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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52화 (152/203)

152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5)

창을 가린 발을 벌려 밖을 확인한 예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 벌써 이렇게나 모일 줄이야.”

일차 상환 기간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장궤를 통해 이차 상환 계획을 전해 들은 사기꾼과 진짜 고객이 구름처럼 청해상단에 몰려들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그 넓던 장원이 사람으로 미어질 지경이었다.

예결의 건너편에 서 있던 삼랑이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차 상환 기간 같은 걸 만들어서 온갖 어중이떠중이에게 위로금 조로 돈을 퍼주시더니 이차에서는 아예 도장 값을 돌려준다고요?”

“상단이 벽조목 도장이라고 보증서까지 붙여서 팔았는데, 가짜가 돌아다녀서 그 가치가 훼손되었다면 당연히 돌려줘야지.”

“그렇게 장사하면 천하삼대상단이 아니라 천하만대상단이 되겠습니다.”

길거리에 나앉기 딱 좋은 발상이라며 덧붙인 말에 예결은 히죽 웃었다.

“장사하는 거 아닌데.”

그는 지금 본보기를 만드는 중이었다.

“슬슬 다 모인 거 같은데 나가볼까?”

예결의 말에 삼랑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 노릇을 할 때면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는 거다.

밖에 나선 예결은 오랜만에 감각을 풀어놓았다.

에스퍼의 청각에 모여든 이들이 수런수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쉽게 보상금을 준다고? 어떻게든 잡아떼고 안 주는 게 아니라?”

“가짜 벽조목 도장을 유통했다는 말이 나돌면 치명적이라 그렇지.”

“여기 모인 사람 한 명당 도장 하나만 물어내라고 해도 이걸 다 갚으려면 상단이 파산하지 않으려나?”

“내 돈은 주고 파산했으면 좋겠는데.”

예결은 속으로 웃었다. 어차피 저 중 진짜 고객은 여기 인원의 절반은커녕 십분의 일도 안 된다.

사천의 온갖 어중이떠중이와 사기꾼이 여기에 모였다. 몇몇은 사기꾼에게 속아 이 자리에 선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가이딩이 충분해서 그런지 두통은 안 느껴지네.’

한꺼번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사나운 것만 빼면 꽤 괜찮았다.

예전이었다면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 이야기 사이에서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미리 마련된 단상 위에 오르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청해상단주, 문예결입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청해상단주는 그들이 막연히 상상한 것과 달리 젊은 청년이었다.

“너무 어린데?”

“보상안이 지나치게 후하더라니. 이제 그 이유를 알겠어. 상단주가 뭘 모르는 애송이였구먼.”

예결은 제 귀에 들리는 험담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먼저, 저희 상단의 물건을 믿고 사주신 고객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공을 실어 말한 것도 아닌데 예결의 음성은 장내에 두루 퍼졌다.

“금일, 약속드린 대로 벽조목 도장에 대한 배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나직한 기쁨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벌써 좋아하면 안 될 텐데.’

심드렁히 생각한 예결이 손짓하자 삼랑이 물이 담긴 큰 대야를 가져왔다. 투명한 대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중원의 기술력은 유리로 수조를 제작할 정도는 못 됐다. 대신 예결이 준비한 건 조금만 발뒤꿈치를 들면 내부를 볼 수 있게끔 넓고 낮게 제작된 대야였다.

“저게 뭐야?”

“물…… 같은데?”

“물이 가득 찬 대야를 호위무사 혼자 든다고? 진짜 강한 무림인인 모양이네.”

미리 물을 가져다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결은 일부러 삼랑에게 중간에 대야를 가져오라 일렀다.

힘자랑을 위해서였다.

‘이걸로 갑자기 미친 짓 하려는 놈들은 잠시 망설이겠지.’

“단, 이 이 자리를 빌려 특별히 밝힐 게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일단 돈은 준다고 했으니 바로 빠져나갈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저희 청해상단에서 유통하는 벽조목입니다.”

예결은 아직 가공하기 전의 벽조목을 들어 올렸다. 사흘 전쯤 삼랑이 가져온 대추나무를 예결이 즉석에서 가공한 따끈따끈한 벽조목이었다.

번개가 검게 그을린 대추나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미미한 놀라움이 스쳤다. 대체로 시중에 유통되는 벽조목은 이미 가공된 상태이기 때문에 번개가 내리치고 간 나무를 통으로 보는 건 드문 경험이었다.

예결은 검게 그을린 나무토막을 물에 던져 넣었다.

분명 떠 있던 대추나무는 천천히 바닥에 가라앉았다.

“보시다시피 청해상단에서 다루는 벽조목은 진품으로,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장궤가 실제로 판매 중인 벽조목 도장의 견본품을 가져왔다. 예결은 그 도장과 보증서를 나란히 물에 털어 넣었다.

가공 전의 나무토막보다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벽조목 도장과 보증서가 가라앉았다.

앞쪽에 가까이 서 있는 이들은 이를 두 눈으로 목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뒤쪽에 있어서 대야가 잘 안 보이는 이들은 그 감탄에서 예결의 말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몇몇 사기꾼이 괜히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거나 헛기침했다.

“보상에 앞서서 간소한 확인 절차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니, 확인이라니? 물에 도장과 보증서를 던져넣으면 못 쓰게 되지 않소?”

한 사람이 목소리를 키웠다. 예결은 덤덤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장궤에게 턱짓하자 그가 예결의 귀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였다.

“윤 어르신이군요. 환불을 진행하는 만큼, 물건도 회수됩니다.”

장궤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는지 흠칫한 사내가 발끈한 척 물었다.

“일차 때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

“그야 피해 규모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으니까요.”

눈치 빠른 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예결은 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런. 어딜 가십니까?”

청해상단주의 외침에 사람들의 고개가 우르르 돌아갔다. 우뚝 멈춰 선 도주자들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상단의 무인에 의해 정중하게 에스코트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청해상단에서는 고객님의 만족을 위해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결의 대사에는 서비스 정신이 아닌, 사기꾼은 단 한 명도 보내지 않겠다는 집념이 녹아 있었다.

그렇게, 벽조목 도장과 보증서의 검증이 시작되었다.

첫 고객은 제법 대담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보증서와 도장 모두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

“이런. 귀하께서 가져온 물건은 저희 상단의 제품이 아닌 모양입니다.”

“보증서가 너무 작아서 물에 뜨는 것이겠지요!”

날카로운 음성에 예결이 단도를 꺼냈다.

“하면 잘라 보십시오.”

같은 규격의 보증서가 가라앉는데도 이런 억지를 부리는 이가 등장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준비한 거였다.

“보증서를 스스로 훼손하게끔 만들려는 겁니까?”

의심의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퍽 괜찮은 연기력을 가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며 예결은 여봐란듯이 단도를 들어 올렸다.

“직접 보시지요.”

그는 견본으로 마련된 벽조목 증서를 단도 끝으로 주욱 그었다. 하지만 예결이 들어 올린 벽조목의 단면에는 칼자국이 전혀 남지 않았다.

예결은 주변 사람들이 이를 충분히 볼 수 있게끔 한 차례 주변에 돌렸다. 사람들은 고작 나무토막 주제에 실금 하나 생기지 않는 걸 직접 목격했다.

충분히 분위기를 휘어잡았다고 판단한 예결은 차분히 설명했다.

“벽조목은 삿된 것을 물리친다고 하여 인기가 좋지만, 진정 벽조목을 써 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이 내구도야말로 벽조목이 귀한 이유라는 것을.”

그는 손에 쥔 단도를 모두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가 나간 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무른 철로 만든 단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지요.”

실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단도였다. 시각적 충격을 주기 위함이다.

“청해상단의 장인은 작은 도장을 깎아내기 위해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벽조목을 쪼개는 것부터가 일이니까요. 이걸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고,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러운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듬고, 바닥에 주문받은 문양이나 이름을 새기지요.”

첫 고객은 얼굴을 붉힌 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단상 위에 있어서 사기꾼들이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히는 게 보였다.

‘재미있다니까.’

예결은 한 명 한 명 지목해서 앞으로 끌어냈다. 양옆에 삼랑이 이끄는 상단의 무인이 함께하니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채 도장과 보증서를 물에 빠뜨려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에 가라앉는 보증서는 더러 있어도 함께 가라앉는 도장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전부 사기꾼만 모여든 건 아니었다. 한 부인은 향시에 합격한 아들을 위해 도장을 샀다가 저자에 가품이 나도는 걸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환불을 위해 찾아온 거였다.

예결은 장궤를 시켜 그녀를 귀하게 대접하라고 일렀다.

“재미있군요. 가라앉은 보증서는 이토록 많은데 도장은 고작 두어 개가 전부라니.”

예결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포쾌님?”

청해상단의 장궤처럼 서 있던 도우민이 낯살을 찌푸린 채로 성큼 걸어 나왔다.

“……상단주님의 제보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습니다만, 모든 게 명백해졌군요.”

도우민은 일차 배상 기간 때부터 잠복근무를 시작한 사천 성도의 포쾌였다.

“사기당한 이와 진짜 사기꾼을 추리려면 한세월 걸릴 테지만 상단주님 덕분에 무도한 자들을 판별해내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듯합니다.”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앞의 사내는 흑귀가 동업자를 위한 선물이라며 직접 골라준 인사였다.

좋은 가문 출신이라 남 눈치도 안 보고, 갓 관직에 오른지라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하고 가슴이 뜨거울 테니 불의를 참지 못할 거라는 게 추천 사유였다.

과연 그 흑귀가 추천한 만큼, 도우민은 영민한 인재였다. 수사에 대한 열의도 있어서 예결이 다소 현대 서비스 센터 직원에 가까운 교육을 시키는 데도 쏙쏙 흡수했다.

“억울한 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입으로는 선량한 상단주인 척 말하면서도, 예결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반 이상, 아니 적어도 삼 분의 이는 사기꾼일 것이다. 정말 ‘큰손’이라 할 법한 대단한 수준의 사기꾼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예결이 여기에 모인 이들이 대부분 사기꾼이라 이토록 확신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꿀을 흘렸는데 개미가 안 꼬이고 배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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