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1)
유능한 동업자에서 냉혹한 빚쟁이로 변모한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결은 짐짓 긴장한 척 낯을 굳혔다. 어차피 상대가 무얼 요구하든 엉망진창으로 놀아날 의향은 충분했다.
“말씀하시지요.”
적당히 뜸을 들이는 것만으로 주도권을 낚아챈 사내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괜찮은 인재를 소개해 드린 것부터 셈해볼까요.”
애초에 공짜로 소개해준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원에서 제일가는 빚쟁이가 될 거라는 즐거움을 속으로 삭이며 예결은 애써 몸을 꼿꼿하게 세워 흑귀의 입을 바라봤다.
“문 공자가 사건 해결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면서도 포쾌에게 개인적인 빚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전도유망한 포쾌인 만큼 향후 사천 성도에서 흑점이 운신할 때 그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겠지요. 흑점의 간부로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흑귀는, 제하량은 더할 나위 없이 진심으로 보였다.
“그, 그렇습니까?”
예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일에 참여한 보람이 있더군요.”
하량의 말에 기대가 와장창 무너졌다.
이제 흑귀가 그에게 빚을 지우고 곁에 옭아맬 차례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틀린 건가?
“하지만 사기꾼을 모으기 위해 소문을 내느라 품이 상당히 들지 않았나요?”
예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하량의 저울 위에 인건비를 올렸다.
‘중원 천지를 뒤져도 빚을 지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은 나뿐이겠군.’
심지어 상대는 생과 사조차 거래한다는 흑점의 간부였다.
“아, 그것 말입니다.”
마침 잘 말했다는 듯 흑귀가 고개를 까딱했다.
“흑점의 감시망에 없던 이들도 더러 모여들더군요. 그 사기꾼들을 역추적해 흑점의 뒤에서 장사하고 있던 장물아비를 여럿 찾아냈습니다.”
불길했다.
예결은 흉터가 아로새겨진 흑귀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그의 선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잔챙이라고 생각하고 내버려둔 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상당히 세를 불리고 있더군요. 놈들을 쫓다가 한동안 흑점의 골을 썩인 점조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뭐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깨진 구멍으로 드나들던 쥐새끼를 일망타진했으니……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이득을 봤습니다.”
빚을 지러 왔는데 상대는 되레 자신이 돈을 빌렸으니 오히려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예결은 뻔뻔하기 짝이 없는 흑귀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흑귀에게 잔뜩 빚을 질 작정으로 이 자리에 섰는데, 이래서야 낭패가 따로 없었다.
“저를 놀리시는 게 아니라면, 흑점이 정말 이문을 남겼다는 건가요?”
“장사치는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사치가 세 치 혀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빤히 아는 예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장 그가 보고 있는 얼굴도 거짓이 아닌가.
‘정말 상인인 것도 아니잖아.’
모르긴 몰라도 대사형의 정체성 중 구 할 구 푼 구 리는 무림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침을 뚝 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약이 절로 올랐다.
‘흑귀의 모습으로는 선을 그으실 생각인가? 아니, 그런 거면 사천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반응이 설명이 안 되는데?’
예결의 머리가 핑핑 굴러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들 하는데, 오늘따라 영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 공자의 수완이 너무 좋아서 흑점이 망하게 생겼습니다.”
흑귀가 능청스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결은 나름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으나 울상을 완벽히 숨기긴 어려울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장사를 너무 잘해도 문제였다.
그때, 하량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빚을 갚으려면 분발해야겠군요.”
갈팡질팡하던 예결의 귀에 상투스가 울려 퍼졌다. 희열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사내가 예결의 손을 슬쩍 붙들고 끌어당겼다.
주춤 끌려간 예결은 손끝에 스치는 옷자락과 그 벌어진 틈 사이로 보이는 살결에 저절로 시선이 꽂혔다.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아니라고 말하느니 차라리 혀를 뽑을 것이다.
잠시 망설인 예결은 그 옷깃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흑귀의 가슴을 만졌다. 원래의 하량만큼은 아니라도 이쪽 몸 역시 제법 탄탄했다.
은근슬쩍 스며드는 가이딩이 가뭄의 단비처럼 그를 적셨다. 너무 좋아서 어질어질했다.
“……당신이 내게 색사의 즐거움을 가르쳐 줬으니까요.”
예결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는 태도가 보는 이를 충동질했다.
“문 공자는…… 지나치게 명민한 제자로군요.”
흑귀의 속삭임에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비록 말로 표현한 적은 없으나 백양진인은 예결을 볼 때마다 눈으로 세상에 이런 깡통이 없다는 듯 한심하게 봤다.
열심히 수련에 매진해도 사부님의 눈에 드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연무장에서 하루를 보내던 어떤 날에는 어린 사제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흘리듯 내뱉고는 킬킬댄 적도 있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예결이 눈을 내리깐 채 속삭였다. 백양진인에게 흙탕물을 끼얹을 의사는 충분했으나 괜히 그의 이름을 꺼냈다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많이 듣게 되실 겁니다.”
하량의 입술이 예결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등허리를 지그시 받치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예결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하량의 키스에 호응했다.
치열을 훑고, 잇새 사이로 들어와 입천장을 비비는 혀의 감촉이 말캉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일부러 호흡을 빼앗는 사내 때문에 코로 숨을 쉬어야 했던 예결은 헐떡거렸다. 어깨를 짚은 채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대사형은 다른 손으로 예결의 뒷머리를 감쌌다.
마침내 길고 긴 접문에서 놓여난 예결은 숨을 헐떡였다.
차라리 여기가 물 속이라면 삼 분 정도는 너끈히 숨을 참을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량과 함께 있을 때면 그게 어려웠다. 하량의 손 아래서 그의 신체는 너무도 쉽게 통제에서 벗어나 버린다.
‘어쩌면 가이드는 백신이 아니라 바이러스일지도.’
에스퍼 같은 괴물은 연소 끝에 사라지는 게 좀 더 자연스럽다.
인류의 영웅이니 어쩌니 하는 번지르르한 말을 가져다 붙여도 결국 돌연변이 아닌가.
그런 이들을 강제로 세상에 붙들어놓는 건 치료가 아니라 오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땅히 그래야 할 연산값을 전부 어그러뜨리고, 한 가지 결과만 계속 출력되게 만드는 그런 바이러스.
예결이 아는 모든 에스퍼는 고장 나 있었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배가 부르니 별생각을 다 하게 되는군.’
흑귀는 그를 의자에서 안아 올리더니 책상 위에 앉혔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동당거렸다.
장포를 벗은 흑귀는 예결의 등 뒤에 펼쳤다. 상대가 바투 다가선 순간 예결은 잠시 숨을 참았다.
홑옷 차림이 된 하량의 몸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제가 좋은 제자라면……. 흑귀 님은요?”
잠시 미간을 좁힌 흑귀가 능청스레 웃었다.
“저야. 최악의 스승이지요.”
“왜요?”
예결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입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너무 오랫동안 저를 찾아주지 않으시길래…….”
사내의 두 손이 예결의 다리를 벌렸다.
“홀로 달래는 법을 알려드린 걸 후회했지 뭡니까.”
예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아연한 낯을 한 예결의 손가락을 핥아 올렸다.
질척한 소리며 말캉한 감촉에 허리가 절로 들썩였다. 예결은 울 듯 말 듯 젖어 있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거절을 읽지 못한 하량은 예결의 손가락을 입 안 깊이 넣고 부러 츱, 츱 하는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말캉한 혀의 감촉이, 덥고 습한 입 안의 감촉이 예결을 자극했다.
고작 손가락 하나 내어줬을 뿐인데, 한창 정사를 나눌 때처럼 음란하고 질척한 소리가 났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사파 무인의 얼굴을 하고, 순종적으로 눈을 내리깐 그의 가이드가 예결의 손가락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이제 그만…….”
예결이라고 뭐 그만두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면 힘 조절을 해야 한다는 걸 잊고 흑귀의 옷을 찢어버릴 것 같았다.
조금쯤 실랑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결에게는 뜻밖에도, 흑귀는 순순히 예결의 부탁을 수용했다.
“놓아주셨네요?”
“문 공자에게 갚아야 할 빚이 태산 같은데, 싫어하는 짓을 했다가 내쳐질 생각은 없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입을 열어 예결의 손가락을 놓아준 흑귀가 그 끝에 가볍게 입 맞췄다.
“분발하겠다고.”
간지럽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얼굴을 붉히게 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예결을 바라보는 흑귀의 낯에 보일 듯 말 듯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예결은 대사형이 저런 식으로 웃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원래 얼굴로 저렇게 웃으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기대되네요.”
그 말에 흑귀는 제법 정중한 미소를 짓더니 예결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반동에 일부러 저항하지 않은 예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
하량이 하의를 벗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 하고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예결은 맨살에 와 닿는 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
상의도 신발도 버젓이 신고 있는데, 아래만 벌거벗은 채 그의 시야에 내놓은 것이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예결의 둔부를 잡아 벌린 흑귀가 중얼거렸다.
“손가락을 적실 때만 해도 스스로 넓혀보라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제가 상당히 몸이 달아 있었던 것 같군요.”
숫제 독수공방당한 새신랑의 원망 같았다.
“지금 제 것 말고 다른 게 들어가는 걸 보면 화가 날 것 같습니다.”
예결은 짜릿함에 신발 속 발가락이 곱아드는 걸 느꼈다.
무릎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댄 사내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떼어냈다. 그는 손으로 예결의 하문을 잡아 벌리며 속삭였다.
“손가락은 안 된다고 하셨으니 여기는 허락해 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