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가장 오래된 (4)
예결의 말에 하량의 두 눈이 커졌다.
그답지 않게 크게 동요한 눈치였다.
“그래서. 단둘이 식사도 하고 선물도 드리고 싶어서, 그래서 대사형을 청했어요.”
“어제가…… 청명이었던가.”
목구멍에 턱 걸리는 듯 끊어지는 목소리에는 아연함이 담겨 있었다.
예결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잊고 계셨어요?”
사실 예결은 깜짝 파티가 성공할지 반신반의했다. 하량의 눈치가 워낙 빠른 편인데다가 이 장원은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본인의 생일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을 줄이야.
정말로 깜짝 파티가 되어버렸다.
“그래.”
하량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누군가가 챙겨준 것이 실로 오랜만이라 내 잊고 있었구나.”
예결은 탄식을 삼켰다.
“이제부터 제가 챙겨 드릴게요.”
그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하량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제가……. 요새 서녕성을 돌아다니면서 대사형의 선물을 준비했어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하량은 그답지 않게 멍한 얼굴로 손을 뻗어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이윽고 예결의 선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보자기로 감싸인 문진을 내려다보는 하량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예결은 그에게 답을 채근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하량의 손끝이 문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옥으로 된 물건이기는 해도 저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만지지 않아도 될 텐데.’
예결은 하량의 입술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예쁘구나. 고맙다.”
한참이나 침묵한 후에야 흘러나온 하량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다행이에요.”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옥에 구름 같은 문양이 있어서 보자마자 꼭 대사형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흥미롭다는 듯 답한 하량은 보자기째로 문진을 끌어가 들여다봤다. 예결이 말한 구름 문양을 찾는 눈치였다.
“정말 그렇구나. 여기 구름 문양이 있어.”
하량의 나직한 감탄에 예결은 배시시 웃었다.
“잘 쓰마.”
보자기 채로 문진을 끌어당긴 하량은 행여 선물이 상할세라 조심조심 매듭을 묶어서 옆으로 밀어놓았다.
자꾸 그 위를 조심조심 어루만지는 모습에 예결은 비로소 안도했다.
‘마음에 드시나 보다.’
생각보다 정적인 반응이라서 긴장하고 있었다.
하량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서인지 술주전자를 들어 올려 손수 잔을 채우는 게 보였다.
잔이 반쯤 차오를 무렵, 손을 멈춘 하량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잠깐.”
뭐라 딱 잘라 표현할 순 없지만, 마냥 기뻐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나 싶어 예결은 조금 긴장했다.
“이 준비를 하겠다고 아침부터 뛰어다녔다고?”
“네에.”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 상한 거니?”
“아뇨!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예결은 얼굴을 확 붉혔다. 그의 동요가 무엇 때문인지 빤히 아는 사내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한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봤다.
“그저, 잠을 조금 설쳤을 뿐입니다.”
“저런, 어쩌다가?”
“아무래도 요새 열심히 돌아다녔으니까요.”
“서녕성에 매일같이 가던 것도 그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던 거니?”
하량의 낯에 우려가 서렸다.
“아뇨. 일하러 갔죠. 일.”
예결은 손사래를 치며 누가 듣기에도 변명 그 자체인 말을 내뱉었다.
“남궁 공자가 그 말을 들으면 섭섭하겠구나.”
하량은 예결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내색을 하지 않아도 남궁운과 예결의 교류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암살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대사형의 무얼 좋아할지 알 수 없어서 남궁 공자의 안목을 조금 빌리긴 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무인도 아니고, 좋은 물건을 볼 줄도 모르니까요.”
자신감이 꺾인 시무룩한 음성에 하량이 다정하게 답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결이 너뿐이지 않니.”
하량은 문진을 감싼 비단보 위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아니면 혹, 이걸 그 사내가 골라주었니?”
“……아뇨. 남궁 공자는 그저 가게를 소개해 주기만 했어요.”
“기쁘구나.”
대사형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이 네가 직접 골라준 선물이라 더.”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진심이 녹아 있는 음성이었다.
예결은 하량을 빤히 바라봤다.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지 모르겠다.
열 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워주고 싶다. 차고 가득, 타지도 않을 신형 차를 채워주고 싶었다.
게이트가 잘 관리되는 나라의 휴양지마다 별장을 사들여 안겨주고 싶고 기사가 딸린 전용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지금의 예결이 하량에게 건넬 수 있는 건 고작 옥 문진뿐인데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예결은 하량의 앞에서 자꾸만 초라해진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내라서.
‘옹졸하기 짝이 없어.’
무심코 상대가 나보다 부족하길 원한다. 그럼 하량이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느라 힘들었어요.”
예결은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래?”
“무인에게 어울릴만한 물건을 찾아봐도 괜찮은 검은 오래전에 주문을 넣어야 하고, 또 장신구 같은 건 거추장스러울 거 같았고……. 괜찮은 물건을 봐도 대사형이 쓰는 걸 상상하면 어쩐지 조잡하게만 느껴졌거든요.”
줄줄이 흘러나오는 사연에 하량의 입술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렸다.
“암살자들한테 둘러싸였을 때는 이거 깨지면 어쩌나 하고 벌벌 떨면서 끌어안은 채로 버텼는데, 그걸 의원에 두고 왔지 뭐예요? 남궁 공자가 맡아주지 않았으면 잃어버릴 뻔했어요.”
“남궁 공자에게 신세를 졌구나.”
하량은 조용히 추임새를 넣었다.
“다음에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어.”
예결은 하량의 낯을 살폈다.
누그러진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손톱 밑의 거스러미가 사라진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술은 안 되겠구나.”
혀를 찬 하량이 자연스럽게 잔을 거뒀다.
“하지만…….”
예결은 술잔을 힐끔거렸다.
대사형이 준비해서 따라 주기까지 한 술을 이렇게 압수당한다니 아쉬웠다.
“안 돼.”
하량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의 음성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사건을 벌이곤 했던 사제에게 음주를 허락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예결은 배실배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술만 단속하지 말고 먹는 것, 입는 것, 만나는 사람 전부 단속해줬으면 좋겠다는, 다소 미친 생각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우형의 생일 선물을 사겠다고 남궁 공자와 어울려 다니며 고생이 많았구나.”
하량이 예결의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주었다.
“하지만 좋았어요.”
단정하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있음에도 예결은 환하게 웃었다.
“대사형이 마음에 든다고 해주셔서, 피로가 싹 씻겨 나가는 것 같아요.”
“음…….”
짐짓 뜸을 들인 하량이 씩 웃더니 장난스레 대꾸했다.
“그렇게 말해도 술은 안 된다.”
“쳇.”
“내 사제가 술꾼이었다니.”
여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얼굴에 가벼운 짓궂음이 스쳤다.
“그렇게…… 자주 마시는 건 아니고요…….”
예결은 누명을 썼음에도 그리 불쾌하지 않아 멋쩍게 머리만 정리했다.
“이건 대사형이 제게 주려고 가져오신 거라 아쉬워서요.”
“다음에.”
하량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약속 지키셔야 해요.”
예결은 콧노래를 부르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대낮의 태양이 들여다보는 가운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자니 지난 밤 탕옥에서 있었던 일이 전부 꿈결 같기만 했다.
하량은 예결에게서 술을 압수하는 대신 본인도 마시지 않았다.
“결이 네 생일은 언제지?”
찻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불쑥 물었다.
“저요? 전…….”
사실 예결은 전생의 생일을 몰랐다. 다만 이번 생에는 칠월에 태어났다.
“아마, 여름일 거예요.”
아마, 라는 단어에 하량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 입하부터 입춘까지 매일매일을 기념해야겠구나.”
“제발…… 참아주세요.”
다정하지만 브레이크가 없는 남자를 바라보며 예결이 심란한 얼굴을 했다.
“결이 네가 이 우형의 생일 때문에 이다지도 고생했는데 정작 나는 두 손 놓은 채 지켜보기만 하란 말이니?”
하량이 짐짓 시무룩한 얼굴로 호소했다.
“음.”
망설이던 예결이 입을 열었다.
“칠월…… 아마 칠월 열하루째 되는 날 정도일 거예요. 소서(小暑)가 조금 지난 뒤.”
동그랗게 뜬 눈을 곱게 접어 웃은 하량이 답했다.
“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겠구나.”
소서라, 소서. 하고 중얼중얼하는 음성에 들뜬 기색이 섞였다.
그리 큰 비밀은 아니라지만 전생의 자신이 몰랐던 생일을 알려주는 걸 망설였던 예결은 새삼 자신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생일 정도야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지 않나.
“너무 큰 건 안 받을 거예요.”
“작은 걸로 하마.”
하량이 손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교묘한 말장난에 예결이 부루퉁한 시선을 건네자 하량이 의뭉스러운 낯으로 웃었다.
“벌써 밤이네요.”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내가 몸도 안 좋은 너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아니에요. 술 한 잔도 안 마셨는데 이렇게 즐거웠는걸요.”
자리에서 일어난 예결이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려는데 하량의 그림자가 불쑥 다가와 그를 삼켰다. 얼굴 옆으로 뻗은 하량의 손이 문고리를 잡더니 예결을 대신해 열어주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문이 천 근 정도 되는 무게도 아닌데 이런 배려를 받을 때면 기분이 간지러웠다.
“제가 열 수 있는데.”
“이 정도는 내가 하게 해 주렴.”
웃으며 속삭인 하량이 아, 하더니 손을 뻗었다. 예결은 의아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여기.”
하량이 예결의 목덜미를 툭, 건드렸다.
바투 다가온 사내의 호흡이 목에 내려앉는 감각에 예결은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는데, 내가 널 놀라게 했니?”
하량의 손에는 색소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들려 있었다.
“놀란 건 아니고, 그냥 좀 간지러웠어요.”
예결은 쑥스럽다는 듯 답했다.
“그래……. 목이 무척 예민하구나.”
하량의 손길이 그 위를 쓸어내렸다. 목덜미의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예결을 사로잡았다.
성적인 뉘앙스 없이, 저를 탐색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예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들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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