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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31화 (131/203)

131화. 도둑 키스 (8)

제하량은 봄에 태어났다. 그리고 곧 그때가 온다.

‘항상 멀리서 축하받는 대사형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이번엔 내가 1열이다!’

다시 태어난 후에야 방구석 1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도 예결은 하량을 직접 축하해줄 기회가 생겼음에 기뻤다.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운이요?”

남궁운의 제안에 예결이 의아한 낯으로 되물었다.

“선물을 고를 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는 상인인지라 무림인이 뭘 좋아할지 잘 모르긴 해요.”

만약을 대비해 예결은 본인이 상인이라는 밑밥을 한 번 더 깔았다.

대사형이 흑귀의 입을 빌려 정체를 한 번 더 숨긴 사건에서 여러모로 감명받은 탓이었다. 그리고 기초공사는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았다.

“운의 안목을 빌려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죠.”

예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운이 반색했다.

“예결이 이리 찾아와준 덕에 오늘도 쓸쓸한 처지를 면하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반가움을 드러내는 남궁운의 모습을 본 예결의 눈에 측은함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안휘에서 데려온 창궁비연대는 다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몰라도 어지간히 혼밥하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남궁세가 소가주라는 사람이 처량하게 혼자 식사하고 있으면 체면이 안 설 거 같기도 하고.’

가만 보면 요령이 없다. 삼랑의 말처럼 정도를 걷는 청해의 문파 소속이라면 누구든 남궁운을 만나고자 할 텐데, 마음 쓰이게 혼자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쯤 되면 만국 가이드의 공통점이 아닐까.

뭐, 남궁운처럼 신중한 성격이라면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이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선물을 받으실 분이 무림인인 모양입니다.”

예결은 아까부터 유난히 말이 없는 삼랑을 흘깃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절에 검을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상단 사무직을 맡고 계신지라 직접 검을 쥐는 것 같진 않은데 항상 단련을 쉬진 않으시더군요.”

하량이 수련하는 걸 두 눈으로 보진 않았지만, 꼭 보아야 아는 게 아니라는 걸 몇 달 동안의 경험으로 익히 배웠다.

가이딩 받는 에스퍼를 압살하는 체력이 맨땅에서 솟아날 리가.

‘아니. 역시 내 체력 문제라기보다는 가이딩이랑 쾌감 때문에 자꾸 기절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적뢰가 있다지만 항주에서 청해를 오가는 여정이 쉽진 않았다. 그럼에도 예결은 감기 몸살 한 번 안 겪었다.

이쯤 되면 예결이 연약한 게 아니라 대사형이 지나치게 강한 거다.

“염두에 두신 선물은 있습니까?”

“음.”

남궁운의 질문에 예결은 잠시 고민했다.

“검에 달 장식 술……. 같은 걸 생각해보긴 했는데, 움직일 때 번잡할 거 같아서요.”

삼랑은 심드렁하게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으나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다.

“그럼 검을 닦을 천 같은 건 어떻습니까? 대장간 거리에서는 철이 녹슬지 않게끔 돕는 약도 팝니다.”

“일단 구경부터 하러 가죠.”

예결은 남궁운을 앞세워 서녕의 저자로 향했다.

청해에서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데다가 사막을 인접한 타국과 이어지는 지역인 만큼 이색적인 물건이 여럿 눈에 띄었다.

대장간 거리에 가서 천과 광택제 같은 걸 두루두루 살폈지만 예결은 여전히 마음에 차는 물건을 찾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남궁운은 예결에게 가죽으로 된 혁대를 보여주었다. 검집을 견고하게 맬 수 있는 끈이 매달려 있는 데다가 만듦새가 퍽 괜찮았다.

“그분도 검을 쓰실 때가 있다면 요긴히 쓰실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두고 다니셔서……. 하지만 정말 좋은 물건 같네요.”

안목을 보태준다고 약속한 남궁운은 성의 성심껏 물건을 골라줬으나 어째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고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뜩잖으신 모양이군요.”

예결이 망설이는 기색을 느낀 남궁운이 점잖게 물었다.

“아무래도……. 어울리는 걸 찾기 어렵네요.”

“사천에는 좀 더 다양한 물건이 있을 겁니다.”

“아 지금은 청해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요.”

삼랑이 볼 수 있게끔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핀 예결은 걸음을 옮겼다.

발품을 팔고 또 팔던 예결이 아쉬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이 거리 끄트머리에 골동품을 주로 파는 가게가 한 곳 있습니다. 주인이 대단한 수집가인데 내킬 때만 가게 문을 연다더군요. 예결만 괜찮다면 한번 가 보겠습니까?”

“좋아요.”

완벽한 선물을 사기 위해서라면 중원 끝까지 가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고작 이 거리의 끝 정도야.

온종일 돌아다녔음에도 지치지도 않는지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예결의 등을 보는 남궁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서렸다.

그는 언제 뒤처졌냐는 양 예결을 바투 따라잡으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골동품상은 한창 장사하는 중이었다. 혼자 바둑을 두고 있던 주인장은 애체 너머로 예결과 남궁운을 확인하더니 다시 흑과 백의 돌이 가득한 판 위로 시선을 돌렸다.

예결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봤다. 과연 골동품 전문점답게 고가구가 많이 보였다. 조각상도 더러 있었고 도자기도 보였으나 딱히 효용성을 찾지 못했다.

조금 실망해서 걸음을 옮기던 예결은 우뚝 멈추어 섰다가 조금 전 지나친 자리로 돌아갔다.

“아.”

어떤 물건은 보는 순간 주인을 떠올리게 된다던데, 지금의 예결이 딱 그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백옥으로 된 문진이었다. 탐스러운 구름을 그러쥔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특히 용이 자리 잡은 부분은 은은한 초록빛이 맴도는 게 참으로 절묘했다.

‘옥은 잘 깨지는 편인데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했으면서도 깨진 자국 하나 안 보이네.’

키가 큰 백자 옆에 가려져 있어서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마음에 드는 걸 찾으신 모양입니다.”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는 예결의 귓가에 남궁운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예결을 채근했다.

“어서 사러 가셔야지요. 여기에서 감상만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채 갈지도 모릅니다.”

“서둘러야겠네요.”

환히 웃은 예결은 남궁운을 주인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가게를 나설 때, 예결의 품에는 잘 포장된 꾸러미가 하나 들려 있었다.

‘이제 잘 보관했다가 대사형에게 선물을 드리면 된다!’

배실배실 웃는 예결은 기분이 날아오를 듯 좋아졌다.

두둑하게 챙겨서 나온 전낭이 가벼워졌지만, 마음도 덩달아 가벼웠다. 그동안 열심히 노동해서 벽조목을 팔아치운 보람이 있었다.

“슬슬 돌아가지요.”

이제 볼일도 다 봤겠다, 남궁운을 바래다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중심가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골동품 가게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여유가 있던 거리에 어느새 인파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거리가 붐비네요.”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운만 괜찮으면 저자를 피해서 조금 돌아갈까요?”

다른 사람과 닿는 건 딱 질색인 예결은 남궁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그가 머무르는 객잔은 번화가에 있으므로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는 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저는 시간이 넉넉합니다.”

남궁운은 사양하지 않았다.

예결이 선물을 한참이나 고르긴 했으나 벌써 헤어지기엔 아쉬웠다. 비록 사람이 많은 거리를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라곤 하나 이렇게 함께 있을 시간이 늘어나는 게 싫을 리가 없었다.

“선물 찾는 일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이 아니었으면 그 가게의 존재도 모를 뻔했네요.”

예결은 점잖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뭘요.”

“어쩌다가 그런 곳을 알게 된 겁니까?”

“음.”

남궁운이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비밀이었지만, 예결은 당 공자와 항주에서 만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셨다고 했으니 말씀드려도 상관없겠지요.”

아는 이름에 예결의 귀가 쫑긋했다.

“그. 당 공자가 연모하는 소저가 흥미를 보인다는 문인의 서체를 찾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아하. 이해했습니다.”

예결은 은은하게 웃었다.

‘당세기가 또 도토리 찾아서 다람쥐 했구나.’

“그걸 선물하고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는군요. 사천의 수집가란 수집가는 다 만나보고 심지어 흑점까지 가봤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흑점’이라니.

역시 정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도련님에게 암시장은 탐탁지 않은 장소인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다가 청해까지 온 당 공자가 방금 들렀던 골동품 가게에서 괜찮은 필사본을 건졌습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 공자가 선물은 잘 전했나요?”

예결은 당세기가 그 도토리를 건네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에 지금 들고 있는 문진의 포장지 정도는 걸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니나 다를까, 남궁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보 가주께서 장안의 부자가 가지고 있던 원본을 사들여 딸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럼 필사본은……?”

“당 공자의 방에 걸려 있더군요.”

남궁운과 함께 당세기의 애석한 짝사랑의 역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예결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가 느끼던 어색함이 두드러졌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접어들긴 했다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다. 번화가 바로 뒤쪽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일행의 발걸음 소리 외에 적요한 사위를 깨달은 예결은 대체로 묶어두던 감각을 열어젖혔다.

건물의 귀퉁이, 그리고 지붕 위와 천막 뒤에 숨은 이들이 ‘보였다’.

‘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하나같이 은신술을 고도로 훈련받은 무림인이 분명했다.

남궁운은 어느새 본인의 검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고 일부러 떨어져 걷던 삼랑이 예결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무공을 쓸 수 없는데 살수의 습격이라니!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결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도저히 죽을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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