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3)
예결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말았다.
‘아니, 며칠 전 탕옥에서 그렇게 뜨겁게 구셨으면서 왜 흑귀가 이런 대사를 치는 건데?’
예결은 며칠씩이나 쉬이 잠들지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다.
대사형이 흑귀가 아닌 하량과 예결의 관계에 무게를 실으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결은 대사형이 슬슬 흑귀를 정리할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이 의미심장한 말은 다 무어란 말인가?
“농입니다.”
흑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벌려 보이며 말했다. 상대의 감정이 무언지 전혀 몰랐다는 양 아연해하는 이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항의였다.
“농이라……. 그렇다면 청해상단의 벽조목 보증서 사기 사건을 알리기 위해 친히 찾아오신 것도 오롯이 재미를 위해서입니까?”
예결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그럴 리가요.”
흑귀가 가벼운 투로 답했다.
“문 공자와 청해상단은 흑점의 귀한 손님이 아닙니까?”
“…….”
“마땅한 대우를 해드렸을 뿐입니다.”
귀한 손님이라.
분명 그런 관계이긴 했다. 다만 흑귀가 베푼 호의에 비하면 그 무게가 가볍다. 예결은 불편한 사이에 빚을 지게 된 사람답게 답했다.
“흑귀 님의 호의는 꼭 갚을게요.”
슬쩍 선을 그어봤으나 사내의 낯에 드리운 여유는 사라지지 않았다. 외려, 그는 더 즐거워 보였다.
“어찌 갚아주실 생각입니까?”
사내가 몸을 기울였다. 어느새 바투 다가온 입술이 너무 가까웠다. 예결은 그의 그림자 속에 갇힌 채 위축된 사람처럼 어깨를 옹송그렸다.
“……흑귀 님과 다시 이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런, 재미있는 오해를 하셨군요.”
예결이 한 발짝 물러나며 속삭인 말에 흑귀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여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기에 도와드린 겁니다.”
흔쾌히 예결을 놓아준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거짓말이 아님을 과시하듯, 그의 손에는 가느다란 갈색 머리카락이 한 올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목덜미가 붉군요.”
여상한 투로 건넨 희롱에 예결은 한 발짝 늦게 손을 뻗어 제 목을 가렸다.
“가린다고 하여 색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그럼 숨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감춰봤자…….”
흑귀가 말꼬리를 흐렸다. 예결은 하량의 눈이 좀 더 검어진 것 같다는, 기이한 착각이 들었다.
“저처럼 무도한 이가 그 너머를 상상하게 할 뿐입니다.”
“놀리지 마세요.”
불쾌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갈팡질팡하는 예결의 태도에 흑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정말 어렵군요.”
벌건 눈으로 한참이나 예결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 사이로 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엇이요?”
“격식을 차리는 일, 말입니다.”
흉터가 아로새겨진 흑귀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한 조소를 머금었다.
“배운 것 없는 무지렁이인지라……. 당신처럼 귀한 도련님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결은 멈칫했다.
흑귀의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좀 더 격식을 차린 자리에서 만나자고 일갈한 뒤 자리를 떴다. 대사형에 대해 가볍고 방종한 언사를 늘어놓는 것에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내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던 사람처럼……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선물 공세나 하고, 서한도 돌아오지 않아 홀로 속 썩이다가 보증서 위조 사건을 발견하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 같다.
그래 놓고 또 제 건들건들한 태도에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만약 상대가 하량이라는 걸 몰랐다면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못 이기겠다니까.’
예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귀한 도련님이라니. 전 그저…… 운이 좋았던 사람에 불과합니다. 못 배운 걸로 따지자면 저만한 이도 없을 겁니다.”
흑귀의 시선이 예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단한 무림 문파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놓고, 글을 잘 모르는 통에 남들보다 심법 공부가 몇 년이나 더 걸렸지요. 몸은 둔하고 동년배보다 체구가 작으니 검법 수련인들 수월했던 적이 없고…….”
“무림 문파에 입문했다면 스승이 붙지 않습니까?”
예결의 말을 흑귀가 툭 끊어내며 물었다.
순간 예결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백양진인은 중원에서 나고 자란 문예결이 죽은 후 화장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목격자였다.
옛 사부님이 이런 사실을 대사형에게 폭로하기 전에 그의 신용도를 최대한 깎아놔야 했다.
“무공에 별 재능이 없는 제자까지 두루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분은 아니셨습니다. 워낙 큰 문파였으니까요.”
예결은 슬쩍 백양진인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중원 정서상 대놓고 욕하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다. 제 스승 욕을 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슬쩍 하량의 눈치를 살피려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은 멈칫했다. 흑귀의 낯에 겉치레로나마 남아 있던 웃음기가 사라진 채였다.
그리 다정한 생김새는 아니었다지만 그 흉흉함을 오늘처럼 실감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랬군요.”
하량 본인에게도 넌지시 백양진인과 그리 친밀한 사제지간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긴 했다. 다만 당시의 대사형은 곤륜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울적한 척하는 예결을 달래주기에 바빴다.
까닭에 예결은 그의 진정한 속내를 엿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문정파에서 제자에게 글도 가르치지 않고 혼자 심법을 배우라 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제가 배움이 느려서…….”
“그럴 리가요. 제가 보기에 문 공자님은 무척 영민한 분이십니다. 장사치의 안목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하물며 심법이라면 혈도를 따라 내기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가르쳐 줄 수도 있었을 터…….”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협객이 장사치의 안목 운운하는 모습에 위화감이 절로 차올랐다. 예결은 이를 잘 갈무리했다.
“뭐,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까요.”
이젠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 예결은 하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제가 하고픈 말은 귀천을 따져봐야 소용없다는 겁니다.”
예결은 제 가슴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흑점의 간부인 흑귀 님이 보시기엔 곱게 자란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나름 치열하게 살았거든요.”
굳어 있던 흑귀의 입매가 살짝 풀렸다.
웃음을 지은 건 아니었으나 백양진인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정색을 생각하면 상당히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저는 정말 문 공자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토로에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속에 든 것이 무어든 간에, 그 아연한 낯만큼은 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저 몸뿐인 관계처럼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제 흉터가 끔찍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답을 하셨지요.”
잠시 숨을 고른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제가 분수에 넘치는 꿈을 꾸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밤새 운우지락을 나눠도, 문 공자에게 있어서 저는 대사형이라는 사내의 대용품일 뿐이었습니다.”
“그건.”
습격 아닌 습격에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차마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예결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니……. 제가 그를 깎아내렸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신 것 아닙니까?”
예결은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뭘 의도했다기보다는 그저 초조함의 발로였다.
한숨을 내쉰 흑귀가 손을 뻗어 엄지로 예결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팔 수 있다면 몸도 내놓는 천박한 장사치라지만 너무 흔들어놓지 마십시오.”
입술을 깨무는 것을 멈추자 사내는 천천히 손을 거둬들이며 속삭였다.
“문 공자가 제게 주신 화대를 마음대로 써먹을지, 또 누가 압니까?”
흑귀가 비틀린 미소를 그려냈다. 단순한 협박으로만 여겨지길 원치 않았는지, 그의 분위기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척 입을 다문 예결은 담대하게 답했다.
“흑귀 님의 염려는 마음에 새기도록 할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흑귀가 몸을 뒤로 물릴 때였다.
“하지만 시작할 때와 많은 게 달라진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리 말하는 사내의 음성에는 낮은 울림이 섞여 있었다. 잘못 들었다가는 화가 난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예결은 한없이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하고 싶지 않아요. 무언가가 더 달라지는 건 무서운 일인데…….”
예결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연약한지, 흡사 혼잣말을 훔쳐 듣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하량의 마음에 조바심이 절로 일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흑귀가 예결을 살살 얼렀다.
굴속에 처박힌 짐승을 꿀 바른 과일로 꾀어내는 사냥꾼처럼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결이 답했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흑귀는 이제 숨 쉬는 것마저도 잊은 채 예결을 바라봤다.
잘근잘근 씹는 통에 붉게 부푼 입술은 물러도 너무 물러 보였다.
“대사형을 자꾸 나쁘게 말하는 흑귀 님에게 화가 나서 청해로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당분간은 얼굴은커녕 편지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정작 멀리하니 허전하더군요.”
예결은 쓰게 웃었다.
“왜 그 심술궂은 사내가 자꾸 생각이 나는지……. 선물은 당혹스러웠고 대사형에게 방종한 사제라는 게 들통이 날까 두려웠는데 왜 서신은 또 반가운지, 정말 저도 제 속을 알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촉금을 사러 간 비단상 거리에서 흑귀 님을 보고, 환상이라고 생각했지요.”
살짝 심호흡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흑귀 님에게 그렇게 매정히 돌아선 저를 찾아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순간 내가 당신을 퍽 그리워했구나, 하고 깨달았던 거 같아요.”
“전음을 보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흑귀가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맞장구쳤다. 예결은 답하지 않고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
“분명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대사형이겠지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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