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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41화 (141/203)

141화. 가장 오래된 (3)

“준비 끝.”

예결은 퀭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적당한 가이딩만 있으면 훨훨 날아다니는 예결의 낯에 이토록 노골적인 피로가 감도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워 뒤척였다.

하량을 어떤 얼굴로 다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하루 사이 목이 졸리고, 대사형이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기에서 그쳤더라면 또 모를까, 상처가 낫는 동안 숨어 있던 예결을 찾아 탕옥까지 온 하량은 그간 그어놓았던 선을 넘기까지 했다.

‘절대로 손장난 같은 걸로 치부할 수 없지…….’

짧은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간 예결은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았다.

본디 대사형이 흑귀에게로 예결을 유도하려 했던 걸 보면 탕옥에서 있었던 일은 하량의 계획이 아니었으리라.

그의 충동에 불을 붙인 것까진 좋았으나, 자신이 속절없이 흔들릴 거란 계산까지 포함하지 않았던 예결은 베개에 머리를 박으며 열이 오른 몸을 애써 식혔다.

그러다가 새파란 새벽이 이불보에 스미는 것을 본 예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사형 생일 준비를 하자.’

시름 아닌 시름을 털어내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운 예결은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깜짝 파티를 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별채에서 가장 큰 방을 골라냈다. 사람이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내부는 다소 삭막했다.

예결은 가구도 옮기고 도자기도 가져다 놨다. 정원에서 꽃도 몇 송이 꺾어다가 꽃장식도 해 봤다.

그뿐이랴, 여전히 허전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던 예결은 새로운 장식을 하나 고안해냈다.

풍선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중원에서 풍선 비슷한 걸 만들어 보겠다고 동그란 솜을 비단으로 싸서 매단 것이다.

그 아래에 끈으로 리본을 묶어 매달고 여기저기 못질로 붙여놓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역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 거지.”

예결은 자화자찬했다.

대사형 모르게 이 모든 걸 해치우느라 하인의 도움도 최소한으로 받아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삼랑의 초과근무로 이어졌고 그녀는 주말에 뱀뱀이를 데려가겠다며 으르렁거렸다.

‘이러다가 뱀뱀이가 암기 날리는 법도 배우는 게 아닐까.’

진심 반, 과장 반 섞인 생각을 해치우며 예결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벽지까지 새로 바르기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게 아쉽다.

어차피 부려 먹을 거, 바닥까지 긁어서 써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삼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때마침 리본을 만들고 남은 천 더미가 움찔움찔하더니 뱀뱀이의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이제 정말 끝이야.”

예결은 자신을 바라보는 동그란 눈에 해명하듯 답했다.

뱀뱀이는 지켜보겠다는 양 작은 혀를 날름거렸다. 예결이 손을 내밀자 금빛 뱀이 냉큼 몸을 감아왔다.

처음엔 이 살짝 서늘한 감촉이 어색했는데, 이젠 없으면 오히려 허전해질 것 같았다.

‘중원에 돌아오기 전까지 이런 건 꿈도 못 꿨는데.’

자신이 이토록 설레하며 다른 누군가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애착을 가진 반려동물이 생기는 것도 전부 생소하기만 하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들 속에서 예결은 평범한 행복을 느꼈다.

“그래도 삼랑이 잘해 주지?”

뱀뱀이는 동그란 눈으로 예결을 마주 바라봤다. 딱히 싫다는 기색이 느껴지진 않았다.

“괴롭히면 말해. 내가 삼랑이랑 면담 좀 해볼 테니까.”

“주군께서 곧 도착하실 겁니다.”

혹시 몰라 신신당부하는데 쓱 나타난 삼랑이 보고했다.

그녀의 뒷담을 하다가 딱 걸린 상황임에도 예결은 태연했다. 어차피 그녀가 접근 중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좋아. 대사형 오시면 요리도 바로 내오라고 전해.”

예결은 하량의 자리 앞에 대망의 생일 선물을 내려놨다.

이걸 사겠다고, 또다시 찾아오겠다고 돌아다니다가 암살 사건에까지 휘말렸다. 그뿐이랴. 자정이 땡 하면 대사형에게 주고 싶어서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가 목까지 졸리지 않았던가.

‘액땜은 제대로 한 셈인가…….’

조금 자조적인 농담을 떠올리며 예결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하량의 도착을 기다렸다.

삼랑이 간발의 차이로 앞서 온 건지 하량은 금세 별채에 당도했다.

“대사형. 오셨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예결을 발견한 하량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로부터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예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침엔 아직 날이 찬데 들어가 있지 않고.”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예결은 씩씩하게 답했다.

하량의 시선이 속없이 웃는 사제의 낯 위로 미끄러졌다. 얼굴만 보면 정말 평소의 예결 그 자체였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대사형의 채근에 예결은 건물 안에 들어서기 전, 하량에게 물었다.

“제가 대사형 눈을 가려드리고 안내해도 돼요?”

“무얼 준비했길래.”

웃음 섞인 다정한 음성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온화하고 상냥한 대사형을 보며 예결은 짓궂게 웃었다.

“그거야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되죠.”

허락받았다고 판단한 예결은 슬쩍 하량의 뒤로 돌아갔다. 무인은 뒤가 잡히는 것에 예민한데도 불구하고 하량의 등은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이 태연했다.

대사형의 눈을 가리려고 손을 뻗은 예결은 잠시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었다.

‘젠장 키 차이.’

그냥 손을 뻗으면 눈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예결 대신 문을 열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삼랑은 이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삼랑이 웃거나 말거나 미리 준비한 비단 끈으로 하량의 눈을 가린 예결은 그의 손에 자신의 팔을 쥐여주었다.

“준비됐어요?”

흐느끼듯 떨리고 있는 삼랑의 어깨를 침통한 시선으로 노려본 예결은 하량에게 고개를 돌리고 속삭였다.

“그럼.”

눈이 가려진 사내가 유순하게 답했다. 예결은 하량의 얼굴을 가만히 시야에 담았다. 무얼 하든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지난 하루 동안 느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 희석된다.

이게 비틀린 사고라는 걸 예결도 잘 알았다.

‘이래서 흑귀가 매번 내 눈을 가리나.’

“제가 앞서 걸을 테니까 따라오시면 돼요.”

눈이 가려진 사람치고 하량은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내심 그가 자신에게 의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예결은 쓸데없이 좋은 무림인의 균형감각을 탓했다.

반듯한 걸음걸이로 파티 준비를 마친 방 앞에 당도한 예결이 멈춰서자 하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여긴…… 원래 침실로 사용되다가 볕이 잘 안 들어서 치워놓은 방 아니더냐?”

“어? 눈 가리고 있는데 그런 거 파악하면 반칙이에요.”

“반칙?”

하량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내가 규칙을 잘 몰라서 그랬다. 용서해주렴.”

슬쩍 말꼬리를 늘여 빼는 목소리가 애살스럽게까지 들렸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은 채 가슴을 진정시키고 답했다.

“이번만이에요.”

단호한 음성으로 답하긴 했으나 자연스럽게 섞이는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하량이 붙든 팔에서 자그마한 진동이 전해졌다. 사제의 새침한 대꾸에 그가 웃고 있었다.

예결은 삼랑에게 턱짓했다. 여전히 웃음을 참는 중인지 필사적으로 이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던 삼랑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짜잔.”

손을 뻗은 예결은 하량의 눈을 가린 천을 풀어냈다. 다시 시야를 확보한 그는 이질적인 풍경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네가 어쩐 일로 나를 여기까지 청하나 했더니.”

하량은 주변을 휙 둘러보곤 말했다.

“재미있게 꾸며 놓았구나.”

“마음에 드세요?”

“직접 한 거니?”

다정한 물음에 예결은 솔직히 답했다.

“일어나자마자 준비했어요.”

“일어나자마자? 이런. 어쩐지 피곤해 보이더라니.”

하량이 평소처럼 예결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멈칫한 예결은 하량이 손을 물리는 걸 발견하고 혀를 깨물었다.

‘괜히 의식돼서 미치겠네.’

꽤나 태연하게 하량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는데, 예결의 몸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하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손을 거뒀다.

“어서 앉으세요. 곧 음식도 들어올 거에요.”

어색한 공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예결의 말이 신호가 되기라도 한 양 하인들이 음식이 가득 든 접시를 가지고 줄지어 안으로 들어온 덕이었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정갈한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식탁 위를 메운 접시를 보며 하량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혹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예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가 좋아하는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동파육도 없고…….”

하량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함께 식사할 때 대사형이 즐겨 먹던 걸 유심히 지켜봤다가 주방에 주문을 넣은 거였는데, 혹 잘못 알았나 하고 놀랐다.

“그야 대사형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골라서 차렸으니까요.”

“아.”

비로소 상 위에 차려진 요리의 정체를 알게 된 하량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제 문이 닫힐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마지막 하인이 술잔과 술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하인은 이를 예결과 하량의 사이에 내려놓은 뒤 정중히 물러났다.

삼랑이 문을 닫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단둘이 되었다.

흘깃 시선을 주니 도자기로 된 술주전자에서 살짝 김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데운 술에서부터 전해지는 달큰한 향기에 예결은 무심코 입맛을 다셨다.

이건 예결이 준비한 게 아니었다.

“향이 무척 좋아요.”

“좋은 술이 들어와서 네게 맛을 보여주려고 가져왔단다.”

아니나 다를까, 하량이 그가 준비한 것임을 밝혔다.

“그럼 이제 어쩐 일로 내 사제가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들어볼까?”

하량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보통 때의 대사형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오만함이 얼핏 비치는 듯했다.

예결은 흘러내린 제 머리카락을 무심코 귀 뒤로 넘기려다가 손을 단속했다.

오늘을 퍽 기다렸는데 정작 닥치고 나니 왜 이리 긴장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오늘이 대사형이 태어나신 날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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