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48화 (148/203)

148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1)

예결은 마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문 공자, 문 공자!”

옆에서 들리는 부름에 예결은 퍼뜩 눈을 떴다. 삼랑이 그를 보고 있었다.

“성도에 도착했어요.”

“흐아암……. 벌써?”

연신 덜컹거리는 승차감에 투덜거리는 게 먼 옛날 같기만 하다. 아니, 어쩌면 너무 졸려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가이딩이 충만해서일지도.’

가이딩이 충분하면 에스퍼는 예민한 감각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중원으로 넘어온 초기에는 주변의 자극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요 며칠은 가이딩이 부족할 일이 없었기에 예결의 감각은 자유로웠다.

‘그나저나…….’

예결은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처음 그대로 손톱이 자라 있었다. 부러져서 영영 안 자라면 어쩌나,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자랐다.

‘중원에 넘어온 순간으로 몸의 시간이 고정되기라도 한 걸까.’

손톱이 아니라 머리카락도 안 자라는 걸 보면 가능성은 있었다. 확신이 없을 뿐.

애초에 환생에 차원이동까지 겹친 제 상황에 마땅한 설명이나 이론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다. 예결은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 십 년 뒤에도 얼굴이 탱탱하면 그때부터 고민하면 되는 문제다.

‘무공을 익혀서 안 늙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공방 사람들은 도착했대?”

선예공방에서 거래를 위해 중원을 가로질러 온 참이다. 사천의 촉금도 직접 견식하고 싶어 왔다고 하니 청해로 오라고 하기도 좀 그래서 예결은 오랜만에 청해를 떠나 성도로 향했다.

‘잘 다녀오렴.’

하량은 예결이 일 때문에 사천에 다녀와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흔쾌히 보내주었다.

언제 금족령을 내렸냐는 양 깔끔한 태도에 예결만 발을 동동 굴렀다.

‘대사형 심마가 그렇게 심하시다면서, 내가 이렇게 가도 되나?’

진영은 예결이 하량의 심마라고 했다.

예결은 일단 하량의 근처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심마가 심화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사제가 죽은 줄 알고 괴로워했으니 살아서 주변을 빨빨대고 돌아다니면 증상이 좀 완화되지 않겠는가.

그래도 흑귀라는 신분이 있어서 다행이다. 하량은 선량하지 미련한 건 아니니 정 심마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면 예결을 직접 찾아올 것이다.

“마차도 타고 배도 타 가면서 이 먼 길을 온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그쪽은 적뢰도 없잖아?”

분리불안에 걸린 예결이 괜히 투덜거리자 삼랑이 답했다.

“전 알 것 같은데요.”

“역시 세상은 손해 보면서 살면 안 돼. 그때 은혜 갚으라고 악착같이 쥐어짰으면 오늘 만날 필요도 없었을 거 아냐.”

예결의 말에 삼랑이 대꾸할 가치조차 찾지 못했는지 혀를 찼다.

마차에서 내린 예결은 하품하며 상단의 장원으로 들어갔다. 행수가 좋은 차가 들어왔다며 나가는 순간, 그의 뒤에 시립한 삼랑이 불쑥 말했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

“호랑이가 우리로 걸어들어왔다는군요.”

“호랑이?”

웬 호랑이? 하고 눈을 끔벅거리자 삼랑이 입술만 달싹였다.

‘괴호. 괴호 팽문형 말입니다.’

아, 맞다.

예결은 덕질메이트를 떠올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퍼즐 조각이 제법 많았다.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기에 조금 부족할 뿐이다.

팽문형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과정이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

‘하북팽가는 산동의 황보세가랑 가깝기도 하고.’

같은 하북의 진주언가만큼은 아니라도 오대세가인 데다가 인접한 곳에 자리 잡은 경쟁세가의 정보를 상당히 쥐고 있으리라.

“아, 청해의 그 마을?”

예결은 벽조목으로 쌓은 자금을 활용해 추혼일도 탈비령이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나 젊은 협객 제하량이 구해준 바로 그 마을을 통째로 사들였다.

처음엔 텅텅 비어 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두 그룹이 머무르고 있었다.

하나는 당서악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데 쓴 녹림도였고 다른 하나는 항주에서 짝귀 장칠과 적혈파가 착취하고 있던 아이들이다.

후자의 경우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경우에는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납치당한 아이들 외에도 부모가 팔아치운 아이들이 더러 있었고, 때론 연고지 자체가 없어서 끌려온 경우가 다수였다.

다시 말해, 전생의 예결과 비슷한 신세였다는 소리다.

예결이 그들을 거두고 싶다는 내색을 비치자 하량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등을 떠밀어 주었다. 현재 아이들은 녹림도와 삼랑이 보낸 감시인을 보호자 삼아 마을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자립심을 없애지 않기 위해 마른 가지 주워 오기라든가, 식사 준비 같은 소일거리는 시키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그 마을의 일 대부분은 녹림도의 노동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삼랑이 언질하기를, 녹림도들이 말랑말랑한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묘하게 개과천선 비슷한 걸 했단다.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하고 도망 나와 산채에 투신한 이가 많았던 것이다.

의외의 순기능이었다.

“예.”

“조만간 만나러 가야겠네.”

마을 사람이라고 말해 놓고 한 번도 못 보면 아무리 괴호라도 의심을 품으리라.

“대사형 곁을 비우기 좀 그런데 왜 이렇게 바쁘담.”

예결은 한 번 더 투덜거렸다.

행수가 직접 내온 차를 몇 모금 마시고, 항주에서 온 구영익을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멀리도 왔군.”

조금만 일찍 가정을 이뤘다면 아들뻘일 예결이 고압적으로 나와도 허허 웃는 것이, 역시 지나치게 사람이 좋았다.

“이번에는 다양한 견본을 준비해 왔습니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한번 보지.”

구영익이 항주에서부터 바리바리 준비해온 비단은 하나같이 황홀한 색을 자랑했다. 물이 빠지거나 얼룩진 곳도 없이, 균일하게 천 전체를 물들인 색이 빼어나기 그지없었다.

하나하나 넘겨 가며 이를 확인한 예결은 인상을 썼다.

“이만하면 훌륭하군. 계약하지.”

차마 내칠 수 없을 정도다. 구영익의 낯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중년의 사내가 소년처럼 해맑게 구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저 낯에 얼마나 지독한 피로와 절망이 서려 있었는지 기억하는 까닭이다.

“기왕 사천까지 왔으니 촉금 구경이나 하고 가는 게 좋겠군.”

예결이 비단을 밀어놓으며 하는 말에 구영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안내해 주시는 겁니까?”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예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서 상단을 나서면 곧바로 번화가에 접어든다. 그중에서도 촉금을 파는 상인들이 모여 있는 거리가 따로 있었는데, 원체 유명한지라 중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가 탐탁지 않은지 호위를 위해 쫓아온 삼랑의 얼굴에 불만족스러움이 번졌다.

“이쪽으로 가면 비단 거리가 있지.”

앞장서서 움직인 예결을 따라오던 구영익은 촉금을 발견한 순간 몽롱한 눈을 했다. 잘 따라오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구영익이 천하절경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첫 가게 앞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예결은 돌아와야 했다.

비단 준다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따라갈 양반이다.

“항주에도 촉금이 적잖이 들어오지만 이 정도 품질의 물건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건 처음 봅니다.”

아무래도 전문 분야라 그런지 휙 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예결이 보기에도 비단상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얼핏 눈이 아플 정도의 쟁쟁한 색의 촉금이 매달린 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붙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홀한 것은 수가 놓인 붉은 비단이었다. 설레는 얼굴로 새붉은 천 사이를 넘나드는 연인들이 보였다.

‘혼례 준비를 하나.’

천과 천이 켜켜이 매달린 틈 사이로 붉은 그림자가 졌다. 그 너울거리는 비단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예결은 문득, 눈에 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옷자락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렸다.

보일 듯 말 듯, 늘어진 비단 사이로 자취를 감추는 이의 그림자는 바람이 불 때면 멀어졌다가, 멈출 때면 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착시라는 걸 알면서도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유령 같기도 하고 환각 같기도 한 이의 뒤를 쫓던 예결은 가게와 가게 사이로 난 골목길을 발견했다.

거리에 내걸린 비단에 홀린 행인들이라면 무심코 지나갈 법한 어둡고 비좁은 길이었다. 그 가운데,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

덩치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 옷깃 사이로 언뜻 드러난 살갗에 남아 있는 흉터들.

예결은 스르륵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붙들어 맸다.

사람들이 숱하게 예결의 앞을 지나가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는 저 너머의 흑귀만 보였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멈춰선 예결과 시선을 마주한 흑귀가 입술을 달싹였다.

[곧 찾아뵙도록 하지요.]

전음에 그게 무슨 뜻이냐고 입을 벙긋거렸으나 오가는 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예결이 가까스로 인파를 뚫고 다가갔을 때, 흑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야속하셔라.’

청해에서 헤어지기가 무섭게 따라와 놓고, 먼저 다가가려 하니 채 말을 걸어보기도 전에 달아난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게 억울했다. 이토록 무수한 사람이 있어도 밀어를 속삭일 수 있는 하량과 달리, 저는 듣는 것밖에 못 하지 않나.

그래도 다음엔 공적인 자리에서 보자고 잘라낸 흑귀가 무얼 핑계로 자신에게 돌아왔을지는 궁금했다.

“문 공자?”

잠시 거리를 벌렸을 뿐인데, 어느새 바투 따라붙은 삼랑이 그를 불렀다.

“거기 누가 있습니까?”

“아니.”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별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예결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

“뱀뱀이한테 어울릴 비단이나 좀 골라줘. 저번에 준 검은 야행복은 너무 칙칙했어.”

말을 돌리는 게 명백했으나 삼랑은 떨떠름한 낯으로 호응했다.

“문 공자의 반려영물은 너무 번쩍거려서 그 정도는 해야 합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알았는지 뱀뱀이가 스륵 움직였다. 예결은 간질거리는 손목께를 부드럽게 어루만진 뒤, 아직 첫 번째 가게 앞을 서성이는 구영익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제가 문 공자, 아차. 상단주님 덕에 호강하는군요.”

촉금을 한 아름 선물 받은 구영익은 들뜬 낯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말했다.

“호강이 아니라 고생시킬 작정으로 준 것이네만.”

예결의 말에 그가 활짝 웃었다.

“아무렴요.”

가시를 뾰족하게 세워도 싱글벙글한 인간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하늘도 참 무심했다. 그는 제 가이드 하나 살피기도 벅찬 에스퍼인데 주변에 호구가 너무 많았다. 눈을 떼자니 아차, 하는 순간 사기꾼에게 신발 속 쌈짓돈까지 털릴 것 같았다.

‘그래도 저 양반 잘 챙기면 황 노야 제삿밥 걱정은 없겠지.’

그거 하나 때문에 봐주는 거라고 생각하며 예결은 구영익이 사천에 머무르는 동안 지낸다는 객잔까지 바래다준 뒤 상단으로 돌아왔다.

‘내 어여쁜 불청객께서는 언제쯤 찾아오시려나.’

예결의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상단이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여 몹시도 분주해진 건 이튿날 아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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