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가장 오래된 (7)
예결은 입술을 달싹였다.
“가장 오래된…….”
입 안에 움푹 고여든 단어는 그것이 머금은 시간만큼이나 무거웠다.
이십 년.
무려 이십 년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증오나 분노처럼 강렬한 감정조차 흐려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량은 어제 헤어져 오늘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예결을 반겼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애틋함이 심마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죽은 이에게 품은 산 사람의 감정이 스무 해 동안이나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내게 해주는 이유가 뭐지?”
예결의 음성은 얼핏 평이하게 들렸으나, 숨길 수 없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떠나기라도 하라는 건가?”
“믿기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문 공자를 위해서입니다.”
진영이 서늘한 낯으로 답했다.
예결이 침묵한 채 빤히 쳐다보자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더 나아가 주군을 위함이기도 하지요.”
“이제 좀 솔직하네.”
“이리 표현하는 것은 외람되지만, 주군은 광인입니다.”
광인이라.
하량을 충실히 섬기는 진영의 입에서 나온 표현인 만큼, 그 선득함이 피부로 와 닿았다.
“만약 주군이 심마 때문에 문 공자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실지 저도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짐작하기 어렵다곤 했으나 정황상 최소 주화입마에 접어들 것이다.
말인즉슨, 예결의 죽음은 곧 하량의 죽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근데…….’
한참 동안 심각했던 예결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나쁜 건가?’
예결은 애정이라는 감정의 범위에 있어서 매우 관대했다.
하량이 가지고 있었을 애정이 심마에 삼켜졌다면 뭐 어떤가. 그 안에는 집착과 원망이 있을지언정 사랑이나 우애도 있을 것이다.
사막에조차 오아시스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땀의 소금기가 희게 말라붙은 몸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유사 위를 거닐어야 할지라도 예결은 그 안에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사막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예결은 모든 것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명의 위협조차도.
‘설령 죽더라도, 내 가이드와 함께 죽는다면…….’
문득 떠오른 솔깃한 충동에 예결은 비소를 지었다.
이래서 에스퍼란 족속은 글러 먹은 거다.
“대사형이 익힌 마공은 얼마나 위험한 거지?”
자신이 죽은 뒤 하량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이는 당연히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 예결이 걱정해야 할 상황은 하나뿐이다.
심마가 악화하여 하량이 예결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것.
“천마신교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위험한 마공이지요.”
진영의 낯은 진지했다.
“심리적 요인 외에 외부의 충격, 그러니까 고수와의 비무라든가 그런 상황 때문에 불안정해질 가능성은?”
“……제가 한 말을 듣기나 하셨습니까? 주군의 심마가 문 공자이니 문 공자만 멀쩡하면 됩니다. 그러니 짐 싸서 중원 반대편으로 꺼지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문 공자도 살고 주군도 산다고-”
예결은 진영이 짜증스럽게 툭툭 던지는 말을 끊어냈다.
“그러니까. 이십 년 동안 기다리신 거잖아.”
진영은 흠칫 굳은 얼굴로 예결을 바라봤다.
“그냥 그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걸 못 하셨던 거라고.”
말 좀 묻겠다며 진영을 졸졸 쫓아다닐 때만 해도 제법 반죽 좋게 웃던 예결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럼, 하루 이틀, 어쩌면 몇 년 더 살라고 대사형을 또 기다리게 해야 한다는 소리야?”
어쩌면, 어쩌면.
중원을 통틀어 하량의 기다림을 이해할 사람은 예결 그 자신뿐일 거다.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리워했던 하량처럼, 다시 태어난 예결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하량을 찾아다녔다.
하염없이 또 끊임없이 먼지 쌓인 책장을 넘기고, 온갖 사료부터 시작해서 소설까지 파고들며 어딘가에는 전생의 흔적이 있으리라 믿었다.
누군가가 예결에게 당장 현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내일 고꾸라져 죽을 운명이라고 알려줘도 그는 중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죽더라도 스무 해 동안 찾아 헤맸던 하량의 곁에서 죽는 게 낫다.
“나는 못 해.”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건 아마 하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진영이 앓는 소리를 삼키듯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했다.
예결의 낯에 자리 잡은 신산함은 그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분명 예결은 스무 살의 청년일 것이다. 스무 해 동안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갇힌 채 잠들어 있다가 치명상을 입은 채로 깨어나 주군과 재회한, 그의 옛 인연.
풋내 나는 청년이어야 마땅할 문예결은 하량과 나란히 세워놔도 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한쪽의 무게가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척 이상한 일이다. 하량은 어디에 내놓아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는 까마귀 사이의 백로였으며 검은 돌 사이의 진주였다.
잘못 오려낸 그림처럼, 혹은 물 위의 기름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붕 뜬 채 부유하는 제하량은 그저 홀로 살아가는 게 가장 잘 어울렸다.
예결은 그런 하량의 곁에 잘도 달라붙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가 제 것이었다는 양 어우러지는 예결을 보고 있노라면 경계해야 한다는 처음의 결심마저 흐릿해졌다.
제하량이, 그의 주군이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문 공자가……. 주군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안 가. 난 갈 데도 없어.”
부모나 친지 없이 항주 뒷골목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청년이 씩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진영이 한숨 아닌 한숨을 삼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볼일 다 보셨으면 나가십시오.”
“차도 다 안 마셨는데?”
축객령에 기다렸다는 듯 일어서 놓고 능청을 떠는 예결의 모습에 진영은 어쩌다가 주군에게 저런 독한 게 꼬였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면, 저 정도로 독을 품지 않은 이상 하량의 곁에서 버틸 수 없으리라.
“지금쯤 주군은 일을 다 마치고 후원을 거닐고 계실 겁니다. 가 볼 생각이 없다면-”
어느새 예결의 옷자락이 활짝 열린 문을 넘어갔다. 그게 마치 날렵한 족제비 꼬리 같았다.
누가 꽁지에 불을 붙인 것도 아닌데 무림인만큼이나 잽싸게 움직이는 예결에게 감탄하며 진영은 적당히 식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 정도면 주군이 시킨 일은 다 마친 셈이군.’
***
결이가 알게 되었다.
손톱 조각을 집어 든 하량은 그 생각에 붙들린 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시간을 더듬어, 방금 전 탕옥에서 마주했던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예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굴었다. 하량은 사제를 뒤흔들기 위해 그의 샅 사이로 파고들어 예결의 욕망을 쥐고 흔들었다. 어떻게든 그를 동요하게 만들고, 얇아진 인내심 너머 자리 잡은 예결의 속내를 꿰뚫기 위해서.
대사형의 낯을 한 채로는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단지 자신이 예결을 죽이려 든 게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을 뿐이다.
색사 직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예결은 당혹과 수줍음에 어쩔 줄 몰라 시선을 피할지언정 공포나 혐오를 내색하지 않았다.
만약 마지막 순간 예결의 손톱이 부러진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와 침실 안을 샅샅이 수색하지 않았다면 하량은 이번 일을 그냥 덮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에게나 닥치는 함정에 빠지고 싶었다.
예결이 자신의 살의를 알게 되었다면 떠날 거라고, 아니. 도망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손톱 조각을 움켜쥔 하량은 진영을 불러들였다.
“십만대산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차분한 음성이었으나 눈은 희미한 광태를 머금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닳고 닳았으나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광기가 하량에게 속살거렸다. 예결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곳으로 데려가면 사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 누구도 살아서 십만대산을 나선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 하량조차 그 감옥의 간수로 매여 있는 신세가 아니던가.
“문 공자는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일정이 앞당겨졌음에도 진영은 불만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일이 어떻게 될지 빤히 알면서도 진영은 확인차 물었다.
“……옮겨 심어야지.”
하량은 말라비틀어진 화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상한 투였다.
그러나 하량의 시선은 다른 곳을 헤매는 듯 멀었다.
“어디에서든 잘 자랄 것이야.”
설령 시들어 버릴지라도 주군은 그의 사제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진영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정든 것들을 두고 떠나기 아쉬울 테니 사제를 달래 주어야겠구나.”
문득 생각난 것처럼 하량이 덧붙였다.
“술을 한 병 준비해 오거라. 달콤한 것으로.”
“존명.”
주군의 명을 숙지한 진영이 물러났다. 그 달콤한 술이 어떻게 쓰일지에 대해 묻는 건 진영의 역할이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수하가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자, 침실은 처음과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탕옥의 밝은 불빛이, 그 습하고 높은 온도와 예결의 존재감, 그 부드럽던 살갗의 감촉이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교성까지 전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고작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사제는 하량에게 몸을 맡긴 채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쥐는 대로 자국이 남는 살갗과 새붉게 달아오른 뺨을 보고 있노라면 예결이 진정으로 쾌락에 취해 모든 걸 내맡긴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설렘과 욕망을 능숙하게 숨기던 아이가 공포와 혐오를 숨기지 못할 리 없었다. 사제는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도…… 곧 마음껏 미워하게 해주마.’
말간 낯을 한 예결의 속이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으리라 짐작하며 하량은 흐릿하게 웃었다.
‘떠나지만 않는다면.’
이제 곧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좋은 꿈을 꾸었다.
(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