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47화 (147/203)

147화. 가장 오래된 (9)

하량은 그의 사부님을, 백운 진인을 떠올렸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스스로 천마가 되어 십만대산을 벗어난 제자를 만난 사부님은 결국 하량을 파문했다.

그가 걸머진 것은 하량뿐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량은 항상 뒷전이었다. 황보 가주는 그의 어미를, 그의 어머니는 죽은 친부를, 유모는 황보세가를, 누이는 어머니를.

남의 손을 타지 않아도 되는, 번거롭지 않은 아이가 되려고 의젓해졌던 소년은 이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소중한 이를 무참히 꺾어 제 뒤뜰에 심으려는 사내가 되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하량을 붙들었다. 그건 오래전에 닳아버린 양심이나 선한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이 깨진 옥 문진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그에게 활짝 웃어주는 예결이 하량을 뒤흔들었다.

“서녕성에 매일같이 가던 것도 그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던 거니?”

하량이 우려를 가장해 묻자 예결은 손사래를 쳤다.

“아뇨. 일하러 갔죠. 일.”

일이라.

그 말에 하량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남궁 공자가 그 말을 들으면 섭섭하겠구나.”

“……대사형의 무얼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남궁 공자의 안목을 조금 빌리긴 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무인도 아니고, 좋은 물건을 볼 줄도 모르니까요.”

예결이 변명하듯 줄줄이 내뱉는 말이 달았다.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결이 너뿐이지 않니.”

오로지 그뿐이다.

하량은 자신이 다른 이에게 곁을 내줄 여유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아니면 혹, 이걸 그 사내가 골라주었니?”

“……아뇨. 남궁 공자는 그저 가게를 소개해 주기만 했어요.”

“기쁘구나.”

예결이 원하는 말을 속삭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이 네가 직접 골라준 선물이라 더.”

그의 사제는, 하량이 하고픈 말을 하면 언제나 기뻐해 줬으니까.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찾느라 힘들었어요.”

예결의 투덜거림에 귀 기울이며 하량은 몇 번이나 웃었다.

슬쩍 남궁운이 저보다 더 중요한지 아닌지 떠본 건 제가 생각하기에도 퍽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예결이 이른 아침부터 남궁운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선물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그나저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술은 안 되겠구나.”

“하지만…….”

“안 돼.”

건강을 핑계로 기어이 술을 압수한 하량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강제로라도 예결을 십만대산으로 데려가고자 했던 제 뜻을 꺾는 순간, 이를 다시 관철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걸 포기할 수 있나?’

하량은 냉정히 가늠했다.

사제의 웃는 얼굴과 기꺼이 안겨드는 두 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재잘대는 음성과 저를 향한 선망의 시선.

이건 참으로 연약한 행복이었다.

얇은 유리로 세공되어, 조금만 거칠게 다루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말 텐데 그때까지는 마냥 아끼며 지켜보고 싶다.

이게 얼마나 알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인지 하량은 잘 알았다. 고작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사제를 계속 속이기로 결심한 게 아니던가.

‘어차피 언젠가는…….’

예결의 만면에 드리운 저 웃음은 공포에 질린 울음이 되고, 기쁨은 불행이 될 터. 그가 하량에게 품은 경애는 마지막 한 자락까지 혐오로 변질될 테니 하량은 이 유예를 좀 더 간직하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사제의 믿음을 착취하는 형태가 될지언정 말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더는 선한 인간이 아니었다.

“결이 네 생일은 언제지?”

조금 더 오래 눌러쓰기로 한 상냥한 대사형답게 질문한 하량은 예결이 7월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얼버무리려다가 한 계절 내내 선물을 하겠노라 엄포를 놓은 후에야 날짜를 알려주는 사제를 보며 하량은 예전부터 느낀 위화감을 삼켰다.

곤륜파에서의 예결은 생일이 언제라고 주변에 알린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기댈 사람이 없어서 혼자 삼킨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모의 얼굴도 모른다던 천애고아가 어떻게 생일을 알게 되었을까?

‘비밀이 많구나.’

하량은 예결의 뺨을 툭 건드렸다. 이제 사제는 이 정도의 접촉으로는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음에도 분위기에 취한 건지 예결은 헤실헤실 잘도 웃었다.

방까지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를 바래다주며 하량은 예결의 목을 건드렸다. 제 목을 감싸 쥔 손을 내칠 법도 한데 예결은 오히려 그 위에 본인의 손을 겹치며 따뜻하다고 중얼거렸다.

솜털이 곤두서거나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기는커녕, 예결은 실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하량은 자신이 예결의 목을 졸랐다는 걸 알았다. 단순히 심증뿐이 아니라 물증까지 존재하지 않던가. 그러나 예결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다고 믿게 될 것만 같았다.

이만 자리를 피하려다가 옷자락이 붙들린 하량은 예결을 돌아봤다.

“……태어나 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에, 하량은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그는 조금 몽롱한 기분으로 예결을 끌어안았다.

어떤 감정이 심장께를 누르며 굼실거렸다. 마냥 기쁘고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두렵다.’

그는 힘주어 사제를 끌어안았다.

언젠가는 놓치고야 말 이 온기가 두려워 견딜 수 없다.

모르는 채로 사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살아졌는데, 그럼에도 괴로워 매일같이 이 아이를 찾아 헤맸는데.

이젠 알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게, 그렇게…….

“잘 자렴.”

하량은 길고 긴 복도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겼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마침내 건물 밖에 나섰을 때는 거칠어진 숨을 골라야 했다.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한 것도 아니다. 생사대적을 만나 사흘 밤낮 동안 싸운 것도 아니다. 고작 이 정도 걸어 나오는 것만으로 호흡이 불안정해진 건 전적으로 심리적인 문제였다.

비로소 돌아본 하량은 어둠에 잠긴 예결의 거처를 바라봤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매양 사제가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했다.

정작 지금 도망치는 건 하량이었다.

‘너를 옭아매려면, 방식을 바꿔야겠구나.’

하량은 진영을 불러들였다.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군의 명에 진영의 낯에 혼란스러움이 깃들었다.

“제가 어찌 주군의 심모원려를 전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그러했듯이 하량의 충실한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저 받들겠나이다.”

“삼랑과 홍여도 불러오도록.”

그들 셋은 전부 같은 명을 받고 예결의 주변을 맴돌았다.

개중에 예결이 선택한 것은 진영이었다.

나른한 오후의 햇볕을 쬐고 있던 하량은 문이 열리고 아까부터 느꼈던 기척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죽간을 잔뜩 안고 나타난 진영이 그의 앞에 이를 와르르 쏟아놨다.

여느 때처럼 그가 처리해야 할 안건이 적힌 죽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글자 하나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죽간뿐이었다.

“겨우 몸을 빼냈습니다. 주군의 사제는 정말 집요하더군요.”

요 며칠 동안 진영은 예결에게 쫓기고 있었다. 잘만 하면 따돌릴 방도가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이를 방조한 건 나름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인 거지.”

하량은 예결을 가볍게 감싸며 죽간을 정리했다. 하나씩 정리할 때마다 대나무와 대나무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자못 경쾌했다.

“이 정도 애태웠으면 됐다.”

진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결이에게 내가 마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려주거라.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진영은 확인차 물었다.

“문 공자는 여러모로 상궤를 벗어나는 성품이긴 합니다만, 결국 정파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정파 출신이지.”

“……송구합니다.”

진영은 물러났다.

홀로 남은 하량은 느릿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자신이 지금 앉아 있으니 예결의 목은 딱 이즈음일 것이다.

두 손을 날개처럼 펼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감싸듯 쥐었다. 자로 재어본 것도 아닌데, 사제의 목이 얼마나 가느다란지 단번에 헤아릴 수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사건은 감촉으로나마 하량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 두 손으로 예결의 목을 졸랐다.

예결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하량을 대하고 있으나 그 두려움이나 의혹이 언제 썩어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 하량은 보다 안전한 손에서 이를 직접 터트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이유 없이 목을 조른 거라면, 그럼 광인일 뿐이다. 하지만 강제로 끌려간 마교에서 강압에 의해 마공을 배우고 얻게 된 심마 때문에 사제의 목숨을 위협하게 된 사내는 어떨까?

제 사형에게라면 무르디무른 예결은 분명 슬퍼할 것이다. 어쩌면 동정할지도 모르지.

이 사실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그저 아주 나쁜 의도만이 있을 뿐.

그러니 더더욱 완벽했다.

“결이 너는 이 우형을 가엾게 여겨주겠지.”

스스로 날개를 접고 내려앉을 만큼. 딱 그 정도면 된다.

하량은 벌건 미소를 지었다.

***

새순과 봄꽃이 올라오기 시작한 후원을 가로질러, 예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기된 뺨을 보며 하량은 내심 혀를 찼다.

‘저런. 여기에서 진영의 처소는 먼 편인데.’

어지간히 바삐 달려온 모양이었다.

“결아. 어쩐 일이니?”

잘도 치대던 평소답지 않게 우뚝 멈춰 선 예결이 구깃구깃한 옷자락을 슬쩍 말아쥐어 숨기며 말했다.

“……대사형과 산책을 하고 싶어서요.”

들뜬 낯을 가장하고 있으나 하량을 붙든 예결의 손은 차가웠다.

읽힐 듯 말 듯 감춰진 예결의 속내와 달리, 그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조차 의연하던 아이가 이토록 흔들린 이유를 알아챈 하량은 희열했다.

아무리 예결을 노리고 놓은 덫이라곤 하나 정말로 사냥감이 걸려들었음을 확인한 순간 느끼는 안도와 만족감은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그럴까?”

자신을 힘주어 잡아 오는 손길에서 필사적인 슬픔이 읽힌다. 어떻게든 낯빛을 확인하려는 시선에서 제발 아니길 바라는 부정이 읽힌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쩌나…….’

하량은 기분 좋게 웃었다.

(14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