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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38화 (138/203)

138화. 도둑 키스 (15)

사제에게 조금 더 말미를 주고 싶었는데, 시일이 앞당겨질 모양이었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하량은 마지막 유예를 조금만 더 늘리기로 했다.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진영은 이미 하량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밤을 지새웠음에도 하량의 낯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미리 확인한 보고서를 진영에게 넘긴 하량이 물었다.

“결이는?”

“……그게.”

진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삼랑이 이른 아침에 적뢰를 데려갔습니다. 남궁 공자를 만나러 서녕성에 간다고 하더군요.”

“하, 서녕이라…….”

바로 어제 암살 시도가 있었던 곳이다. 아침 해가 밝기가 무섭게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갔다니.

‘결이는 그 살수들이 남궁운을 죽이러 온 거라 생각할 테니 걱정이 될 수밖에.’

머리로는 안다. 그저 염려에 몸달아 한걸음에 달려간 것임을.

하지만 하량은 오래된 불안이 저를 잠식하는 걸 느꼈다.

손을 뻗은 하량은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아직까진 그저 꺼내놓기만 했던 연죽에 불이 붙었다.

하량은 진영에게 지시했다.

“건물을 비워라.”

제 주군이 연죽을 쥔 순간부터 이미 다음 명령을 직감하고 있던 진영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하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다고 해서 다시 시야에 스며들기 시작한 환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심마가 다시 하량을 집어삼키기 위해 거칠게 맥동하며 입을 벌렸다.

예결이 살아 있다는 사실, 흑귀를 외면하면서도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어울리는 상황, 그에게 반기를 든 마도육가에서 사제를 암살하려 든 사건…….

그리고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남궁운의 무사를 확인하러 서녕성으로 간 예결.

‘만약 그 사내가 너를 향한 암살 시도 때문에 다쳤다는 걸 알게 된다면.’

하량은 연죽 끝에서 피어오르는 어른어른한 연기를 주시했다.

‘그땐 네가 어떻게 나올까.’

굳이 직접 알아낼 생각은 없었다.

하량은 예결이 흑귀, 그러니까 저 이외의 다른 사내에게 빚을 지는 걸 허락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

연죽에서 피어오른 향이 곤두선 그의 신경을 적셔갔다. 머릿속이 무뎌지는 걸 느끼며 하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따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 운무와도 같은 연기가 흩어졌다.

침상 곁의 탁자에는 연죽을 꺼내오라 명한 날부터 준비되었던 거치대가 있었다. 초에 불을 붙이고 연죽을 거치대에 올린 하량은 침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량은 약 기운을 빌어 잠을 청했다.

아직은 고삐를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런데 왜.’

자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되짚던 하량은 깨어난 순간부터 스미던 위화감을 곱씹었다.

‘왜 이다지도 개운하단 말인가?’

연죽을 사용하면 감각이 무뎌져 잠을 청하기 쉬워지지만, 깨어났을 때 두통을 선사한다.

삼랑은 그런 부작용이 없게끔 배합했다고 했으나 그녀로서도 심마를 짊어지고 사는 무인을 환자로 받아본 적은 없을 테니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마 중독 증세나 의존하는 경향이 생기지 않고 고작 두통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 아닌가.

삼랑보다 더 의술에 조예가 깊은 의원을 찾아간다면 뭔가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하량은 그치들을 믿지 않았다. 이성과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까닭에 하량은 죽 그 향을 태워 왔다. 몇 번인가의 보완을 거치긴 했다면 두통은 고질병처럼 따라붙었다.

‘그래서…… 사제를 다시 만난 후 연죽 없이도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치워 버렸는데.’

침상에 털썩 주저앉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던 하량의 눈에 마루의 움푹 팬 자국이 들어왔다.

침실 바닥은 일부러 무른 나무로 해 놓는다. 누군가가 드나들거나 가구를 옮겼을 때 빠르게 알아채기 위함이었다.

‘이 정도의 자국이면, 뭔가를 떨어뜨렸다.’

옷자락이 바닥에 닿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숙여 그 자국 위를 더듬던 하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깨어난 순간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건물을 나선 하량은 삼랑을 찾아갔다. 평소였으면 가볍게 피했을 기관이 작동하며 그를 향해 암기를 쏘아냈지만 하량은 이를 맨손으로 낚아챘다.

“주군, 어찌 기별도 없이-”

개인 시간을 방해한 것에 대한 항의라기보다는 황망함이었다. 취미 삼아 만든 기관이 주군을 공격했으니 오죽할까.

하량은 질책이나 괜찮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암기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며 물었다.

“결이가. 사제가 금일 서녕성에서 무얼 했지?”

진영은 하량을 잘 안다. 연죽을 손에 들어 올린 순간, 그는 주변을 깨끗하게 비웠을 거다.

사제를 숨겨놓은 장원에 들인 이들은 전부 심복이라고 할 만한 수준의 존재뿐이다. 그런 자들이 주인의 지엄한 명령을 거스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누가 겁도 없이 천마의 침실에 발을 들이겠는가?

이 장원에서 유일하게 하량의 정체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뿐인 대사형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는 예결뿐이다.

“어제 깜빡 잊고 남궁 공자의 수중에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가셨습니다.”

별안간 모습을 드러낸 주군의 추궁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법도 할 텐데 삼랑은 침착하게 답했다.

“어떤 물건?”

“옥으로 만든 문진입니다. 어제 구매한 건데, 당장 내일 필요하시다고 하여 급하게 서녕성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삼랑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숨겨서 반쪽짜리 의리를 지켰다.

예결이 하량을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청해상단을 통하지 않고 직접 물건을 구하러 다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가져와라.”

“존명.”

잠시 자리를 비운 삼랑은 작은 보퉁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받아든 하량은 살짝 들어 무게를 확인해보고는 매듭을 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구름이 세공된 문진이었다. 잘 살피면 한쪽 귀퉁이에 금이 가 있었다.

“…….”

이게, 바닥에 움푹 팬 자국을 만들어낸 원인이라고 생각하면 비약일까?

“세상에…….”

삼랑이 탄식이 하량의 고민 너머로 들렸다.

“암살 소동에 휘말렸을 때도 떨어뜨리지 않으셨는데, 어쩌다 이런.”

예결이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며 선물을 찾아다녔는지 아는 그녀는 아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하나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서녕성에 다녀오지 않았던가.

얼마나 상심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사제는 어디에 있지?”

하량이 물었다. 놀라울 정도로 무표정한 낯을 살핀 삼랑이 답했다.

“그, 지금 탕옥에 계신다고 합니다.”

덕분에 예결의 시선을 피해 선물을 빼돌리는 게 수월했다.

“안내해라.”

삼랑은 동요를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예결이 머무르는 별채에는 탕옥이 따로 딸려 있었다. 마침 탕옥 밖에서 예결의 옷과 영견을 가지런히 정리하던 하인이 몸을 깊이 숙였다.

“주인님.”

“사제가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반 시진 정도 지났습니다.”

삼랑에게 고개를 돌린 하량이 지시했다.

“여기에서 대기하도록.”

문을 열자 안에서 더운 김이 새어 나왔다. 하량은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수증기 사이로 어슴푸레 비치는 인영이 보였다.

서늘한 공기가 닿자 문이 열린 걸 알아챈 예결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누구?”

흩어지는 하얀 연기 가운데, 예결이 보였다.

젖어서 목덜미에 달라붙은 갈색 머리카락, 상기된 뺨 위로 놀라서 동그래진 두 눈. 물속에 잠긴 채 어른어른 비치는 나신.

그리고 사슴처럼 우아하고 긴 목.

“대, 대사형?”

상대가 하량임을 알아보고 당황했는지 나무로 된 탕조를 쥔 예결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게 변했다.

그러나 하량은 평소처럼 양해를 구하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주워섬길 여유조차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선 하량은 예결의 턱을 쥐고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몇 번이나 봤던 희고 깨끗한 살갗에는 생채기 하나, 흉터 하나 없다.

‘그런데 왜…….’

왜 이다지도 조바심이 난단 말인가?

“무슨 일 있어요?”

거칠고, 그악스럽기까지 한 손길에 반항 없이 몸을 맡기던 예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네가. 나를.”

하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 우형을 찾아왔었니?”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하량은 예결의 몸에 남긴 자국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

예결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사형을요? 언제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과 목소리.

만약 그 마룻바닥이 무른 재질이 아니었다면, 삼랑이 가져온 문진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으리라.

“아니다.”

예결이 숨기고자 한다면 쉽게 캐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하량은 입을 다물었다.

그럴듯한 변명을 짜낼 겨를조차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무서웠다.

어떻게든 사제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게끔 유예를 늘리려 했는데, 이미 그가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럴 리가.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리자 예결이 이쪽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깨어나자마자 네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더구나.”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낮아진 음성과 깊어진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양 예결은 잠시 멈췄다.

“하하. 그게 뭐예요.”

소년처럼 풋풋하고 경쾌한 웃음이 탕옥 내를 울렸다.

“확인하니 어때요? 저 완전 멀쩡하죠?”

탕조에 올린 손등에 턱을 괸 예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걱정으로 무거워졌을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고 일부러 잔망을 떠는 태가 났다.

“그래. 그러게 말이다.”

하량은 피식 웃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이 우형이 너무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야.”

젖은 예결의 뺨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 하량이 속삭였다.

“네가 이처럼 무사한 걸 보니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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