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하늘은 속여도 에스퍼를 속이면 (7)
“웬 놈이냐?”
당문여 본인도 사천당가의 비전을 익힌 직계일뿐더러 호위무사의 이목까지 뚫고 그녀에게 찾아든 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딸을 구할 방도라니.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직계인 내 피를 이은 언보는 그저 당가 내에서 근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대세가의 직계였던 당문여의 자존심은 지독하게 강했다. 누군지도 모를 외부인에게 딸을 구할 방도 같은 걸 상담할 리 없었다.
상대는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집에서 지내는 것만큼 편안하지는 않겠지요.”
당문여도 차마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당가주는 체면에 민감하지만 실리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까? 귀하게 여기는 누이의 부탁을 들어주고파도 명분이 없으면 나서지 않을 겁니다.”
“명분이라. 그럴싸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누군지도 모를 외부인이 당가의 사정을 다 꿰뚫은 양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당문여는 솔깃한 척 호응했다.
“청해상단을 꺾고, 남편의 상단으로 하여금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상단을 당가에 바친다면 당가주라 한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이라니.”
상대가 짜낸 요악한 지혜에 감탄한 척 옷소매 속으로 손을 숨긴 당문여는 비침을 꺼내 날렸다. 하지만 흑의인은 이를 피하기는커녕, 한 손으로 잡아챘다.
이 같은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을 암기를 낚아챈 남자의 무위에 당문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기습은 실패하면 죽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 선물은 잘 받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건가?”
“당 부인께서는 따님의 근신을 풀어주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당문여는 두 팔을 늘어뜨렸다. 그래, 언보를 생각하면 그녀가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내게 별 볼 일이 없는 걸 보면, 자네는 청해상단의 적인 모양이군.”
흑의인은 이를 인정하진 않았으나 조용히 웃었다. 잠시 후, 그가 속삭였다.
“요새 청해상단에서 재미있는 장사를 하고 있더군요. 한번 들여다보시면, 어찌해야 할지 쉬이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남자는 사라졌다.
한 보름 동안, 당문여는 그날의 일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뇌옥 속에서 수척해져 가는 딸을 볼 때마다 그 사내의 제안이 뇌리를 맴돌았다.
청해상단이 사천에서 얼마나 큰 세를 불리고 있는지는 그녀도 알았다. 남편의 일을 도울 겸 그들의 발목을 좀 잡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그리고…….
‘내 딸을 데려와야지.’
당문여는 남편을 설득했다.
“여보, 우리 딸을 꺼내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당문여는 남편의 상단이라는 패를 들고 당가주를 찾아갔다.
시집간 누이동생이 당언보만은 빼달라고 사정해도 들은 체도 안 하던 그녀의 오라비이자 사천당가의 가주 당문길은 처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었다.
“네가 세가에 그만한 공을 세워 장로들을 설득할 명분을 준다면, 내 조카의 벌을 덜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확답을 받은 당문여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청해상단의 ‘재미있는 장사’라면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에 대단한 조사를 할 것도 없었다. 벽조목으로 만든 도장과 그에 딸려오는 자그마한 보증서.
당문여는 일단 기술자부터 확보해야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염두에 둔 치도 있고. 말이지.’
어릴 적부터 아는 장인이 한 명 있었다.
사천당가에서 암기를 만들던 장인의 제자로, 술과 도박에 약했다. 도박 빚을 갚겠다고 당가의 암기를 만들던 흑철을 조금씩 빼돌리고 그 남은 자리를 싸구려 금속으로 메웠다.
술과 도박을 지나치게 좋아해도 실력이 좋아 당가의 장인 노릇을 하던 사내는 그 사실이 들통나며 쫓겨났다.
이후 뒷골목을 전전하던 장인은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쓰다 손목이 잘릴 위기에 처했다. 내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당문여는 시기적절하게 그를 구해낼 수 있었다.
“아이고 아가씨, 아니 부인. 감사합니다.”
굽신대는 사내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본 당문여가 말했다.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남자는 당문여가 구해온 보증서와 도장을 보고 이를 베껴내기 시작했다. 가짜 보증서와 진짜 보증서를 바꿔치기한 당문여는 이를 뒷골목에 풀었다.
‘됐다. 이걸로 청해상단의 신용은 흔들릴 거야.’
비록 누군지도 모를 자의 꼬임에 넘어가 시작한 일이긴 했으나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상단을 빠져나간 당문여는 성문을 나섰다. 산으로 난 외진 길가에 관제묘가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의 흔적을 지워야겠어.”
“‘우리’의 흔적 말입니까?”
당문여의 말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턱을 긁적였다.
“제 자취는 남은 게 없을 텐데 말입니다.”
“들통나더라도 나 혼자 덮어쓰라는 건가?”
“제 쪽은 아직 드러나면 곤란해서 말입니다. 청해상단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에 조금 흔들어볼까, 하고 나선 건데 이토록 소득이 없어서야…….”
“다른 계책은?”
따지듯 묻는 당문여의 음성에 사내가 경쾌하게 답했다.
“없습니다.”
“참으로 무책임하군. 내가 궁지에 몰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음을 고백하면 어쩔 생각인가?”
남의 손을 빌리는 이들은 보통 직접 나설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당문여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는 몇 번이나 그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당 부인께서는 얌전히 있으셔야 할 겁니다.”
남자가 친절하게 답했다.
“왜? 당가의 심처에서 보호받고 있을 내 딸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끝까지 보호라고 말하는 것은 당문여의 자존심이었다.
이런 치들이 하는 협박은 뻔했다. 조금이라도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이다.
“아뇨. 그보다는…….”
사내가 검집을 가린 천을 치우며 말했다.
“사천당가의 피를 이은 여인이 천마신교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아무래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창으로 들어온 달빛 아래, 하얀 연꽃이 세공된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백련교의 상징이었다.
이를 단번에 알아본 당문여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이미 따님의 앞길을 막았는데 아주 발목까지 잡아 진창에 구르시겠다면야 뭐, 말리지 않겠습니다.”
***
“이대로면 천하삼대상단이다.”
예결은 활짝 웃으며 금고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이 안에는 은자는 물론, 금원보도 가득했고 전표도 들어 있었다. 철전은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
그날이 오면 하량에게 배를 한 척 뽑아줄 생각에 가슴이 벌써 두근거렸다.
예약이 밀려들고 있었다. 지금 청해상단의 장인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의 물량이다. 벽조목 도장이 가품이라는 말이 나돌면서 그 값어치가 떨어졌다고 노발대발하며 환불을 요청했던 몇몇 ‘진짜 고객’은 아예 새 도장을 파러 오기까지 했다.
이 주문을 다 소화하면 배가 미어터질 지경이 되더라도 욕심 많은 예결은 죄 삼키고 뒤뚱뒤뚱 굴러다닐 요량이었다.
‘뭐, 이제 새 장인도 잡아 올 테니까.’
범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삼랑이 성큼 다가와 예결에게 말했다.
“흑점의 사천지부장이 왔습니다.”
“어서 들여보내.”
구름 위를 걷는 듯 움직이는 하량과 달리, 흑귀의 걸음은 묵직하게 느껴졌다. 익힌 무공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을 연기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대사형이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속았을 거 같은데.’
“어서 오세요.”
예결은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환대했다. 청해상단의 하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차와 다과를 내왔다.
흑귀와 마주 앉은 예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후는 알아냈나요?”
안부나 인사치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음에도 흑귀의 낯에는 불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올리지도 않은 그가 입을 열었다.
“당 소저를 기억하십니까? 당서악과 보조를 맞추던 그의 사촌누이 말입니다.”
“아. 당언보.”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친인 당문여가 저지른 일이라더군요. 청해상단 때문에 제 딸의 앞길이 가로막혔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겸사겸사 남편의 상단을 키워 당가주에게 바치고, 딸의 선처를 부탁할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하량의 말에 예결은 깊이 탄식했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중원은 은원으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걸 떠올리게 되네요.”
유해한 독제비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선보이는 가증에 하량은 그의 손등을 다독였다.
“문 공자의 탓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결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위조 기술자를 추적해서 범인을 알아낸 거지요?”
“예. 사기꾼이 워낙 많은지라 흑점을 거치지 않은 위조 기술자도 몇 찾아냈습니다. 전부 감시를 붙여 드나드는 이들을 살폈지요. 개중에 당문여의 이력이 특이해서 바로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특이한 이력?”
“청해상단에서 벽조목 도장을 구입한 ‘진짜’ 구매자가 위조범을 만나러 갔으니까요.”
하긴, 당문여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벽조목 도장을 구입할 재력은 차고도 넘칠 것이다.
이를 나쁜 일에 써먹었다는 게 문제지.
“그럼 장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확보했습니다만……. 포장에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나쁜 물이 들었더군요.”
영혼까지 세탁해서 가져올 것 같은 발언이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좋아요. 되도록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네요. 이번 일로 청해상단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주문이 밀려들어서요.”
“포장 속도를 높여야겠군요.”
“……괜찮을까요?”
“결자해지라고, 본인이 저지른 일은 본인이 수습해야지요.”
일을 저지른 건 당문여와 그 기술자일지언정 일을 키우자고 한 건 예결이고 일을 키운 건 흑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뻔뻔하게도 저쪽으로 탓을 미루는 데 양심의 가책 같은 걸 전혀 느끼지 않았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다.
“그럼……. 슬슬 정산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