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도둑 키스 (10)
문밖에 있는 기척을 삼랑이 막아서지 않은 걸 보면 의원을 급히 찾아온 환자일 거라 생각한 예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가에 대사형이 서 있었다.
“네가 의원을 찾았다고 하여서.”
하량의 낯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쪼르르 대사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하량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올려놨다.
“저는 멀쩡해요. 여기 온 건 저를 감싸준 남궁 공자가 다쳐서……!”
와락.
하량은 예결을 품에 끌어안았다. 두 손으로 예결의 어깨를 쥔 하량이 저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이 중간에서 어떻게 와전됐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너를 만나러 상단에 갔는데, 삼랑이 기별을 보냈더구나. 살수를 만나서 의원으로 향했다고.”
물론 살수를 만나긴 했지만! 그래서 의원에 온 것도 맞지만!
하량은 앞부분만 들은 뒤 한달음에 달려온 게 분명했다.
“아니. 대체 무슨 오해를 하신 거예요.”
사뭇 필사적인 악력이었다. 예결은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하량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아이고. 대인.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 공자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뒤늦게 쫓아온 삼랑이 하량을 만류했다. 여기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지 호칭은 또 대인이었다.
‘따로 프로토콜이라도 있나.’
마침내 하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결을 품에서 놓는 것 자체가 괴롭다는 듯,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는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경한 무언가를 바라보듯 사제의 얼굴을 집요하게 시야에 담았다.
갑자기 나타난 하량이 만든 분위기 때문에 남궁운과 의원은 차마 끼어들 생각조차 못 하고 물러나 있었다.
이제야 그들이 눈에 들어온 양 하량은 예결을 곁으로 잡아끌었다. 대사형이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을 느끼며 예결은 얌전히 손을 모았다.
아무리 하량의 오해 때문에 발발한 상황이라지만 그의 안에 불안을 심어놓은 건 예결이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이십 년 만에 재회한 데다가 두 번째에는 온갖 독에 중독된 채로 흑귀에게 몸을 내주지 않았나.
이번이 세 번째가 될 뻔했다.
예결은 입이 백 개라도 말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쪽이 내 사제를 감쌌다고.”
하량은 예결과 사형제지간이라는 걸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남궁세가의 남궁운입니다.”
한쪽 팔을 걷은 채 붕대를 한 남궁운이 정중하게 포권했다.
하량은 조금 차가운 시선으로 남궁운을 바라봤다.
‘착각…이 아닌 거 같은데?’
대사형의 눈빛이 냉랭하다는 걸 알아챈 예결은 조금 놀랐다.
‘두 사람은 서로 안면이 없지 않나?’
어쩌면 남궁세가와 제하량의 사이가 별로일지도 모른다. 남궁운은 선한 편이니까 현재 가주가 대사형을 열받게 한 적이 있다거나…….
어쩌면 암살 사건에 휘말린 것 자체가 남궁운의 탓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고서야 선량한 대사형이 생면부지의 상대를 앞에 두고 적의를 내비칠 리가 없었다.
“만나게 되어 반갑군.”
추측 사이로 하량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뜻밖에도 진심으로 이 순간을 고대한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제하량이라고 하네.”
제하량.
남궁운은 그 이름을 혀 위에 굴려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다.
처음 제하량이 등장한 순간, 남궁운은 제 눈을 의심했다.
도무지 저 남자의 경지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순간 느껴졌던 기세를 보면 무인이 분명했다. 그러나 평정을 되찾고 그의 앞에 선 제하량에게서는 일말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섞는 동안 아무리 살펴도 태양혈은 불거진 기미가 없고 기세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또래에서 저와 견줄 자를 만나본 적 없는 남궁운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남궁운보다 조금 윗줄이거나 비슷한 나이일 거라 짐작되는 외양이었다.
혹여 반박귀진에 이른 고수일까 싶어 귀밑머리가 하얀색인지 살폈으나 저 사내의 머리는 먹처럼 검기만 했다.
그렇다면 반로환동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건데…….
‘말도 안 된다.’
화경을 넘어선 현경의 고수는 그저 전설로만 내려오는 존재일 뿐이다.
무인이 강물을 가를 수는 있어도 바다를 벨 수는 없듯이. 그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한계가 존재했다.
‘내 착각이었나?’
상대가 현경의 고수라면 천하제일인인 셈인데, 제아무리 강호가 넓다고 한들 저런 자를 키워냈다면 소문이 나야 마땅했다. 한데 남궁운은 그런 문파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그나저나 예결에게 사형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혹 귀하의 사문이 어디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남궁운의 질문에 예결은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꼈다.
대사형의 파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예결은 슬금슬금 몸을 옮겨 하량을 남궁운의 시야에서 가렸다. 하지만 머리가 하나 이상은 차이가 나는지라 그 노력은 허사였다.
‘그래도 전생보다는 커졌는데…….’
“그건 곤란하군.”
하량이 딱 잘라 답했다. 남궁운의 눈썹이 살짝 움찔했다.
“작고하신 사부님께서 살아생전 유언으로 사문을 밝히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양해해 주리라 믿네.”
교묘하게 사실을 생략하긴 했으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단 파문당했으니 곤륜파 출신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할 자격을 박탈당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대사형을 파문시킨 게 정말 백운진인이라면 사부님의 명 때문에 사문이 어딘지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제법 아귀가 들어맞는다.
‘우리 대사형, 이십 년 동안 험난한 강호에서 구르면서 없는 요령도 생긴 건가? 어찌 됐든 다행이야…….’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궁운에게 대사형의 존재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애면글면했던 게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현명한 제하량에겐 언제나 답이 있었다.
“그랬군요……. 예결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눈치라 무문에 소속되어 있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겪었지.”
하량은 상상의 여지가 남게끔 모호한 곳에서 말을 끊었다. 대사형 입장에서는 이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무슨 가설을 세웠는지는 몰라도 남궁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네만 괜찮다면 이만 사제와 함께 돌아가고 싶군. ”
거의 통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궁운은 의연함을 꺾지 않은 채 예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결은 어찌하고 싶습니까?”
“저는.”
예결은 슬쩍 남궁운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운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침착했다. 다만 그의 시선은 예결의 어깨를 감싼 하량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결이 꺼낸 말에 하량의 입에서 나직한 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마치 긴장을 처음으로 놓은 사람 같은, 그런 옅은 한숨이.
“적잖이 놀란지라 사제의 친우를 제대로 대접할 수 없음을 부디 양해해주게.”
“아닙니다. 문 공자께서도 금일 큰일을 겪으셨으니 돌아가서 푹 쉬는 게 좋겠지요.”
큰일은 무슨.
예결은 혀를 찰 뻔했다.
이쪽은 남궁운과 삼랑이 몸 바쳐 지켜준 덕분에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았다.
“운은 몸이 다 나을 걱정부터 하십시오. 다 나을 때까지 의원 찾아오는 것도 잊지 말고요.”
예결은 걱정스러운 면박을 건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궁운은 하량이 등장한 이래 처음으로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보는 이의 눈에 저 둘이 퍽 친근하게 비친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다음 기회에.”
하량은 짤막한 일별로 예결과 남궁운 사이의 대화를 끊어냈다. 거의 붙들리다시피 하량에게 이끌려 의방을 나서며 예결은 눈짓으로 남궁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의방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나같이 명마가 그 앞에 매여 있는지라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이쪽에 한 번씩 머물렀다.
언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홍여가 고삐를 쥔 모습에 예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하량은 마차의 문을 열고 예결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여유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길이었으나 와중에 예결이 마차의 벽에 부딪힐까 봐 문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대사형.”
하량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 앉기가 무섭게 예결은 그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제하량은 아무 말 없이 마차의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홍여가 마차를 출발시키는 게 느껴졌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이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마차가 덜컹덜컹 움직였다.
그러나 침묵은 여전했다.
“많이 걱정하셨어요?”
예결은 하량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걱정?”
하량은 그보다 더 낯선 단어를 들어본 적 없다는 듯 처음으로 예결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구나.”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그 저변에는 초조함이 녹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 네가 어디든 마음 가는 대로 돌아다녀도 좋다고 말해 놓고, 그 약조를 거두고 싶은 졸렬함이 걱정으로 비친다면 내게는 다행이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낸 비스듬한 그림자는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하량의 얼굴을 반쯤 먹어 치웠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문득, 그 음영이 만들어내는 스산한 분위기가 지금의 하량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그답지 않게, 나직한 사과가 귓가에 닿았다. 화들짝 놀란 예결이 고개를 들어 올려 손을 내저었다.
“대사형이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미안해야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하량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 우형의 인내심이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어찌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가겠느냐.”
이윽고, 창백한 낯을 한 사내가 웃었다.
투명해서 언제나 속이 들여다보일 듯하고, 선량하기 이를 데 없어 온화하기만 했던 평소의 웃음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독을 품은 것 같은 화려함이었다.
낯설기 짝이 없으나 하량에게는 기묘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화사한 미소에 예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예결은 그게 비포장도로 위를 내달리는 마차의 흔들림 때문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이 떨림은, 이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은 전부 하량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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