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36화 (136/203)

136화. 도둑 키스 (13)

사냥감의 반항이 멈추자 하량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제 등을 끌어안는 두 팔에 그는 활짝 웃었다.

“그래. 아직이지.”

저항을 멈추고부터 예결의 시야는 점차 흐려졌다.

평범한 인간보다야 오래 버티겠지만 산소가 차단되면 졸도하는 건 에스퍼도 똑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역가이딩까지 당하는 중 아니던가. 신체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였다면 번개를 쳐서라도 하량을 공격하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시도만으로도 피를 토할 게 자명했다.

속이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주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는 거였다.

‘최소한 대사형은 안 다칠 테니 그걸로 됐다.’

어차피 전부 하량이 준 것인데 그가 앗아간들 무엇이 아까울까.

하지만 자신이 여기에서 죽으면. 그럼 하량은? 그는 버틸 수 있을까?

‘이번에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현대로 이동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 경우엔 오히려 자신이 못 버틸 거다.

자신에게도 가이드라는 게 실존한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는데, 어떻게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에스퍼를 잃은 가이드는 살아남아도,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는 죽는다.

가장 오래 버틴 기록은 일 년 삼 개월 정도.

성질 급한 예결은 자신이 그 정도로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안, 아주세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면.

“한…… 번만.”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나 예결은 악착같이 하량의 몸을 끌어안았다.

역가이딩의 여파로 맞닿아 있을수록 살이 찢기고, 뼈가 깎여나가고, 피가 마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예결은 하량을 놓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가이딩이 아닐지라도 하량에게서 갈취할 수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제 것이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아.”

하량의 탁한 눈에 예결의 미소가 들어왔다.

시작만큼이나 급작스럽게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갑작스럽게 풀려난 예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이래 봤자 소용없지.”

목이 졸리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는 얼굴에 사내는 자조했다.

그가 울고, 웃고 화를 내도 상대는 반응하지 않는다. 이건 그의 심마가 빚어낸 환각일 뿐이니까.

“너는 이미 죽었으니까.”

하량은 언제 그리 살벌하게 목을 졸랐냐는 양 맥이 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짙은 체념과 반복된 무기력함에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대사형이 비통하기 짝이 없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다시…….”

혼절한 하량의 몸이 예결의 위로 무너져내렸다. 그의 품에 갇힌 예결은 잠시 눈만 깜빡거렸다.

무거운 팔을 천천히 밀어서 빠져나온 예결은 거의 구르다시피 바닥으로 추락했다.

“쿨럭, 쿨럭.”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그는 채 두 다리로 서기도 전에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십년감수했다…….’

털썩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른 예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올린 그는 본인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굳이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시퍼런 손자국이 남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당장 보이는 본인의 손목이 하량의 손 모양으로 붉고 푸르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대체 왜?’

예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량이 제 몸 위에 무너져내린 직후, 그의 감정이 전해졌다.

역가이딩도 가이딩이라고, 감정 전이가 일어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센터 기록에서도 그런 사례는 없었던 거 같은데.’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은 다시 잠든 하량을 훔쳐봤다. 침상이 조금 흐트러진 것 외에는 조금 전의 사건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러나 예결은 저 기저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안다.

희열, 두려움, 그리고…… 욕망.

두 번째 감정 전이가 남기고 간 감정들이었다.

‘대사형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죽음을 열망하고 있었다고?’

예결은 천천히 그간 보고 느낀 하량의 모습을 되짚었다.

놀라우리만치 짚이는 게 없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있었다면 개처럼 파헤치고도 남았을 거다.

‘내 관찰력 부족은 아니야.’

느릿느릿, 행여라도 다시 하량이 깨어날까 주변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예결은 차근히 추론해나갔다.

‘대사형이 너무 잘 숨긴 거지.’

어쩌면 숨길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우울은 드라마틱하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모든 걸 놓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예결은 그 사실을 스스로를 지켜보며 배웠다.

‘일단 여길 나가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예결은 바로 천개 밖으로 몸을 옮기지 않고 침상 근처를 서성였다.

일말의 망설임이 생기긴 했으나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처럼 고요한 사내를 가만히 내려다본 예결은 결단을 내렸다.

“잠시…… 실례할게요.”

잠든 이의 위로 몸을 기울인 예결이 속삭였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평소라면 알아서 회복되었을 몸은 역가이딩 때문에 엉망이다. 그런데 하량이 진심으로 목을 조른 손자국을 목에 단 채 밖에 나가면 일대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예결이 입을 다물어도 범인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꿈결이었다지만 사제의 목을 졸랐다는 걸 알게 되면 대사형이 어떻게 될까?

‘절대 안 되지.’

그러니 조금이라도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시퍼런 멍을 지울 게 아닌가.

마침내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도달한 예결은 우뚝 멈췄다.

그는 내려가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탓에 예결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침상 옆에 머리를 박았다.

하량의 입술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렇게 요란하게 기침을 해도 일어나지 않은 대사형이 제 심장 소리에 깰 것 같다는, 비이성적인 걱정까지 들 정도로.

‘못 하겠어.’

비록 눈을 가린 채였다지만 이 사내와 몸도 섞었고 입술도 겹쳐봤다.

긴긴밤을 맨살을 맞댄 채로 지새워 봤고, 저 손에 붙들린 채 수음하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고작 몰래 입술을 훔치는 게 다 뭐라고 처음 곤륜에 발을 들이던 순간만큼이나 떨렸다.

‘정말 여기에 그 도련님이 있을까?’

‘내가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땐 어쩌지?’

‘너무 늦어서, 그래서 도련님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있을지도 몰라.’

어린아이의 머리로 짜낼 수 있던 모든 두려움으로 덜덜 떨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었다.

설렜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 진짜 죄송해요.”

예결은 상대가 듣지도 못할 사과 몇 마디를 웅얼거리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 수 있어. 나를 위해서 못 하겠으면 대사형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스스로를 가다듬은 예결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팔로 침상을 짚은 채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입술이 포개지기 전, 예결은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말캉한 것에 스치듯 닿은 순간, 예결은 몸을 휙 뒤로 뺐다. 찰나의 가이딩에 진탕이 된 속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으나 머릿속은 다이달로스의 미궁만큼이나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면 됐어. 어디 가서 반나절만 숨어 있자.’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선물을 챙긴 예결은 천개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방을 나서는 예결의 목에 남은 하량의 자취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으나 그의 귓불은 백일홍과도 같은 선홍색으로 물들어갔다.

***

하량은 두 눈을 떴다.

‘이렇게 푹 잠든 건 오랜만이군.’

이상하게 만족스럽고 몸이 가볍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는 멈칫했다.

겨우 반만 타들어간 초가 꺼져 있었다.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탁자 아래에는 불을 범위 내에만 가두고, 그 대신 꺼지지 않게 하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들어왔나?’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시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일을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장원에 들인 이들은 하량의 광증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건 그가 익힌 무공의 부작용이었다.

정파의 무공, 그것도 곤륜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태허무량심법으로 단전을 만든 하량은 후일 마의 때문에 마공을 강제로 익히게 되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전혀 다른 성질의 진기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때 혈도가 너덜너덜해지거나 찢겨나가서 다시는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서 끝나면 오히려 다행이다. 완전히 반대되는 성질의 무공을 동시에 익혔으니 폐인이 되거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의가 손을 쓴 하량의 몸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견뎌냈고 그의 삶을 억지로 이어 붙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서로 양극단에 있는 무공을 익힌 덕에 여느 무인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살아남은 하량의 안에는 고독이 심어졌고, 그는 천마신교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발판처럼 쓰였다.

교의 명령에 따라 중원에 파견된 하량은 숱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한때 존경하던 검호도 하량의 칼끝에서 스러졌고 오랜 전통의 문파도 멸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울었고 그의 손에 끌려온 인질들이 제발 놓아달라 애걸했다.

이것이 고독 때문에 강제된 명령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량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나마도 마공의 성취가 심후해질수록 그런 감정은 옅어져 갔다.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며 그는 깨달음을 얻고 더 높은 경지로 뛰어올랐다. 마공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공능에 있었다

점차 하량은 한 사람의 무인이 아니라 한 자루의 검으로서 완성되어갔다.

살아 있는 이를 상대로 들끓는 살의에 아예 몸을 맡기면 좋았으련만, 남아 있는 제 일부라도 지키고자 버텼다.

태허무량심법이 하량의 명징한 정신을 조금이나마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짓을.’

그렇게 지독한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하량이라는 인간은 천천히 깎여나갔다.

다행스럽게도, 하량에게는 머잖아 끝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하늘조차 거스른다는 마의라 한들 주화입마까지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곧이다.’

시산혈해로 가득한 전장을 앞에 둔 하량은 죽음을 직감하고 웃었다.

‘정말로……. 이제는 한계야.’

뜻밖에도, 하량을 죽음 앞에서 멈춰 세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13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