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가장 오래된 (5)
그럴 리가.
하지만 가슴이 조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목은 급소니까 누구나 움츠러들지 않을까요?”
슬쩍 떠보는 걸 보면 증거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예결은 끝까지 잡아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따지면 네가 너무 무방비한 걸지도.”
하량이 속삭였다.
“제가요?”
“내가 이렇게…….”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린 하량이 예결의 목을 감쌌다. 익숙한 듯 선득하게 느껴지는 감촉에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결이 너를 붙잡아도 가만히 있지 않니.”
“그야.”
예결은 태연자약한 낯으로 답했다.
“대사형이 저를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요.”
무구한 신뢰가 가득한 시선에 하량이 웃었다.
“물론.”
그의 두 손이 뱀처럼 스륵 흘러내렸다.
“간지럽다고 하면서도 그리 격하게 반응하지 않기에 호기심을 느껴서 그만. 불쾌하진 않았니?”
“별로요. 근데 대사형 손 따뜻해요.”
예결은 과감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로 끌어왔다.
팔을 붙들린 사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몸을 굽히는 모습을 보며 예결은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속으로 사납게 웃었다.
‘위험은 무슨.’
위험은 하량이 아니라 예결 같은 존재를 말하는 거다.
뱃속에 시커먼 욕망을 품고 상대의 혼란과 집착을 유도하며 흔들면서도 죄책감일랑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런 아귀 같은 이를.
속 시원히 원망하지도 못하고 증오하지도 못하며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자신이 사제를 다치게 했을까 애면글면하는 하량 같은 인간이 위험은 무슨.
“저는 손이 찬데…….”
볕에 노곤하게 녹아내린 고양이처럼 예결이 엉겨 붙자 하량의 손길에 다정함이 실렸다.
어쩌면 그는 이게 수작질이라는 걸 알아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쓰지 않는 곳이라 난방을 덜한 모양인데, 방에 화로를 가져다 놓으라고 할까?”
“아뇨. 괜찮아요. 그냥 대사형이 따뜻한 게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
무자비하게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손임에도, 이를 바라보는 예결의 시선은 애틋하기만 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걸음은 예결의 침실 앞으로 닿았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하량은 그대로 일별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예결은 하량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채 걸음을 떼기도 전에, 저를 잡은 예결을 느낀 하량이 몸을 돌렸다.
그의 낯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그냥 보내드릴까.’
잠시 망설이던 예결은 불쑥 입을 열었다.
“……태어나 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가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내뱉고는, 저도 모르게 하량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처음 선물을 받은 순간만큼이나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사실, 예결은 이 말을 하기까지 퍽 오래 망설였다.
그제까지였다면 또 모를까, 예결은 하량의 악몽에서 그가 죽고자 했음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목숨 바쳐 그를 살려낸 은인조차 원망할 정도로 망가진 사내에게 태어나 주어 감사하다는 말 같은 건 폭력이 아닐까.
‘하지만.’
예결은 숨죽여 하량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없었겠지.’
하량이 자신을 통해 무얼 보고 있는지 모른다.
애정이나 감사뿐이 아니라 원망과 회한 또한 깃들어 있었고 이를 철저히 숨겨왔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결은 그 언젠가 하량이 살려낸 생명이었다.
“그래.”
하량의 두 팔이 예결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잠시 놓는가 싶더니, 다시 또 그를 버겁게 안아왔다.
“……그래.”
바투 달라붙은 사내의 어깨에 얼굴이 파묻힌 채, 예결은 하량이 포옹으로 숨긴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예결을 다시 놓아준 사내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낯을 하고 있어서, 도무지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잘 자렴.”
스치듯 귓가를 어루만진 손길이 물러났다. 예결은 손을 흔들었다.
“대사형도 좋은 꿈 꾸세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사내의 입가를 스쳤다.
***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낮, 진영이 바쁜 걸음으로 중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동작 그만.”
예결이 진영이 가야 할 길 앞에 매복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뱀뱀이까지 꺼내서 어깨에 앉혀놓은 예결의 눈에는 한결 시퍼런 독기가 맴돌고 있었다.
‘쯧.’
진영은 보일 듯 말 듯 혀를 찼다.
예결이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평소 소 닭 보듯 하던 예결이 그에게 슬쩍 말을 걸러 다가오곤 했기 때문이다.
진영은 이를 알아챘음에도 예결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원래 다니던 길을 빙 돌아서 간다거나, 일부러 좀 더 일찍 움직이기도 하고 아주 늦게 건물을 나서기도 했다.
진영이 특히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 있다면 독 오른 족제비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은 피해 다니는 거였다.
그러나 진영은 머잖아 예결에게 붙들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예결에게는 지름길, 샛길, 남들 안 다니는 길에 통달한 데다가 도망치는 이의 심리를 손바닥 보듯 읽어내는 배신자가 한 명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용케도 저를 찾아내셨군요.”
이게 말뿐인 항복 선언이라는 걸 느꼈는지 예결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삼랑에게서 지름길을 알아냈지. 그거 때문에 뱀뱀이가 아주 고생했다고.“
천년뇌각망이 혀를 날름거리며 싁싁거리는 소리를 냈다.
거창한 이름에 맞지 않는 깜찍한 크기의 영물이 주인만 믿고 위협적으로 나오는 모습에 진영은 머리가 다 아파왔다.
주종이 똑 닮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그래서. 대관절 그 볼일이 뭐길래 저를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니신 겁니까?”
“대사형 일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뱀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킨 예결이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슬쩍 태양을 올려다봤다가 건물의 그림자를 힐긋 본 진영은 예결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걸 주군께 가져다드려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또 추적하러 가야 하는 건 아니지?”
그 질문에 진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또 옆으로 빠질 생각은 없습니다.”
예결이 고만고만한 이유로 저를 쫓아다니는 게 아님을 알게 된 진영은 한시라도 빨리 번거로운 일을 해치우기로 했다.
“잘 다녀와.”
바로 여기에서 기다릴 요량인지 예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만한 자세만 보면 볕 좋은 곳에 늘어진 고양이가 따로 없었으나 실상은 사냥감을 기다리는 범이었다.
예결은 두 팔을 대자로 벌린 채 털썩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끔뻑끔뻑하며 구름을 세는데, 뱀뱀이의 꼬리가 그의 뺨을 간지럽혔다.
슬쩍 눈을 마주치자 뱀뱀이가 그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반질반질한 구슬 같아 보이는 눈이라도 감정이 전해지는 걸 보면 신기했다.
“걱정하지 마. 도망치면 잡아 오면 돼.”
어차피 진영은 대사형 근처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뱀뱀이는 그런 걸 걱정한 게 아니라는 듯 꼬리로 예결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나도 안 아프고 간지럽기만 한 항의의 표시에 예결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요새 생각할 게 많아서 조용했던 거지 정말 별문제 있는 건 아니라고.”
무슨 문제가 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다.
제하량에게 목이 졸리긴 했지만 일단 살아 있다. 더는 대사형이 아니라는 충격 선언까지 했으나 계속 대사형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다.
‘사실 목이 졸린 것보단 역가이딩이 치명적이었지.’
그 순간 함께 흘러들어왔던 하량의 감정을 떠올리니 속이 쓰렸다.
자신이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누가 하량의 안에 그런 고통을 심었을까?
‘파문 전까지 있었던 일을 알아야 한다.’
가장 자주 접하는 건 삼랑이었으나 그녀는 안 된다. 성격이 삐뚤어진 데다 재미만 있으면 어지간한 일은 눈감아주는 편이긴 해도 삼랑에겐 틈이 없었다. 삼랑은 예결이 감정에 호소해도 귀를 한 번 후벼파고 말 것이며 어지간한 협박은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말수는 적어도 믿음직한 홍여도 있지만 그를 자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성품에 예결이 묻는다고 해서 하량의 비밀을 털어놓을 것 같진 않았다.
하여 예결은 진영을 탈탈 털어보기로 했다.
진영이 하량에게 가진 충성심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예결은 그가 자신에게 지니고 있는 경계심을 믿었다.
“왔습니다.”
딱딱한 낯을 한 진영이 돌아왔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제 거처로 안내하겠습니다.”
예결이 가볍게 몸을 일으키자 풀물이 든 옷을 힐끗 본 진영의 낯에 아찔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결벽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진영이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면 비위 정도야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었던 예결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는 제안을 건네려던 차였다.
“어서 가자고.”
아무래도 진영은 예결이 지긋지긋한 나머지 최대한 빨리 털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신이 나서 걸음을 옮긴 예결은 장원에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구역에 당도했다. 조금 허름한 편이긴 해도 깔끔하게 정돈된 건물은 전체적으로 작고 소박했다.
안으로 쓱쓱 걸어 들어간 진영이 물었다.
“따뜻한 차를 내드릴까요?”
서로를 더러워하는 사이이긴 해도 손님 대접은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냉차로.”
중원은 얼음이 귀한 동네였다. 그러나 예결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분명 듣다 보면 열 받을 내용일 거 뻔히 아는데 뜨거운 차를 부탁했다가는 혀를 델 게 분명했다.
진영은 예결의 뻔뻔한 요구에도 한 마디 항의 없이 그저 한쪽 눈썹만 쓱 추켜올렸다가 돌아섰다.
“주군의 무얼 알고 싶어서 오신 겁니까?”
금방 냉차와 함께 돌아온 진영의 질문에 예결은 답하지 않은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떫긴 했지만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문 공자?”
“……대사형이 꾸는 악몽이 뭔지. 당신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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