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4)
몇 번의 혼절과 몇 번의 깨어남을 반복하는 동안, 정신이 닳아 없어진 것 같았다.
처음엔 자신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풀릴 대로 풀어진 비부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던 성기를 잘도 삼키고 뱉었다.
“깨어, 나셨군요.”
욕망이 섞인 숨결이 귓가에 닿아 예결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왜 이렇게 어둡지, 같은 멍청한 생각을 한 후에야 여전히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닫고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를 엉망으로 쑤석거려 놓은 쾌감은 착륙이 무언지 모르는 새처럼 계속 고조되기만 할 뿐이었다.
뺨은 어느새 젖어 있었다.
하량은 예결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핥으며 속삭였다.
“자, 눈을 뜨셔야지요.”
그러나 예결은 눈을 감은 채 도리질했다. 분명히 안대를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이렇게 눈을 뜨라 종용하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잘도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무도한 짐승은 밤새 희롱한 몸 위를 굽어봤다.
채 사라지지 못한 손자국이, 순흔이 마치 피어나기 전의 꽃봉오리처럼 옅은 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위를 꾹꾹 덧그리면 어떻게 피어날지 잘 알기에, 저절로 갈증이 일었다.
“어서 눈을 뜨고 예서 도망가셔야지요.”
하량은 제 사제를 채근했다.
“으흑! 읏!”
아래를 거칠게 꿰뚫는 몸짓에 예결의 입술에서 신음이 절로 샜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언젠가 끝날 거라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손바닥 위에 제 손을 겹치는 사내가 귓가에 더운 숨을 속삭였다.
“다신 침상에서 일어날 일도 없이 영영 주저앉히려 하면 어찌하시려고.”
그 몸서리치게 하는 감각과 맞물린 속삭임에 등허리에 오싹함이 스쳤다.
예결은 야금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을 줬다.
구겨진 천에서 드러나는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하량의 두 손이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아왔다. 그러나 다정한 것은 그의 손길뿐이었다.
“아흐, 흐아, 읏!”
예결은 잠든 척 시늉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신음을 내뱉었다.
“혹시 압니까? 지금이 도망칠 마지막 기회일지.”
도망칠 것을 종용하면서도 바투 달라붙은 몸을 물리려 들진 않는다. 무게를 실어 예결을 압박하면서도 양껏 비부를 탐했다.
잠들어 있을 때보다 깨어 있을 때 더 생생한 예결의 반응은 하량으로 하여금 고삐를 놓게 만들었다. 자제심일랑 욕망에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
그렇게 예결은 하량의 몸짓에 흔들리며 잔뜩 젖어 있는 신음을 내뱉었다. 두 번의 절정에 오른 뒤 그는 혼절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 가장 처음 한 생각은 그거였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가이딩 오버플로우 같은 학술용어 만들어 내라고 교수 몇 찾아서 연구비 지원해주는 건데.’
가이딩 과다로 기절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논문을 쓰게 만들고 센터에서 만나는 에스퍼 선배한테 전부 돌리는 거다.
정작 돌아갈 생각도 없으면서 이상한 상상을 한 예결은 배실배실 웃었다. 하량은 예결의 뺨을 몇 번 쓸어보다가 아래를 벌렸다. 그가 안에 쏟아냈을 정액이 다리 사이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등 뒤가 제법 푹신한 걸 보면 혼절한 사이 업무 용도의 밀실에서 침실로 옮겨진 것 같기도 했다.
“상단은……?”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토록 교성을 내지른 데다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무언가 차가운 도기가 입술에 와 닿았다.
“물입니다.”
꼴딱꼴딱 받아마시다가 사레가 들린 예결은 켈록거렸다. 이런, 하는 중얼거림이 들리더니 그가 등을 두드려줬다. 어느 정도 기침이 잦아들자 하량이 입을 맞췄다.
왜 이러나 했는데, 하량의 입술이 물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입에서 입으로 물이 넘어왔다. 이번에는 사레들리는 일 없이 한 잔을 무사히 비우자 하량이 예결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좋은 수하를 두셨더군요.”
욕하면서도 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삼랑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정작 자신이 시키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을 삼랑이 하량의 명에 꼼짝도 못 하고 열심히 일했을 게 분명했다.
예결은 하량이 몸을 씻겨주는 동안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원래도 몸을 종종 씻겨주긴 했으나 갈수록 능숙해지는 것 같았다. 초반에만 해도 부족한 기술을 힘으로 대신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젠 예결의 몸이 흐느적거려도 능숙하게 제 몸으로 받치고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마저 좀 더 요령이 생겼다.
‘나 혼자 운우지락을 나눈 것도 아닌데……. 너무 대사형만 일하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긴 했다. 다른 가이드들은 에스퍼의 체력을 못 따라온다던데, 대사형은 무림인이라 그런지 오히려 예결이 따라가기 힘들어서 자꾸 기절했다.
때마침 샅 사이로 파고드는 손길에 예결이 몸을 움찔 떨자 웃음기 섞인 흑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더 안 건드리겠습니다.”
안심했다는 듯 슬쩍 기대니 그가 예결을 탕옥 같은 곳으로 데려가 몸을 정성껏 닦아주었다. 눈도 가려진 데다가 사지를 쓸 수 없어서인지 갓 태어난 새끼 양이 된 기분이다.
‘아니지.’
최소한 새끼 양은 태어나자마자 네 다리로 서기라도 하는데, 예결은 그조차도 해낼 수 없었다.
보송보송하게 물기를 싹 닦아준 하량은 예결을 침상에 눕혀주며 속삭였다.
“더 주무십시오.”
그렇게 밤이 왔던 것도 같았다.
깨어났을 때는 어둠이 사위에 가득했다. 이번엔 마냥 안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량이 일부러 느슨하게 걸쳐 놓았던 안대가 예결의 얼굴 위에서 슬그머니 흘러내렸다. 벗으려 한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덜컹 떨어져 내렸다.
고작 한 뼘 거리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잠든 이의 규칙적인 호흡이.
한 침상 위에 누워 요 하나를 나누어 덮은 이의 존재감에 예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예결은 자신을 끌어안은 이의 손등 위를 더듬었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을.
‘대사형…….’
지금 눈을 뜨면 흑귀의 진정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결의 눈꺼풀에는 아주 자그마한 미동조차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란히 누운 이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맞닿은 살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제 몸에 두른 팔의 무게가. 어지러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의 감촉과 하얀 눈과 닮은 체향이.
신화 속 프시케의 기분이 이랬을까.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왕녀는 상대가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하고 상냥하게 대하자 마음을 놓았다. 어두운 밤에만 찾아오는 프시케의 남편은 프시케에게 무엇이든 허락해준다.
단, 그의 얼굴을 보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제법 하량과 예결의 상황과 비슷했다. 단 하나, 프시케가 자매들의 꾐에 넘어가 남편의 얼굴을 훔쳐본 것만 빼고.
‘처음 그 신화를 들었을 때는 아둔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한 뼘 거리에 하량의 숨소리와 마주 누운 예결은 프시케의 선택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공포나 의심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안다.
이 밤을 함께 두른 이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더 깊이 닿고 싶어 몸달아 아팠던 고통임을.
‘하지만 나는 절대 보지 않을 거야.’
예결은 고집스레 눈을 감았다.
프시케가 떨어뜨린 촛농에 데어 깨어난 그녀의 남편은 괴물이 아니라 사랑의 신이었다.
에로스는 그녀의 배신에 괴로워하며 멀리 떠나버렸다.
예결은 하량에게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에로스가 느낀 건 배신감보다는 두려움 아니었을까.’
내내 상대를 속여왔다는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으니 그 결과를 마주하기 무서워 달아난 것일지도.
숨죽여 하량의 손에 뺨을 기댔다.
불현듯, 밤을 가르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 사내를 찾지 않으시더군요.”
예결의 어깨가 움찔했다.
‘깨어 계셨나.’
어둠을 너울처럼 두른 탓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다는 핑계는 거짓 위에 쌓아 올린 관계에 일말의 진솔함을 불어넣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땀으로 젖은 등 위에서 떨어지는 나긋한 속삭임이 예결을 압박해왔다. 잠들어 못 들은 척하기엔 마주 닿은 두 사람의 숨소리는 너무도 깨어 있었다.
긴장으로 결이 달라진 호흡을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한 예결은 마침내 속삭였다.
“욕망이…… 현실이 되어버릴까 봐.”
하량은 침묵했다.
당사자 앞에서 자신이 누굴 좋아하는지 들통난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하량 앞에서 본성을 숨길지언정 욕망을 숨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현실이라.’
하량은 예결의 말에 동요했다.
그는 사제를 평소보다 가혹하게 희롱했다. 탕옥에서의 일이 있었음에도 흑귀에게 몸을 맡기는 예결의 심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빚을 졌다는 말에 사제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안겼다. 하량은 기쁨과 섬뜩함을 동시에 느꼈다.
제게 몸을 내주었음에도 예결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하여 예결을 몰아붙였다.
원한다는 말 한마디면 선뜻 그 손에 잡혀줄 텐데, 일부러 손을 끊어낸 이와 다시 몸을 섞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지금 그 답이 하량의 눈앞에 있었다.
‘내가 다가간 것이 두려웠나.’
웃음이 나왔다.
계속 대사형이라 불러도 되냐는 질문이며 다른 사내에게 안겨드는 이 순간마저도 예결의 심중에는 하량이 있었다.
‘이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면.’
뱀처럼 예결의 몸 위를 휘감아 오르던 손에 흉터가 생겼다. 덩치는 왜소해졌으나 단단하고 옹골찬 근육이 그 몸에 들어찼다.
맨손으로 범을 잡는다 해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협적인 육체였다.
‘흑귀를 네게 주마.’
허공섭물로 잠시 벗어두었던 인피면구까지 가져와 얼굴에 씌운 하량이 예결에게 속삭였다.
“문 공자만의 욕망이라 생각하는 게 우습군요.”
침의 위로 은근히 문질러오는 손길에 야릇한 함의가 담겨 있었다.
“침상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나 아래를 흠뻑 적신 문 공자의 모습을 보면, 어느 사내든 당신을 탐하려 들 텐데.”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슬쩍 가슴을 밀어내며 몸을 뒤로 빼려 들자, 흑귀가 예결의 손을 붙들고 끌어당겨 그를 품에 안았다.
마치 감옥처럼 저를 옥죄는 몸짓에 예결이 갑갑함과 안정을 동시에 느낄 때였다.
“제게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