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46화 (146/203)

146화. 가장 오래된 (8)

“주군. 문 공자가 오찬을 마련하셨답니다.”

삼랑이 경쾌하게 문을 열고 등장했다.

“시간 안 돼도 어떻게든 모시고 오라는데요?”

삼랑이 건들건들하게 말하는 모습에 진영의 눈썹이 움찔했다.

“마침 잘 왔다.”

마침 그녀를 찾으러 나갈 예정이었던 진영이 그녀에게 술병을 건넸다.

“깊게 잠드는 무색무취의 수면제가 필요해.”

“완전히 무색무취인 수면제는 술과 섞으면 내장이 좀 상할 텐데, 괜찮습니까?”

확인차 묻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게 누구에게 쓰일지 이미 짐작한 게 분명했다.

“그건 곤란하지. 향이 강한 술이니 적당히 어우러지거나 덮일 만한 약으로 준비해라.”

조용히 둘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하량이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잠시만요.”

발랄하게 벽에 세워놓은 서랍장 뒤로 손을 집어넣은 삼랑은 작은 단지 몇 개를 꺼내왔다. 진영은 그걸 또 언제 숨겨놨냐는 듯 눈썹을 움직였으나 하량의 앞이라서인지 큰 질책 없이 입을 다물었다.

신속하게 배합을 마친 삼랑이 흰 종이 위에 하얀 가루를 쏟아놓았다.

“향이 조금 있습니다만, 제일 깔끔한 작용을 합니다. 이걸 다 먹으면 닷새에서 이레 정도는 잠들 거예요. 오래 잔 후유증으로 두통이 발생할 수는 있습니다만, 이건 그냥 신체적 작용이라서 약을 아무리 좋은 걸 써도 어쩔 수 없어요.”

삼랑의 설명을 들은 하량은 망설임 없이 그 내용물을 술병에 털어 넣었다.

“술을 살짝 데워서 마시면 약효가 빠르게 돌 겁니다.”

“내 염두에 두겠다.”

명령을 수행한 삼랑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찬은 안 가시나요?”

진영을 보내 부르기도 전, 삼랑이 나타난 건 예결의 초대 때문이었다.

하량이 이를 듣자마자 느낀 건 망설임이었다.

혹, 예결이 오늘 바로 떠나겠노라 말하기 위해 부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어차피 하량은 그의 사제를 십만대산에 옮겨심을 작정이었다. 여전히 예결을 찾고 있는 백양진인이며 성가시기 짝이 없는 남궁세가의 소가주도 그 안까지는 손을 뻗지 못할 테니까.

“술 마시기 딱 좋지 않습니까?”

하량은 경박하게 손목 꺾는 시늉을 하는 삼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 삼랑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꼭 예결을 만나러 가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사제가 무얼 준비했지?”

“……으음. 그게.”

콧잔등을 찡그린 삼랑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주군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판단은 제 몫이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제 일천한 사견을 말씀드려도 된다면, 모르는 채로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너답지 않은 발언이구나.”

“마음이 약해졌다고 해 두겠습니다.”

삼랑이 씨익 웃었다. 뒤에서 예결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군에게 보고하는 것에 새삼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건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예결은 흥미로운 존재였다. 하량의 앞에서는 순한 양을 가장해놓고 그가 없을 때면 고약한 성질머리를 숨기지 않는다.

내숭을 너무 대놓고 떠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게 내숭 같지도 않다. 저건 그냥 하량 한정으로 나오는 지독한 편애 같은 거였다.

‘편애라.’

대 일월신교의 천마를 상대로 쓰기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예결은 하량을 편애했다.

예결이 하고 있는 말만 듣고 있노라면 천마는 무슨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젊은 협객 같았다. 하량을 무슨 돌봐줘야 하는 위태로운 대상처럼 취급할 때마다 삼랑은 숨 막히는 위화감을 느꼈다. 동시에, 삼랑은 하량에게서 볼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젊은 협객을.

“진영. 술을 준비시켜서 별채로 보내라. 그리고 삼랑, 내가 정오에 가겠다고 전하도록.”

하량은 결정을 내렸다. 만약 그가 삼랑의 판단력을 불신했다면 애당초 수하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존명.”

방 안의 공기를 뒤바꾼 삼랑이 사라진 뒤, 하량은 꽤 오랫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조용히 돌아왔던 진영은 하량의 낯을 살피더니 곧바로 물러났다.

홀로 있을 때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상념도, 그를 지독하게 괴롭혀왔던 심마조차 압도하는 어떤 거대한 감정이 하량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딱 정오가 되기 일 다경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사대적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건만, 하량의 걸음은 퍽 느릿느릿했다.

사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기 위해 이 장원으로 데려와 지금 지내는 건물을 거처로 주었다. 한데 직선으로 곧게 난 그 길이 오늘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렵기만 했다.

건물 밖까지 마중 나온 예결은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만 봐서는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워 하량은 목이 탔다.

사제가 눈을 가릴 것을 권할 때도, 그는 기꺼이 어둠 속에 발을 들였다.

고작 하루 새 미증유의 장소처럼 느껴지게 된 예결의 거처 안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면서, 그는 여기가 어디쯤일지 가늠하기보다는 자신을 붙든 사제의 손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결이 자신을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잠시만요, 같은 말 따위를 하고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버려진 줄도 모르고 기다릴 텐데.

‘길들여진 개새끼가 따로 없군.’

하량은 자조를 삼켰다. 더 끔찍한 건, 사제는 그를 길들일 생각조차 없었다는 거였다.

무량하게만 느껴지던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짜잔.”

걱정이 무색하게도, 사제는 그를 한 방으로 안내했다.

예결은 이 모든 걸 직접 꾸몄다면서 하량을 옆에 앉히고, 하인들에게 요리를 내오라 말했다. 하량은 사제를 차근히 관찰했다.

이쯤 되면 예결이 이 모든 걸 준비한 게 떠나기 위해서가 아님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하량을 좀먹은 불안은 사제의 입술 끝을 쫓았다.

요리가 전부 상에 오른 뒤, 진영이 잘 전달한 술이 김을 내며 식탁에 올랐다.

“향이 무척 좋아요.”

예결의 말에 감탄이 섞여 있었다.

진영에게 따로 명주를 가져오라 이른 보람이 있었다.

“좋은 술이 들어와서 네게 맛을 보여주려고 가져왔단다.”

하량은 이를 본 뒤에야 긴장을 내려놓았다.

그래, 예결이 무어라 한들 변하는 건 없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사제는 십만대산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하량은 주인이 부재했던 동안 슬그머니 목을 내민 마도육가를 상대하며 예결에게 살수를 보낸 가문을 찾고, 그 지독한 자들을 한 번 더 찢어놓으리라.

‘그리고 네게 말해야지……. 저들이 너를 노려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노라고.’

참으로 비겁하게도, 하량은 예결이 달아날 수 없는 곳에서야 비로소 그의 공포와 혐오를 마주할 작정이었다.

사내는 여유를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쩐 일로 내 사제가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들어볼까?”

하량의 계획이 무색하게도, 예결은 한순간에 모든 걸 뒤집었다.

“오늘이 대사형이 태어나신 날이잖아요.”

‘내 생일이라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를 챙긴 적이 없으니까.

아마 하량의 충실한 세 수하도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를 것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있거나.

하량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태어남이 고단했고 살아감이 버거웠다.

그는 생일을 기념해야 할 만한 일이라 여겨본 적이 없었다.

“혹시 잊고 계셨어요?”

황보세가에서는 그의 탄생을 쉬쉬했다. 하량의 외가는 황보 가주의 눈을 피해 외손주를 암살하려 들었다. 딸이 무명의 떠돌이 낭인 따위와 눈이 맞아 태어난 손주는 부정의 상징이었고 애써 접붙인 두 가문을 갈라놓을 치부였으니까.

장난감 공을 던지며 놀아주었던 누이는 그를 원망하게 되었고 정신이 불안정한 모친 대신 하량을 돌봐주었던 유모는 그를 항주의 뒷골목에 버렸다.

“그래.”

침묵이 길었던 탓일까, 예결이 하량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챙겨준 것이 실로 오랜만이라 내 잊고 있었구나.”

“이제부터 제가 챙겨 드릴게요.”

하량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제는 서녕성에서 발품 팔아 구했다는 선물을 건넸다. 하량에겐 그 비단보가 퍽 익숙했다.

삼랑에게 가져오라 일렀던 바로 그 물건 아니던가.

이게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삼랑이 이게 그에게 줄 선물이었다는 사실도, 금일 예결이 하량을 불러낸 것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숨겼기 때문이다.

처음 이걸 열었을 때 느낀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지금은 뭐라 재단하기 어려운 설렘이 하량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

예결이 금 간 곳을 발견하지 못하게끔, 비단보에 싸인 문진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통째로 끌고 왔다.

‘미리 알아서 다행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코 들어 올렸다면 예결이 문진에 생긴 균열을 발견했으리라.

“……예쁘구나. 고맙다.”

문진을 어루만지던 하량의 시선은 그 너머에 닿았다.

예결과 자신의 사이에 놓인 술주전자로.

이대로 고맙다고 잔을 권하면 된다. 손수 따라준다면 직접 마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예결은 하량을 믿고 술과 그 안에 든 수면제를 함께 들이켤 것이다.

‘그리고 십만대산에서 깨어날 터.’

음울하면서도 만족스럽던 상상에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량은 예결이 그곳을 두려워하리라는 걸 알았다. 예결과 그 굽이굽이 어두워 칠흑 같은 산은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예결의 애정을 의심치 않는다. 그의 사제는 곤륜을 떠나 하량을 쫓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교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건 또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아무리 하량에게 맹목적인 예결이라 한들, 그는 정파의 가르침을 받아온 아이였다. 그런 이가 마교로 가야 한다고 하면, 지극히 존경해 마지않던 대사형이 마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뻔하지.’

하량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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