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37화 (137/203)

137화. 도둑 키스 (14)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거론될 정도였던 하량의 오성은 주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왔음에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낸다.

하량은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반쯤은 운명에, 반쯤은 마교의 고독에 꼭두각시처럼 얽매인 하량은 사선을 넘나들며 단전에 남은 한 줌 진기까지 전부 써버렸다.

마침내는 생의 마지막 숨 한 자락까지 끌어다가 불태우며 그의 몸이 완벽한 공(空)을 이루는 순간, 하량은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고 이때까지 경지를 한달음에 넘어섰다.

만신창이나 다름없던 몸은 빠르게 수복되었다. 균형을 이룰 수 없었기에 완성되지 못한 그릇 안에 여태 가져본 적 없는 힘이 넘칠 듯 차오르며 넘실거렸다.

붉게 물든 검을 손에 쥔 채, 우두커니 멈춰 선 살귀가 갑자기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트렸을 때, 하량을 향해 접근하던 적의 몸통과 머리가 단숨에 분리되었다.

‘언제쯤…….’

서슬 퍼런 낯 위로 주룩, 하고 피눈물이 흘렀다.

‘언제쯤 나를 놓아줄 생각이더냐?’

눈앞에 있는 것은 정파의 무인도 아니고 마의가 보낸 감시자도 아니라 문예결이었다.

그가 베어낸 모든 이들이 제 사제로 보였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정(正)과 마(魔)가 이룬 비틀린 균형 사이, 채 완성되지 않았으나 까닭에 사라지지도 않는 주화입마의 싹이 하량의 안에 똬리를 틀었다.

“내 어찌 거역하겠느냐.”

하량의 목숨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남는 것이 분명했다.

하나, 둘…… 그리고 쉰여섯.

하량은 끊임없이 예결을 베고 또 베었다. 그래도 활짝 웃으며 저를 향해 다가오는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질 않는다.

‘아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량은 이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때부터 하량의 곁에는 항상 예결이 있었다.

‘이제 무얼 하지.’

고독은 환골탈태와 함께 사라졌다. 금제에서 벗어난 하량은 이제 목표를 세울 자유를 얻었다.

가장 먼저, 그는 광증을 길들이는 법을 익혔다. 삼랑이 처방한 독한 약을 연죽으로 태우고,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제압하기를 우선으로 행동하며 심마를 다루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수하를 모으고 세력을 쌓아 올린 하량은 교주의 목을 베고, 천마가 되어 마교를 제 발밑에 두었다. 마의가 일찍이 전달해준 천마신공의 구결은 불완전했기에, 교주가 되며 온전한 내용을 습득할 수 있었다.

천마신공을 제대로 익히기 시작한 후에야 하량의 환각은 점차 사라져갔다.

아마 천마신공의 성취가 어린 시절 익혔던 태허무량심법의 성취를 아득하게 앞서게 되면서 일어난 현상일 거라 짐작할 따름이다. 애초에 그의 진기가 불안정한 이유는 마공과 정공을 동시에 익힌 탓이었으니까.

마침내 예결의 환각에서 벗어났음에도 하량은 마냥 기쁘지 않았다.

해방감보다 쓸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생겨났다. 하량은 이젠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연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향이라도 태우지 않으면 곤두선 신경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예결을 만나기 전까지는.

‘분명……. 무언가를 손에 쥔 것 같은데.’

허공으로 손을 뻗은 하량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런 자신이 바보 같았다.

환각에서 기껏 벗어나 놓고 그 환각을 그리워하질 않나, 진짜 예결이 바로 건너 건물에 있음에도 차마 찾아가지 못하고 홀로 방을 서성인다.

거절당할 것이 두렵다.

‘고작 남궁세가의 젊은 소가주 때문에 이런 우스운 꼬락서니라니.’

예결은 꿈에서조차 모를 테지만, 하량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항주에서 있었던 일은 예결을 심장 더 가까운 곳으로, 어쩌면 그 안으로 집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하량은 자신이 사제에게 사특한 욕망을 품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결이 제 사형을 비난하는 흑귀에게 화를 냈을 때까지만 해도 하량은 퍽 즐거워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흔들면 사제가 자신이 쳐놓은 거미줄 위에 기꺼이 몸을 던지게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궁운이 등장한 순간, 하량은 그를 경계했다.

현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라지만 무림의 역사 동안 그런 이들은 저 황하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강물에 휩쓸려가지 않고 바위가 된 이는 오히려 손에 꼽힐 정도였다.

기실, 그가 보기에 남궁운은 사내라기엔 아직 풋내가 나는 구석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하량은 무심코 남궁운에게 멈추는 시선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젊은 시절의 하량을 연상시켰기에.

정의롭고, 사람의 선량함을 믿으며, 반드시 더 좋은 내일이 오고야 말 것을 의심하지 않는.

의협심이 가득한 데다가 젊고 헌앙한 후기지수.

그건 하량이 가졌던 모든 것이고, 하량이 잃은 모든 것이다.

‘사제는 저런 이에게 약하지.’

흑귀에게 말했듯, 예결은 다른 사내와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의식적인 영역은 물론, 무의식적인 영역에서도.

하지만 남궁운을 향해서는 조금 더 방비가 풀린 낯을 했다. 무심코 친근함을 느끼는 기색을 비치고, 잡혀주지는 않아도 먼저 성큼 다가설 때도 더러 있었다.

하량은 조바심을 느꼈다.

운이 좋아 예결의 빗장이 활짝 열린 것을 먼저 알아채긴 했다만, 사제가 언제까지 본인의 감정에 무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궁운과 예결이 어울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리고 피가 머리로 몰리던 시절에조차 겪어본 적 없는 열패감을 느끼게 된다.

예결도 지금의 그가 얼마나 추악한 사내인지 안다면 차라리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마음이 기울지 않을까.

목숨 바쳐 살린 대사형이 지난 이십 년의 반은 그를 증오하고 원망했으며, 남은 반 동안은 살의를 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말이다.

애써 불안을 죽이며, 하량은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이었다.

지시서를 전달하기 위해 진영이 자리에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진영의 자리로 가는 예결이 보였다.

“결아? 네 어찌 벌써 돌아왔느냐?”

한참이나 침묵하던 예결이 두 손을 모은 채 동요했다. 그 자세에서 하량은 위화감을 느끼고 붓을 내려놓았다.

“……진영이군.”

“송구합니다.”

“되었다.”

한동안 그를 떠나있던 심마의 귀환이었다.

주화입마는 무림과 역사를 같이한 광증임에도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으니 정신이 불안정해질 때 심마가 돌아오는 것이 마냥 이상하진 않았다.

지금은 금세 환각이라는 걸 알아챘으나 갈수록 그 경계가 희미해질 것이다. 판단력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어찌 광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진영. 연죽을 가져와라. 그리고 청해상단에 보내야 할 것이 있다.”

결국 하량은 좀 더 느릿하게 움직이려 했던 계획을 앞당겼다.

흑귀를 판에 끌어들이고 사제를 궁지로 몰았다.

이 하늘 아래 예결이 매달릴 대상이라곤 저 하나뿐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처음엔 남궁운조차 잊고 온 신경이 흑귀 일에 기울어진 듯하던 예결은 그를 만나기 위해 몇 번이고 서녕성으로 향했다. 남궁운이 아니라 흑귀에게 닿을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틔운 숨통이었음에도 그랬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하량은 불쾌감도 느꼈으나 그보다 더 큰 기쁨 역시 느꼈다.

살아 있는 예결만이 자신에게 안겨줄 수 있는 감각이었기에.

문제는 살아 있는 사제가 하량에게 선사하는 감정이 훨씬 다양하다는 거였다.

사제와 함께 장원으로 귀환하기 위해 청해상단으로 향한 하량은 삼랑으로부터 예결이 습격당했다는 기별을 받고 의원으로 달려갔다.

두려웠다.

살아 돌아온 예결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아수라혈강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따위를 믿고 안심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의원을 만나러 갔다기에 행여라도 사제가 큰 부상을 입었을까 걱정했던 하량은 문밖에 우뚝 멈추어 섰다.

“다행입니다. 검을 쓰는 무인이 팔이 상해서 큰일이 났다고만 생각해서…….”

사제의 음성에서 걱정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긴 세월의 기다림 없이, 긴 세월의 뒤틀림 없이 예결의 염려를 받는 젊은 협객.

언젠가 먼 과거에 그렸던 모습이 그린 듯 하량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량은 사제가 당황하는 걸 알면서도 거의 우격다짐으로 남궁운과 예결을 떼어놓았다. 장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예결이 제 눈치를 살폈다.

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장원에 돌아온 하량은 삼랑을 기다렸다. 검푸른 밤이 새벽을 만나기 전, 삼랑이 하량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랑은 서녕성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남궁세가에서 풀어놓은 개가 행여라도 냄새를 맡거나 증거를 찾지 못하게끔 암살 현장을 정리한 건 그녀의 작품이었다.

늦은 밤임에도 곧바로 주군을 찾아온 삼랑의 낯은 진지했다.

“배후는?”

하량의 질문에 삼랑이 답했다.

“이미 멸문한 두 가문의 잔당이 저지른 짓처럼 포장되었으나 마도육가 중 한 곳이 손을 쓴 게 분명합니다.”

“두 군데 이상이다.”

서늘한 음성으로 답한 하량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도팔가 중 두 곳을 썰어내고 마도육가로 만든 천마를 상대로 단일세력이 움직였을 리가.

‘저쪽에 사제의 존재가 노출되었다.’

사제가 곤륜에서 돌아온 후로 일부러 요란하게 굴긴 했다.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모를 일반인으로 보일 예결에게 청해상단의 주인 자리를 던져주고, 일부러 십만대산에 돌아가지 않고 외부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예결을 곁에 둔 이상 그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게 들통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량은 그 시점을 뒤로 미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꼭꼭 숨기기보다는 미끼처럼 포장해서 도저히 물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벌써 움직인 걸 보면 어지간히 조바심이 난 모양이다.

“마도팔가를 마도육가로 줄여놓은 것만으로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면, 남은 것들도 마저 찢어놓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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