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4)
차마 이 문장을 완성할 수 없다는 양, 예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흑귀는 예결을 채근하지 않은 채 시선만으로 그를 압박했다.
“흑귀 님도 제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토해낸 고백이 흑귀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았는지 아마 예결은 모를 것이다.
처음 느낀 것은 설렘이었다. 거죽과 목소리를 비롯해 심지어 성품과 나고 자란 배경까지 완전히 뒤바꾸어도 예결은 어미 오리를 쫓는 새끼처럼 하량 자신을 알아보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동시에, 그는 두려웠다. 흑귀에 대한 예결의 애착은 하량이 아닌 다른 이가 사제를 차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내어줄 생각이 없지만, 예결이 저 스스로 걸어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이 보다 현실적인 공포가 되어 와 닿았다.
“전전긍긍하며 문 공자를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손을 뻗은 흑귀가 예결의 뺨을 툭, 하고 건드렸다. 이내 그의 손등이 예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시선에 사로잡힌 탓일까, 등허리에 오싹한 소름이 맴돌았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길고 나직한 한숨에 묻어나는 감정은 진득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번처럼 달아나지만 마십시오.”
흑귀가 쐐기를 박았다.
“무심코 당신을 쫓게 됩니다.”
예결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아직은 제 인내심이 쓸 만했다지만, 다음에도 그게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협박인가요?”
“권유지요.”
정말 악당 같았다. 예결은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거래를 청할 때 이런 분이라는 걸 모른 건 아니었으니, 감당할게요.”
예결은 그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벽조목 보증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희의 관계는 차차 알아 나가기로 하고,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해 볼까요?”
공적인 일 때문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
하량은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사냥감에게 관대했다. 애초에 너무 궁지로 몰아세울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이문을 남긴다고 하셨지요.”
사제가 불쑥 꺼낸 말에 하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벽조목 도장 몇 개 더 팔아먹자고 이런 일을 저지른 건 아닐 테니, 저들이 노리는 건 청해상단의 신용이겠지요. 가짜나 팔아치워 주머니를 불린다는 인식이 생기면 매상이 떨어질 건 자명한 사실이니까요.”
예결은 어깨를 조금 움츠린 채 조곤조곤 추리를 읊었다.
“청해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사건의 배후는 사천에 적을 둔 상단일 겁니다. 아니면 여기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싶어 하는 상단일 수도 있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시작한 추리라 하지만 후보를 좁혀나가는 예결의 판단력은 제법 매서웠다.
이를 가만 지켜보던 하량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백양진인이 제대로 된 스승이었다면 저 아이는 어떻게 컸을까?
‘내게는 다행인가?’
예결이 곤륜보다도 그를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는 아주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해치우려면 일단 적을 끌어내야겠군요.”
하량이 넌지시 제안하자 예결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제가 이런 쪽의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예결이 도움을 청하기를 잠자코 기다리면 그만이다.
생각에 잠긴 예결은 보증서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톡, 톡 하는 경쾌한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흑귀가 이에 익숙해질 즈음, 그 손가락이 멈췄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하량이 흥미롭다는 듯 예결을 바라봤다.
***
보보는 사천 성도의 번화가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객잔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간단한 바느질거리를 맡기도 했다.
지금 그녀는 청해상단 사천지부의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보보의 손에는 웬 나무토막 하나와 도장이 들려 있었다.
‘이거면, 어? 삼 년은 먹고살 걱정이 없다니까?’
자주 일하러 다니던 객잔의 점소이의 음성이 귀에 생생했다. 손버릇이 나빠 종종 도박 빚을 지곤 하던 녀석이 엊그제 새 신발에 새 옷도 갖춰 입고 나타났다.
흑야방에서 빌린 돈을 다 갚았다며 히죽거리는 점소이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술에 곁들여 먹을 안주 한 접시에 본인의 비결을 털어놓았다.
‘뒷골목 장물아비인 유 씨한테 가서 도장이랑 물건을 달라고 해. 철전 오십 푼이면 된다고.’
‘철전 오십 푼?’
그 정도면 보보도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래. 그걸 가지고 청해상단으로 가서 비싼 돈 주고 산 벽조목 도장이 가짜라는 소문이 떠돌아서 불안하니 살 때 약속했던 것처럼 돈으로 보상하라고 해. 그러면 장궤가 주는 전낭을 받고 나오면 끝.’
술잔을 기울인 사내가 킬킬 웃었다.
‘전낭 열어보는데, 와……. 과연 천하에서 손꼽히는 상단다운 배포더라. 이거 완전 호구 잡았다니까.’
결론은 사기를 쳐서 얻은 돈이라는 소리였다.
보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점소이가 그리 미덥지 못한 인간이라고 몇 번 되뇌긴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 보상이라는 걸 받으면 숨통이 트일 거라는 생각이 보보의 신중함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마음먹은 바를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유 씨를 찾아가 도장과 웬 글자가 새겨진 나무판을 받은 보보는 냉큼 청해상단으로 달려갔다. 그 점소이처럼 입 싼 놈이 알게 된 이상 온 동네에 소문이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 몫만 챙기면 돼.’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 그녀는 문지기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갈래창의 날에 자꾸만 시선이 갔기 때문이다.
저들이 그녀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저 창으로 몸을 꿰뚫어 버리면 어쩌나, 같은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저어…….”
활짝 열려 있는 문을 넘어서기 전, 주저하던 그녀는 말을 걸었다.
“도장 때문에 오셨습니까?”
냉랭하리라 생각했던 문지기가 도리어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보보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네.”
“안으로 드시지요.”
문지기는 친절하게 옆으로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던 보보는 상단 안으로 몇 걸음이나 들어선 뒤에야 심호흡했다.
‘조, 좋아. 아직까진 안 들킨 거 같아.’
너무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사람이 북적였다. 보보는 이게 다 청해상단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아연해졌다.
‘괜히 중원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상단이 아닌가 보네.’
보보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만한 규모의 상단이라면 그녀가 사기를 좀 친다고 해서 악착같이 쫓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큼지막한 곳간에서 쌀 한 수저 덜어낸 수준이 아니겠나.
“거기! 줄 서시오!”
보보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려 하자, 그중 부루퉁해 보이는 사내가 그녀를 향해 삿대질하며 말했다.
“주, 줄이요?”
“도장값 받으러 온 거 아니요?”
“예? 예에. 내가 도, 도장값을 받으러 왔지요.”
“그럼 줄 서야지. 줄. 남들은 멍청해서 온종일 예 서 있는 줄 아나.”
투덜거린 사내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망설이던 보보는 줄의 끄트머리로 가서 섰다. 아직 해가 그리 뜨겁지는 않았기에 마냥 서 있는 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지루하게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보보는 주변을 힐끔거리며 관찰했다. 줄에 선 이 중에는 돈을 받고 앞자리를 파는 이도 더러 보였다.
그치들은 또 줄의 가장 뒤로 가서 섰다.
‘뭔……. 온갖 종류의 장사꾼이 다 여기에 모여들었나.’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할 즈음, 보보는 청해상단 사천지부의 장궤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청해상단의 장궤 도우민이라 합니다. 상담 중 고객님의 거친 언행이 있을 경우 바로 상단의 호위가 나서게 되어 있으니 이 점 숙지 부탁드립니다.”
“예에. 아무렴요.”
‘원래 큰 상단은 다 이러나?’
낯선 응대에 보보는 뻣뻣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돈만 받고 떠날 작정인데 눈에 띄는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여기 손님의 성함과 도장을 산 날짜를 적어 주십시오.”
보보는 주섬주섬 나무판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여, 여기 적혀 있습니다.”
그녀는 까막눈이었다.
“음……. 그러니 황각 소저로군요.”
사내의 말에 보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황각이라니, 누가 들어도 사내의 이름 아닌가.
소저라는 호칭마저 조롱 같다.
“네, 그. 부모님이 아들을 원하셔서 이름을 그리 지어놓고 기다리셨습니다.”
지레 찔려 장궤가 묻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섬긴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사기도 아무나 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잠시만 대기 부탁드립니다. 장부에서 보증서 내역을 교차 대조 후 바로 환불 진행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종일 여기에서 보내고 허탕을 치면 내일은 물로 배를 채워야 하나.’
차마 장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다본 보보는 멈칫했다. 제일 깔끔한 옷을 입고 왔는데 인제 보니 옷소매가 닳아 있었다. 게다가 치맛자락에는 흙먼지가 남긴 얼룩이 남아 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렇게 못 먹고 사는 태가 나는데 장궤가 과연 속을까? 장사치들의 눈썰미가 어찌나 귀신같은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점소이 녀석에게 돈이라도 빌려서 새 옷을 사 입고 올 걸 그랬다.’
거친 일을 하느라 뭉툭한 손톱 끝도 신경이 쓰였다.
“여깄습니다.”
초조함이 무색하게도, 장부를 넘겨 확인하고 무언가를 수기로 적은 도 장궤는 보보에게 옆에 쌓여 있던 전낭을 건넸다.
“허.”
‘저, 정말 주네?’
기쁨과 당혹, 안도와 수치심 같은 것이 보보의 낯을 스쳤다. 들뜬 머리가 당장 이 돈으로 무얼 해야 할지 가늠하는데 들어갈 곳이 너무 많아 순서를 정하기 어려웠다.
“미리 안내해 드렸듯이, 지금은 일차 상환 기간이라 정신적 피해보상금만 드리고 있습니다. 전액 환불은 이차 상환 날짜에 진행됩니다.”
장궤가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이차 상환 날짜요?”
손에 쥔 전낭의 무게에 긴장이 좀 풀린 보보가 되물었다. 점소이 녀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예. 여기에 이름과 내역을 적어 두었으니 이차 상환 날짜에 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보보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것보다 더 준다고?’
장궤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되도록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단기간에 전표를 발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삼차 상환 날짜까지 기다리셔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꼬, 꼭.”
보보가 단언했다.
“이차 상환일에 재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궤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그럼 지금까지 청해상단의 장궤, 도우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