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도둑 키스 (12)
방 안으로 들어선 예결은 주변을 둘러봤다. 불러도 답이 없던 대사형을 찾기 위함이었다.
내부에는 은은한 향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향기였다.
‘숙면용 라벤더 향초 같은 건가.’
문득 그의 눈에 화분이 하나 들어왔다. 다른 때였다면 관심도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볕이 잘 들어올 법한 창가에 놓인 화분은 다 말라비틀어진 화초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은 잘 못 키우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다. 남들 다 잘 키우는 다육이도 말려 죽이는 마이너스의 손.
뭐든 잘하는 대사형이 식물만은 제대로 못 키운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귀엽기도 했다.
가을의 은행잎처럼 노랗게 변한 화초라면 내다 버릴 법도 한데, 부득불 곁에 두고 보살피는 것마저도 제하량답다.
‘한번 품에 들이면 절대 버리지 않는 분이시지.’
원체 지고지순한 성품인 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했다.
‘우직하고 요령 없고……. 사기당하면 바닥까지 뜯기겠지.’
그래서 예결은 제일 먼저 사기를 치기로 했다. 자신이 하량을 전부 차지하고 나면 후발주자는 가져갈 것도 없을 테니까.
스무 해나 떨어져 있었기에 예결은 하량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덜덜 떨긴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걱정마저 최근에 해소했으니 지금의 예결은 그야말로 순풍 만난 돛단배나 다름없었다.
예결은 방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움직였다. 그러자 가구에 가려져 있던 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천개가 길게 늘어져 있었으나 그 너머의 실루엣이 은근히 비쳤다.
“대사형?”
부름에도 답이 없었다.
예결은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설령 제하량이 잠들어 있다고 해도 빼어난 무인인 그는 기척에 깰 법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예결이 하량을 몇 번이나 부르지 않았던가.
‘정말 곤히 잠드신 모양인데 지금이라도 돌아가?’
잠시 망설이던 예결은 침상 쪽을 다시 힐끔거렸다.
반투명한 천이 하량의 모습을 보일 듯 말 듯 감추고 있었다. 아예 그 너머가 비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 감질나게 그 윤곽을 보여준다.
잠든 하량이 어떤 얼굴일지, 예결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만난 대사형은 항상 깨어 계셨지.’
항주에서 잠시 침상을 공유했을 때마저도 하량은 졸린 듯 보였지 정말 깊이 잠든 건 아니었다.
보고 싶다.
수마에 잠겨 완전히 무방비해진 제하량의 얼굴이.
‘음. 안 아프군.’
예결은 가슴에 손을 올렸으나 딱히 양심이 아프진 않았다. 빠르게 흔적기관과 합의를 본 에스퍼는 숨죽여 침상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은 그는 천개를 조심스레 걷어냈다.
그 너머에, 하량이 있었다.
침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눈 감은 사내는 도저히 잠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뺨 위로 드리우는 음영이, 가지런한 숨소리가, 또 무표정한 입매가 하량이 잠들어 있음을 시사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차가워 보이는 얼굴이네.’
예결은 숨죽여 하량을 바라봤다. 칼로 벼려낸 것만 같다.
평소의 하량이 자신을 보면 얼마나 웃는지, 또 다정한 눈을 하는지 잘 아는 예결은 왠지 배실배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나저나…….’
숨죽여 하량을 훔쳐보던 예결은 침상 옆에 흘깃 시선을 줬다.
자그마한 탁상 위에는 은은하게 타오르는 초와 거치대에 놓인 연죽이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은은한 향기는 저 연죽에서 난 모양이었다.
‘연죽이든 담배든 딱히 별생각 없었는데.’
별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에스퍼로 태어난 후에는 지독하게 예민해진 후각 때문에 흡연자를 피해 다녔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 녀석인지, 제하량이 연죽을 들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궁금해졌다.
신경을 누그러뜨리려 피우는 거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향도 예결이 아는 담배와는 전혀 달랐다.
‘슬슬 나가자. 선물은 내일 전해드리지, 뭐.’
예결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계속 넋을 놓고 있다가는 하량이 깨어날 때까지 꿈쩍도 못 할 것 같았다.
나가려던 예결은 반쯤 타서 녹아내리는 초를 흘깃 확인했다.
대사형이 연초를 태우다가 잠드는 바람에 초를 끄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후’ 하고 초를 불어서 끄자 주변에 어둠이 밀려들었다.
예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량 쪽을 바라봤다. 잠시 숨죽여 음영 진 이목구비를 살핀 예결은 아쉬움을 삼키며 살금살금 천개 밖으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아.”
등 뒤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명료하진 않았으나 분명히 고통을 호소하는 음성이었다.
“대사형?”
예결은 방금 벗어났던 어둠 속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전히 눈을 감은 하량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잔뜩 찌푸린 이맛살과 살짝 벌어져 섬어를 내뱉는 입술. 그리고 어느샌가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찰나 사이에 생겨난 변화라기엔 지나치게 극적이다.
예결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뭐라 중얼거리는 하량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대사형.”
아무리 채근해도 굳게 닫힌 눈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 불 때문인가?’
그럭저럭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하량이 이변을 보이기 전과 후, 달라진 건 한 가지뿐이다.
초를 까먹고 못 끈 게 아니었다면? 일부러 켜놓은 거였다면?
예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불을 붙일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는다.
벽조목을 만들면서 힘을 다루는 방법을 제법 터득했으나 아직 번갯불로 초를 밝힐 정도로 섬세한 조절은 무리였다.
“어서 일어나세요.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예결은 하량을 잡아끌었다.
그때, 하량의 손이 예결의 손목을 불쑥 붙잡았다.
“……네가 또 왔구나.”
“윽!”
반사적으로 신음이 튀어나올 정도로 지독한 악력이었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붙잡힐 때까지 전혀 몰랐다. 제 가이드가 무림인임을 실감하며 예결은 크게 휘청였다. 예결의 손에서 보퉁이가 굴러떨어지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예결은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까딱 잘못 움직이면 뼈가 부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멍들 거 같은데.’
조금 다쳐도 금방 낫는 제 몸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하량이 깨어난 뒤 죄책감을 느낄 게 걱정이었다.
하량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흡사 대사형을 덮치는 모양새로 그의 위로 무너진 예결은 자유로운 팔로 침상을 짚고 필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이거 영 이상하다.
예결은 다급하게 하량의 낯을 살폈다.
대사형은 눈을 뜨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예결이 아니라 허공을 보는 듯 혼탁하기만 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사내가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조용한 거 같은데.”
“누구, 누구를 찾으시는 거예요?”
그는 예결이 모르는 악몽 속에서 헤매는 듯 보였다.
“아니지. 틀렸어.”
하량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곧 짝귀와 독사가 온다고 해야지.”
오싹할 정도로 낮은 저음이 귓가에 닿는 순간, 살갗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게 무슨, 무슨 소리예요?”
예결은 하량에게 물었다.
짝귀와 독사 운운하는 걸 보면 대사형이 상대를 착각한 것 같진 않은데……. 문제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다.
정작 예결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웃은 남자가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으려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하량을 보며 예결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저 나가서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게요. 잠시, 잠시만요…….”
이대로 하량을 방치하는 게 위험하다는 건 확실하다. 예결은 단호하게 하량의 손을 풀어냈다. 그의 손아귀 아래 시퍼렇게 물든 손목이 드러났다.
“벌써 가려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하량이 속삭였다.
“또 나를 두고. 그렇게.”
뚝, 뚝, 끊어지는 음성이 예사롭지 않았다.
악몽에 사로잡힌 사람과 대화를 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았으나 예결은 안타까워 입을 열었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량은 예결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이번엔 단순히 예결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예결을 끌어안고 한 바퀴 뒹군 하량은 두 팔 사이에 사제를 가둔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예결은 본인이 하량의 품 안에 갇혔음을 깨달았다.
“왜 나를 살렸니?”
하량은 여느 때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추궁했다.
“차라리 그때 죽게 두었어야지.”
여과 없이 흘러나온 선명한 원망이 예결을 사로잡았다. 뺨을 애틋하게 어루만진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목줄기 위를 더듬으며 심장 박동을 확인하듯 잠시 눈을 감았던 사내가 손에 힘을 줬다.
“사…… 사형.”
예결은 입술을 달싹였다.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과 별개로, 이 상황이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제하량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쉬이……. 착하지?”
말 안 듣는 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말투와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안타깝다는 듯 벌어진 입술과 상냥하기 짝이 없는 미소.
그리고 예결의 숨통을 조이는 손길.
이 중 어느 하나 진심이 아닌 게 없었다.
“금방 끝날 거란다……. 네가 없어야. 본좌가 죽을 수 있을 테니.”
‘하량의 손목을 붙들고 바르작거렸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이 정도는 금방 풀어내고, 하량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거력이 예결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 흑…… 아……!”
속이 뒤틀리고,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목을 조르는 감각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 고통.
언제나 예결에게 안식을 주던 바로 그 가이딩 에너지가 그의 몸 안을 찢고 부수고 거칠게 헤집는다.
역가이딩이다.
‘어떻게. 이걸 어떻게……?’
예결은 겪어본 적 없는 고통에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이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의 움직임이었다.
‘어떻게든 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 눈을 부릅뜨는데 문득, 하량의 손등이 보였다. 붉게 할퀸 자국이 나 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악하다가 남긴 상흔이었다.
“대…… 흑……. 대사형…….”
순간 예결은 거칠게 몸부림치던 것을 멈췄다. 제 목을 조르던 사내를 저지하고 있던 손아귀마저 풀어버렸다.
대신, 그는 하량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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