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도둑 키스 (11)
“진짜로 지금 가셔야 합니까?”
우는 소리를 거의 안 하는 삼랑이 예결을 붙들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렸다. 외출 채비를 하던 예결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내일이 대사형 생일이라니까?”
여기 와서 온갖 일이 있어서 일주일은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제 대사형의 손에 이끌려 돌아온 뒤 푹 잠든 게 아니겠는가.
자고 일어난 예결은 하인들이 평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왜냐고 물어보니 오늘이 청명(淸明)이란다.
‘내일이 대사형 생일!’
시일을 착각하긴 했으나 본능이 일한 덕분에 이미 선물도 샀겠다, 살수들의 습격에 휘말린 채로도 깨지지 않게 잘 간수했으니 뭐가 문제겠느냐만,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의방에 두고 왔어…….’
남궁운이 다친 것만으로도 퍽 놀란 상태였는데 의방에 대사형이 나타난 일로 그야말로 혼비백산한 예결은 결국 잘 포장된 선물을 두고 와 버렸다.
반쯤은 하량이 그를 끌고 나온 탓도 있었으나, 원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사는 법. 예결은 걱정 탓인지 어제부터 두문불출하는 하량보다 머리에 제대로 힘을 주지 않은 스스로를 탓했다.
남궁운이 잘 챙겼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일단 가지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달이 났는데 꼭 가셔야겠습니까?”
선물 문제만 아니었어도 예결은 장원에서 얌전히 지낼 작정이었다.
“선물 잘 사놓고 버려?”
“제가 가져온다거나?”
귀찮은 게 딱 질색인 삼랑치고는 정말 뜻밖의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솔깃했던 예결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운이 퍽이나 널 믿고 내주겠다.”
“음.”
삼랑은 빈말로도 신뢰의 아이콘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 비범한 무공 실력까지 뽐내지 않았나.
예결은 이유는 몰라도 삼랑이 일부러 살수를 전부 죽였다는 걸 반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삼랑은 예결이 무얼 지적하는지 잘 알았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교룡선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해서 유독 남궁세가의 소가주 앞에서 수상한 꼴을 종종 보이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망할 살수들이 노리고 온 건 남궁세가 소가주가 아니었으니까.
남궁운은 그들의 무기조차 낯설다고 했으나 삼랑은 반달 모양의 칼부터 시작해서 전투 방식까지 전부 눈에 익었다.
주군에게 보고도 올렸겠다, 이제 슬슬 파볼 작정이었지만……. 이런 걸 예결에게 말할 순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삼랑은 성큼성큼 방 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이거 드려요. 이거.”
“미쳤어? 내가 실수로 깨 먹은 벼루를 왜 대사형을 드려?”
“왜. 구름은 없지만, 용 있잖아요. 용.”
“옥이랑 벼루가 같아?”
“문 공자가 지금 서녕에 가는 것보단 그걸 더 기쁘게 받으실걸요?”
“남궁 공자를 암살하려는 시도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또 오겠어? 적어도 몇 주는 더 걸릴걸.”
아이고, 두야.
삼랑은 이마를 짚었다.
물론 예결이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비교적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살수단이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으니 해당 의뢰는 실패한 셈이다. 복수도 생존자가 많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고 저 정도의 피해를 입은 이상 당분간 재정비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게 통상의 방식이니까.
게다가 남궁세가 소가주도 이번 일로 호위를 다시 불러들이거나 했을 테니 오늘이 가장 안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암살 시도뿐이 아니라는 거였다. 예결이 남궁 공자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삼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제 서녕의 의방에서 돌아와 만난 진영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별실을 통째로 비웠다.”
“음.”
“밤에는 실수로라도 드나들지 않게 주의하도록.”
설명은 그게 다였으나 삼랑이 이해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채비하러 가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다녀오지요. 기왕이면 해지기 전에.”
“좋아.”
예결은 반색했으나 삼랑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뢰를 빌려 볼까.’
교로 갔던 홍여가 때마침 돌아와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
남궁운은 아침 일찍 의방에 들렀다. 예결이 신신당부한 대로 치료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제 오신 환자분이시군요.”
늙은 의원이 반색하며 남궁운을 맞이했다.
“두고 간 물건을 찾으러 왔네만.”
“여기 잘 챙겨 두었습니다.”
예결의 꾸러미는 처음 모습 그대로 남궁운의 손에 돌아왔다.
‘그 사내를 위한 것이겠지?’
어제 만난 예결의 대사형을 보는 순간, 남궁운은 그가 선물의 주인임을 직감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슬함이 가슴을 스친다.
본인이 위축되었다는 사실을 의연하게 갈무리한 남궁운은 의원에게 작은 전낭을 건넸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사례에 노의원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중요한 물건이라 그러네. 부디 받아주게.”
“그렇다면야…….”
어색하게 전낭을 챙긴 의원이 남궁운의 뒤쪽을 기웃거렸다.
“왜 그러지?”
“어제 함께 오셨던 공자는 오늘 아니 오십니까?”
“아아. 오늘은 나 혼자다.”
“……그렇습니까.”
“그를 아나?”
“아닙니다. 묘하게 어디에선가 본 거 같아서…….”
남궁운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본 적이 있다고?”
여기가 서녕의 의방이고 예결은 청해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상단이니 저 의원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건 아니었다.
“환자로 만난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거 원,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예전처럼 신통치 않아서.”
미간을 짚고 몇 번 끙끙거린 의원은 후한 손님을 문가까지 배웅해 주었다.
객잔에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하가 무릎을 꿇었다.
“소가주님.”
남궁운은 예결의 선물을 조심스레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물었다.
“살수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알아냈나?”
“시신은 물론이고 혈흔마저 전부 사라졌습니다.”
“……뒤처리가 절묘하군. 누군가 우리의 눈을 가린 채 움직였어.”
“송구합니다.”
남궁운의 말에 수하가 침통한 낯을 했다.
“아니다. 여긴 안휘에서 머니 남궁세가의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일 처리에 다소 미진함이 있어도 함부로 수하를 탓하지 않는 어린 주군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존재였다. 단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제 능력이 아쉬울 뿐이었다.
“일단 그림을 그려줄 테니 그런 형태의 무기를 주로 쓰는 살수 집단부터 추려줬으면 하네. 그리고 또…….”
때마침, 누군가가 남궁운을 찾아왔다.
“운!”
그 부름에 남궁운은 말을 잇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그 난리가 났는데 하루 만에 돌아온 예결의 존재는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헤어졌으니 며칠은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남궁운의 입가에 그가 의식하지 못한 반가움이 스쳤다. 그가 손을 휘휘 내젓자 남궁세가에서부터 소가주를 배행한 수하가 조용히 물러났다.
“예결?”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온 예결은 탁자 위의 보따리를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아. 역시. 운이 가지고 있었군요.”
“어제 경황이 없어서 의원에 두고 온 줄도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생각이 나기에 직접 찾아가서 가져왔습니다.”
예결은 남궁운의 성실함에 감동했다.
“정말 고마워요. 날짜를 따져보니 내일 전해드려야 하는 선물이라 다급하게 운을 찾아왔는데, 이렇게 챙겨주셨을 줄이야.”
“이렇게 오셨으니 잠시 차라도-”
“자자.”
남궁운이 예결에게 권유를 건네기가 무섭게 삼랑이 끼어들었다.
“나오면 안 되는데 나오신 거 알고 있지요?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을 때면 그림자처럼 예결의 뒤를 따르던 삼랑은 드물게 목소리를 냈다.
“알아. 알아.”
예결은 혀를 차고 남궁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오늘 못 마신 차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소중한 옥 문진이 잘 있다는 걸 확인한 예결은 보따리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말했다.
“예결의 물건을 잠시 맡아두었을 뿐인데,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다음에 차를 마시기로 한 약속은 잘 품고 있겠습니다.”
말 대신 칼로 대화하는 이 살벌한 강호에서 저렇게 바르게 큰 청년이 있다는 사실에 예결은 조금 감동했다.
밖으로 나온 삼랑은 예결이 적뢰에 타는 걸 지켜보며 물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응. 이제 좀 살 거 같네.”
삼랑이 날렵하게 적뢰에 올라타자 말이 곧장 출발했다. 경보로 저자를 지나며, 삼랑은 불현듯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선물은 내일 전해드릴 겁니까?”
“뭐?”
때마침 바로 옆을 지나가던 우마차 소리에 삼랑의 말이 뭉개졌다.
“아닙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삼랑은 가볍게 생각했다. 어차피 이 장원 내에는 전부 교의 사람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런 곳에서 누가 주군의 사제에게 위협을 가하겠는가.
“싱겁기는.”
성문을 통과한 적뢰는 순식간에 장원을 향해 내달렸다.
방에 들어간 예결은 탁자 위에 선물 꾸러미를 올려놓으려다가 멈칫했다. 탁자 위에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 잔만 비어 있는 걸 본 예결은 복도를 닦던 하인을 불렀다.
“누가 내 방에 다녀갔나?”
“주인님이 공자를 찾으셨었습니다.”
“대사형이?”
하필 잠시 자리를 비운 때에 다녀가신 모양이었다.
또 외출 금지를 당한 건 아니라지만 어제 그렇게 걱정하던 제하량을 봤던 예결의 양심이 따끔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존재감이 강해진 흔적기관을 꾹꾹 누른 예결은 빠르게 결정했다.
‘일단 씻고. 바로 선물 들고 대사형 보러 가자.’
이럴 땐 자진납세가 최고다.
대사형 선물 가지러 갔다고 하면 조금 속상해하더라도 금방 기뻐해 주시리라.
‘어차피 바로 내일이 생일이시고. 내가 제일 먼저 축하해 드리고 싶었으니까.’
합리화를 마친 예결은 하인을 시켜 욕탕에 물을 받게 했다.
몸도 정갈하게 씻고 옷도 갈아입은 예결은 품에 선물 보따리를 안은 뒤 별채를 나섰다.
채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예결의 뒤로 촉촉한 족적을 남겼다.
하량의 거처에 도달한 예결은 어둑한 내부를 잠시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이 시간에도 일하고 계셨는데?’
사위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혹시 하량이 자리를 비웠나 하고 내부를 살핀 예결은 단 한 사람, 제하량이 그의 침소에 있음을 확인했다.
‘계시네.’
그는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예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라던 하량은 그 말마따나 어느 때고 예결의 방문을 막은 적 없는 까닭이다.
만약 평소처럼 하인이 포진해 있었다면 누군가는 예결을 막아 주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건물은 완전히 빈 채였다. 심지어 진영은 삼랑과 살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물러나 있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예결은 성큼성큼 하량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장지문 앞에 멈춰 선 예결은 노크 대신 입을 열었다.
“대사형?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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