리가 몇 갠지 세어봐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아무리 주군에게만은 선량한 사제처럼 군다지만 이렇게 절묘한 순간마다 균형을 잡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진영도 예결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삼랑의 의혹이 채 깊어지기도 전에, 예결이 천진한 낯으로 덧붙였다.
“곧 그분의 생신이거든요.”
아.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삼랑은 조용히 탄식했다.
‘그래서……. 연죽이 나왔던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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