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6)
일차 상환 기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천 저자에 청해상단이 도장을 가지고 사기를 쳤다는 소문이 짜했다.
누군지 모를 상대가 판을 깔고 목적을 달성하려 든 것이다.
예결은 성격이 나빠서 저를 건드린 이가 달콤한 과실을 즐기게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흑귀를 끌어들인 예결은 그 소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성도뿐이 아니라 사천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이미 붙은 불을 키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결은 청해상단이 도장을 판매했을 때 약속했던 대로 보증서를 갖춘 진짜 벽조목 도장이라면 보상해주겠다고 선언했다.
흑귀는 흑점의 정보망을 통해서 청해상단의 벽조목 보증서 사기에 한 발 담그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정보’를 슬쩍 퍼트렸다.
그뿐이랴. 예결이 요청한 바를 듣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진짜’ 가짜를 뒷골목에 풀어버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물려 오늘까지 왔다.
약간의 부채질만으로도 몸을 부풀린 불길은 활활 타오르며 부나방들을 유혹했다. 사천 전역은 물론 인접한 지역의 사기꾼까지 성도로 달려온 것이다.
‘하여간 요즘 사기꾼들이란. 너무 편하게 돈을 벌려고 한다니까. 나 때는 나무 속까지 물들여서 팔려고 했을 텐데.’
예결은 혀를 끌끌 찼다.
약속된 호구를 향한 사기꾼들의 구애는 퍽 열렬했다.
직접 위조할 능력이 없는 사기꾼들은 뒷골목을 통해 기술자를 찾아다녔다. 사천의 뒷거래는 대부분 흑점에서 시작되거나 흑점으로 흘러들어오기 마련이다. 하여 흑귀는 사기꾼들에게 팔아치운 물건값을 예결에게 적당히 나누어 줬다.
덕분에 예결은 뒷주머니로 또 한 재산을 챙길 수 있었다.
이러다가 양지의 천하삼대상단이 아니라 음지의 천하제일상단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좋은 파트너야.’
예결이 보기에 대사형의 수완이 퍽 괜찮았다. 비교적 짧은 시간 내로 소문을 퍼트린 것만 봐도 그가 거느린 입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찍어내던 가짜 벽조목 보증서는 또 어떻고?
괜히 청해에서 가장 큰 상단의 주인으로 거듭난 게 아님을 새삼 실감했다.
여태 대사형의 본업이 뭔지 의심해왔건만, 이번 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정말 상인으로 전직했다고 믿어주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예결은 도 포쾌가 조사를 위해서라며 사기꾼들을 잡아가는 걸 지켜봤다. 상단의 호위처럼 옷을 갈아입고 있던 그의 수하들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빠져나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원하시는 바는 달성하셨습니까?”
건물로 돌아오자 그림자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예결은 그 얼굴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대 이상으로 해치웠네요. 이제 청해상단이 아니라 사기꾼들에게 화살이 돌아간 것 같아요.”
예결은 훌륭하게 논점을 흐렸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원래 사천 뒷골목에 돌아다니던 보증서는 진짜였다.
하지만 사기꾼이 이렇게 늘어나고 진짜 보증서의 개수를 압도하는 가짜가 나타나니 전부 묻혀버리고 말았다.
‘묻히게 될 거고 말이지.’
누군지 모를 상대가 커질 대로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허둥지둥하는 사이, 예결은 놈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사기꾼들이 청해상단에 직접 이름을 등록하고 간 덕이다. 하량은 예결이 건넨 명단을 통해 흑점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위조 기술자를 고용한 이들을 솎아냈다.
이제 며칠 뒤면 그들의 행적이 전부 보고서로 올라올 것이다.
그중에서 이번 일에 개입한 위조범을 찾아내는 걸 시작으로 예결은 청해상단의 적을 알게 되리라.
“일을 이렇게 키울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꽤 효과가 있군요.”
흑귀는 여러모로 감탄한 기색이었다. 예결은 뿌듯함을 애써 억눌렀다.
“포쾌를 끌어들이는 일에는 반대한 게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하량의 말에 예결이 대꾸했다.
“청해상단은 나라에 막대한 세금을 내고 있으니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를 백분 활용해야지요.”
아직 신분제가 남아 있는 중원인은 쉬이 관부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상대가 어려운 존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량처럼 무림인으로 크면 관무불가침이라는 금기를 범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던 예결에게는 그리 어려운 발상이 아니었다.
“행여라도 포쾌가 청해상단의 경쟁자의 회유에 넘어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예결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거기에서부터는 제 영역이 아니지요.”
그 시선이 흑귀를 향했다. 비교적 오랜만에 보는 예결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흑귀의 낯에 즐거움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저는 흑귀 님의 추천을 믿습니다.”
“좋아요. 동업자 사이에 신뢰란 중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느릿하게 다가선 사내는 그 단단한 두 팔로 예결을 휘어 감을 양 몸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이 모든 게 무료 봉사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청해상단과 흑점의 우의는 더욱 깊어질 겁니다.”
원하는 말이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에둘러 표현하자 흑귀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진해졌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다음부터는 좀 더 사람을 의심하는 법을 배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흑귀 님 눈에 제가 얼마나 난약하게 비치는지는 몰라도, 저는 대사형이 주신 걸 다른 이에게 빼앗길 정도로 녹록한 인간은 아닙니다.”
예결이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이렇게 일을 키운 이유는 하나 더 있거든요.”
***
“뭐? 청해상단에 사람이 몰리고 있다고?”
“그것도 내로라하는 거부와 권력자가 찾아들고 있습니다.”
“가품이나 찍어내는 상단이 뭐가 대단하다고!”
여인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원목 위에 남은 손자국은 그녀가 무공을 익혔음을 시사했다.
“그게……. 기념품 삼아 가지고 있던 벽조목 보증서를 가져가면 상단에서 책임지고 전량 보상해준다는 것이 워낙 크게 소문이 났습니다. 원래 단순한 변심으로는 환불을 진행하지 않지만, 가품이 나돌며 ‘벽조목 도장’이라는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판단하고 구매자를 위한 특단의 조처를 한 청해상단이 참으로 믿음직하다는 평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여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또 책상을 내리치면 어쩌나, 아니 그보다도 제 머리통을 저 주먹으로 바수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덜덜 떨던 수하는 말을 이어갔다.
“더불어 이번 일이 사기꾼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공표되는 바람에 오히려 동정표를 샀더군요.”
보고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마무리로 진짜 벽조목만을 구해서 유통하는 수완까지 보여줬으니……. 귀한 물건이라면 청해상단을 통하겠다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여인은 몰랐지만, 예결이 노린 건 바로 이 노이즈마케팅이었다.
논란은 덩치를 빠르게 부풀린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말을 옮기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애쓰다가 청해상단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텄다.
“……알았다. 내 갈 곳이 있으니 채비하도록.”
“예.”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었나?
남들이 저를 알아볼 수 없게끔, 비단옷을 무명옷으로 갈아입으며,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그저 딸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혀만 산 사촌 오라비라는 놈의 꼬임에 넘어간 귀한 딸, 당언보를 말이다.
당문여는 일찌감치 가주 경쟁에서 물러났다. 오라비를 위함이라 포장했으나 후계 다툼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심하고 세가의 중추에서 멀어질 생각이었기에 무인도 아닌 사내와 결혼했다.
남편은 강하지 않을지언정 부유했고, 당문여는 살벌한 사천당가 밖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 결혼 생활에서 얻은 결실이 바로 당언보였다. 맹랑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었으나 똑똑하고 재능이 넘치는 딸아이를 보며, 당문여는 과거의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당언보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했으나 어머니의 선택 때문에 앞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의 딸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사촌인 당서악과 손을 잡고 공을 세우기 위해 상단 하나를 집어삼키려다가 그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본인의 계략이 탄로 나자 당서악은 내뺐고, 당문여의 딸은 모든 죄를 짊어진 채 사천당가의 뇌옥에 갇혔다.
‘죗값을 치르겠어요. 어머니.’
우격다짐으로 뇌옥까지 밀고 들어가자, 딸은 그리 말한 뒤 잠자코 눈을 감았다.
오라비의 머리채를 잡아서라도 당언보를 꺼낼 생각이었던 당문여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정작 주동자인 당서악은 저 혼자 살자고 도망쳐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었다. 비록 세가의 명예를 더럽혔다지만 가문의 일원을 보호해야 할 당가는 당언보를 본보기 삼아 과한 벌을 내렸다.
당문여가 보기에 이 모든 건 불합리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그녀의 오라비인 당문길만 해도 아들의 허물을 말없이 감싸주는데 제 딸은 고작 한 번의 실수로 차디찬 뇌옥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나고 자라길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이었던 당문여는 자신이 누리던 직계의 특권을 내려놓은 것을 재차 후회했다.
‘당서악 놈이 잡히기만 하면 그 머리 가죽을 산 채로 벗기고, 계속 내 청을 모른 체 하는 오라비의 귓구멍은 세침으로 뚫어버리겠어.’
시집간 이후 처음으로 문지방이 닳도록 사천당가에 드나들던 당문여에게 수상한 이가 접근했다.
‘따님을 구하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