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49화 (149/203)

149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2)

“상단주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장궤의 부름에 예결은 기시감을 느끼며 상단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거친 인상의 무인이 웬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험한 일에 몸담고 있다는 태가 나는, 사파 출신의 무인들이었다.

예결의 그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흑점 소속이다.’

청해에서 이미 한 번 흑점의 심부름꾼을 만나봤기에 저들의 정체를 가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결의 시선은 저 너머를 쓱 훑었다. 흑귀는 마치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으나 웃음기 하나 없는 낯은 진중하다 못해 위압적이었다. 예결은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감상하다가 일꾼들이 물러나자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마침내 하량 앞에 선 예결은 단도직입적으로 통보했다.

“청해에 보낸 것과 같은 선물이라면 이대로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먹히지 않을 수를 두 번 쓸 정도로 아둔한 사내는 아닙니다.”

흑귀가 턱을 까딱 움직였다.

“어디 한번 내용물을 확인해 보시지요.”

짐짓 경계하는 척 물러난 예결은 손을 뻗어 흑점의 일꾼들이 부려 놓은 짐을 확인했다. 조금 헤쳐 놓자 나타난 함을 열어본 예결이 중얼거렸다.

“이건……. 저희 상단에서 판매하는 물건이군요.”

벽조목으로 만든 도장이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청해상단에서 팔았다는 뜻으로 동봉한 증서도 함께였다.

청해상단이 벽조목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만든 증서였다. 벽조목은 본디 귀한 물건이었다. 한데 청해상단을 통해 시장에 많은 물건이 풀리게 되면서부터 그 품질을 의심하는 자가 종종 나타났다.

예결은 청해상단에서 보증한 물건이라는 뜻으로 증서를 동봉하게 되었다.

자그마한 목판에 청해상단의 문장을 새기고 판 날짜와 판매자를 찍어낸 뒤 상단의 장부에 기록한다. 이때 사용되는 자그마한 목판은 무려 도장을 만들고도 남아, 자투리 벽조목 조각을 다듬어 생산하는 것이었기에 인기가 좋았다.

벽조목 특유의 나뭇결이 잘 보이는 데다가 진품을 팔지 않는 이상 탄생할 수 없는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왜 보여주신 겁니까?”

의아하다는 듯 묻자 흑귀가 손을 뻗었다. 손목을 살짝 꺾자 어느새 그의 손에는 예리한 단검이 들려 있었다.

‘옷소매 속에 숨겨놓은 건가?’

무공이라기보다는 배수(掱手)1)의 손기술에 가까웠다.

하량은 그 단검으로 도장을 반으로 베어냈다. 마치 과일의 속살을 갈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흰 속이 드러났다.

예결의 낯이 굳어졌다. 벽조목이라면 좀 더 짙은 갈색이어야 하고 나무 특유의 무늬도 있어야 하는데 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 이제 할 이야기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흑귀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한 말에 예결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청해상단에서도 중요한 거래 상대를 만날 때만 열리는 내실이 열렸다. 어찌나 깊은지 밖에서는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예결이 상단주가 된 후 여길 사용해본 일은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차를 내오라 이를까요?”

“별로 무언갈 마실 생각은 없습니다만, 호위는 물리는 게 좋을 겁니다.”

힐끗 삼랑을 바라보는 시선 처리가 일품이었다.

“아무리 청해상단의 오랜 거래 상대라곤 하나 사파의 무인과 상단주님을 단둘이 남겨놓을 수는 없습니다.”

삼랑이 딱딱거리는 투로 말했다. 예결은 장단이 잘 맞는 주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삼랑, 차를 부탁해.”

“하지만, 문 공자.”

“내 손님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삼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차를 가져오라는 명을 내리긴 했으나 그녀는 정말 차를 우리기보다는 이 공간에 다른 이들이 접근하는 걸 막을 것이다.

흑귀와 단둘이 된 예결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인피면구 너머 숨겨진 하량의 얼굴이 평소와 같을지 궁금했다.

그저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득달같이 쫓아올 수밖에 없었을 그의 초조함과 불안감을 헤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예결은 정신계 에스퍼가 아니었다.

“청하신 대로 독대 자리를 마련했으니 이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군요.”

예결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 어색함을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거였다.

애를 태우기 위해서라도 뜸을 들일 거라 생각했던 흑귀는 곧장 입을 열었다.

“청해상단의 보증서가 암시장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음.”

예결의 입매가 움찔했다.

“제가 늦지 않게 알아챘기에 시중에 나온 가짜 도장은 전부 회수했습니다.”

순순한 호의로 한 일처럼 넌지시 본인의 개입을 덧붙인다. 그러나 흑귀의 험악한 인상은 그 발언을 의미심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일이 지속되면 청해상단에 퍽 악영향을 끼칠 것임은 저 같은 무지렁이도 알겠더군요.”

사천의 암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사내가 스스로를 무지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예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벽조목의 주 고객은 부유층이라 이 상황이 의아하군요.”

돈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이 벽조목이 진짜라는 증명서를 팔아치울 이유는 많지 않다. 어쩌면 돈이 궁한 하인이 빼돌릴 수도 있지만, 상단 측이 보관하는 장부에는 구매자가 누군지 정확하게 나와 있다.

주인에게 교차 확인을 거치면 가짜를 솎아내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누가 증서를 빼돌렸을까요?”

어쩌면 가짜 도장을 만드는 것보다 증서를 확보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뒷거래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알게 되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흑귀가 천천히 운을 뗐다.

“사기를 치는 놈들의 목적은 결국 하나입니다.”

흉터가 가로질러 난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이문을 얻는 것.”

그것이 유형의 재산이든, 아니면 무형의 이득이든 상관없다. 얻는 게 있으니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예결은 흑귀의 말을 가만히 곱씹다가 탄식했다.

“청해상단의 신뢰를 깎아 먹으려고?”

“옳게 보셨습니다.”

청해상단의 보증서가 딸린 가짜 도장이 유통되고 진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의 인식이 어찌 변할지는 뻔하다.

물건을 가지고 장난치는 상단이라는 인식이 박히면 이를 덮어씌우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용서는 어렵고 분노는 쉬운 까닭이다.

“가짜를 전부 확보하신 걸 보면 이 물건이 어디를 통해 유통되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럼요.”

흑귀가 그답지 않게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흑점을 통해서 물량이 풀리고 있습니다.”

예결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사형이 일부러 만든 상황은 아닐 테지만 참으로 시기적절한 사건이다.

어쩔 수 없이 흑귀와 함께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는가.

“일단 보증서 빼돌리는 놈, 가짜 도장을 찍어내는 놈, 그리고 이걸 팔아치우는 놈이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 명의 작품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예결은 하량의 눈치를 살폈다.

“먼저 보증서를 빼돌리는 자를 찾고 싶다면…… 상단 내부를 들여다보라고 조언해 드리지요.”

누가 청해상단의 보증서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가장 빠른 방법은 장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꼭 살피도록 할게요. 그렇다면 다른 둘은?”

“꼴이 이래도 저도 장사치 아니겠습니까?”

흑귀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냥 퍼드리는 건 곤란하지요.”

아, 그러니까 시중에 유통되는 가짜 도장을 찾아준 것도, 보증서와 관련해 상단의 신뢰도에 대한 경고를 해준 것도, 그리고 어떤 경로로 보증서가 유출되는지 귀띔해주는 것까지 전부 미리보기였다는 소리다.

몸통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정보를 유료로 팔겠다면 거부하기 어렵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몸을 뒤로 젖힌 예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낯으로 침묵했다.

“적어도 그 위조범을 산 채로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도장은 제법 그럴듯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만약 하량이 반으로 갈라주지 않았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결의 안목을 속일 정도라면 상대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소리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라도 더 얻어가야지.’

기술자는 어느 시대에나 귀하다.

“……가능합니다.”

흑귀가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이 와중에 위조범을 만나고자 하는 예결의 속내가 의아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값을 치를게요.”

“무얼 요구할 줄 알고 그렇게 선뜻 말씀하십니까?”

흑귀가 그리 물으며 예결의 낯을 쓱 훑었다. 제법 갈증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날 선 어조에 예결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해가 되는 일은 안 하실 거라 믿습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이시군요.”

정중하던 음성에 서늘함이 섞여들어 갔다.

“낙관적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핥은 예결이 속삭였다.

“청해에 있을 때, 흑귀님이 보낸 선물을 받았어요. 혹시 이대로 폭로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에 아찔하여 전부 돌려보내고 며칠 동안 덜덜 떨었지요. 그런데…….”

예결은 쓰게 웃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군요.”

“…….”

흑귀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 흑귀님의 편지를 받는 순간 깨닫게 된 게 있었어요.”

예결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장사치니까, 나를 너무 값싸게 팔아치우지 않겠구나.”

그 속삭임이 마치 독액처럼 귓속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고작 분풀이를 위해서 움직일 사내는 아니구나.”

정작 예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질 않는데, 하량은 급소가 잡힌 것만 같은 기분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순진한 사제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흑귀가 무슨 짓을 저지르기도 전에, 제하량이 저 가는 목을 졸라버린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어차피 십만대산으로 끌고 갈 작정이었으니 같잖은 가면 따윈 집어치울 생각이었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여느 때와 같이 탁한 음성이 하량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고작 분풀이로 털어낼 수 있는 상대였다면 좋았을 텐데.”

1) 소매치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