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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59화 (159/203)

159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5)

“무슨 뜻이죠?”

예결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을 돌아보지도 않을 사내는 버리고 제게, 오로지 제게만 안기라는 겁니다.”

하량은 손장난이라도 치듯 예결의 눈 위를 툭, 건드렸다. 예결은 그 거칠어진 감촉에 그가 다시 흑귀의 모습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제하량이 아닌 흑귀가 어둑한 밤을 두른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무어라 말하려 하자, 흑귀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성감을 자극했다. 채 가시지 않은 정사의 여파 탓에 아릿한 달콤함이 아랫배까지 번졌다.

“제법 잘 맞지 않습니까?”

“몸을 나누는 관계라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요?”

“그 이상을 원하는 겁니다. 문 공자의 밤뿐이 아니라 낮까지도 차지하고 싶으니까요.”

업무 시간에 저를 홀라당 잡아먹은 사내가 낮까지 차지하고 싶다는 말에 예결은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하루 정도는 너끈히 지났을 텐데…….’

예전에는 몰랐는데, 대사형은 은근히 뻔뻔했다.

“청해상단을 크게 키우고자 하셨던 것 같은데, 그쪽으로도 제법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예결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 벽조목 도장처럼 상단에 문제가 생겨도 남들보다 한발 빨리 알려드리고, 해결에도 한 손 거들어 드릴 겁니다. 비단 사천이 아니라 중원 어디에서든 흑점은 문 공자를 비호할 겁니다.”

그 말은 숫제 흑점이 흑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예결은 하량이 청해상단에 이어 흑점까지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천하제일상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 하필 강호에 들어와서 이렇게 고생을 한 건가?’

전생에는 하량이 사업을 잘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흑귀 님은……. 사천지부만 거느리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글쎄요.”

은은하게 웃는 낯에서 여유로움이 배어 나왔다.

“그렇게 아낌없이 주시면서 제게 원하는 건 고작 독점적인 관계뿐이라고요?”

예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흑귀가 여상한 투로 답했다.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알아서 챙겨갈 겁니다.”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었다. 있어도 반박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대답 아닌가.

“그러니 문 공자는 오롯이 스스로만 생각하고 제게 답을 주시면 됩니다.”

바투 다가와 몸을 기울인 사내의 입술이 귓바퀴를, 눈가를, 콧잔등을 가볍게 스쳤다가 떨어졌다.

예결은 소금 석상이 된 양 가만히 그의 입맞춤을 기다리다가 하량이 정작 입술 위는 건드리지 않은 채 물러나자 아쉬움을 느꼈다.

이러기를 의도한 것처럼 감질났다.

분명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예결의 입장만을 고려한 것처럼 나열된 조건들. 숨겨진 독소 조항을 찾아봤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예결이 가장 잘 알았다.

그나마 여기에서 상대가 덮어놓은 패라곤 단 하나, 스스로의 정체뿐이다. 심지어 예결은 그마저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게 어느 수상한 사파 무인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대사형 제하량임을.

만약 상대가 평범한 가이드였다면 예결은 기꺼이 기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눈 가리고 아웅일지언정 흑귀의 제안에 응하면 평생 가이딩이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예결은 한 걸음 물러난 채 자신의 선택을 지켜보는 이를 원했다.

제하량을 가질 것이다.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예결의 낯에 미안함이 서렸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진영이 그랬다. 마교로 끌려간 대사형은 마공을 익혔고, 또 사문에서 파문당했다고.

행간은 많이 생략되어 있었으나 그렇게 되기까지 하량이 겪었을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어렴풋하게나마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살만해진 하량에게 그의 모든 것을 내놓으라 덤비는 사제는 재앙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면 떨쳐내기라도 하지, 예결은 에스퍼였다.

“죄송합니다.”

예결의 진정을 느꼈는지 흑귀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아쉽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내의 얼굴에는 오히려 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 단호하게 거절하며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제가 이대로 당신을 납치해 가둬도…… 당신의 대사형은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기는. 같이 있어 줄 거면서.

“한참 지난 후에야 암시장을 통해 팔려 간 정황을 캐내고 당신을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음에 절망하겠지요.”

“안 그러실 거잖아요.”

예결은 흑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량이 이쪽을 정리할 생각이라면 아마 저 얼굴은 당분간 만나지 못할 테니 오래 보아둘 생각이었다.

나름 정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건 결국 한 명이었으니까.

“못 당하겠군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은 흑귀가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선 사내가 물었다.

“대사형이라는 자가 문 공자의 속내를 알아채고 내치면, 그때는 제게 기회가 있습니까?”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예결에게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거리를 유지했다.

“집요하시군요.”

거듭된 거절로 말미암은 수치심이나 분노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의 공통점이지요.”

그의 시선은 어서 답할 것을 종용했다.

“대사형에게 내쳐진다면…….”

예결은 웅얼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흑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것이 여지를 남기는 행동인지 아니면 다른 함의가 있어서인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다음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나.

가이드를 대하는 에스퍼의 태도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달랐지만 가이드에게 버려진 에스퍼의 결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다.

파멸.

예결은 중원에서 하량 말고 다른 가이드를 발견하긴 했으나 딱히 그쪽으로 갈아탈 수 있으리라 낙관하지도 않았다.

다른 가이드와 매칭해볼 수 있어도 실제로 시도하는 에스퍼는 드물다. 가이드를 상실한 시점에서 대부분 죽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죽거나, 아니면 오래 고통받으면서 죽거나.

예결은 자신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흑귀는 예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간 예결은 채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복도를 살폈다.

흑점의 어둠 속에서 만난 사내는 그림자와도 같아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채였다. 실제로 그는 제하량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천천히 문을 닫은 예결은 그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채 괜히 불안감이 도지려 드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잘했어. 잘한 거야…….’

제 가이드는 자신을 떠난 게 아니다. 이건 온전히 서로를 마주 봐야 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과정이지 이별 따위가 아니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에는 불합리한 걱정이 차오른다. 가이드는 이렇듯 무서운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전생에 그렇게 헤어져 놓고 이십 년이나 돌아 돌아 만나야 했다는 사실이 트라우마처럼 저를 짓누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결은 몇 번 마른세수를 한 후 몸을 일으켰다.

물로 한 번 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상념이 사라진 얼굴은 단정하고 평온하게만 보였다.

다시 태어나고야 생긴 부모님에게 미치광이처럼 보이지 않으려 거울을 보며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삼랑부터 찾아볼까나.’

***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이시군요!”

시야가 온통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몸에 와 닿는 공기는 따갑기만 했다.

‘여긴 어디지?’

분명히, 나는 대사형에게 향하는 검을 막고…….

‘죽었지.’

팔다리를 휘저어도 무언가에 닿는다는 감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게 움직일 수 있는 사지가 있는 게 맞는 걸까?

주변은 이해할 수 없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중에 유일하게 구별 가능한 건.

‘울음소리.’

그리고 그건 제 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비명을 지른 것처럼 기력이 쇠잔했다. 제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닫고 이를 갈무리하려 애썼으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마공에 당해서인가?’

마교의 마두가 쓰는 마공은 하나같이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환각을 보여주는 건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어쩌면 비겁한 놈들답게 칼끝에 독을 발라서 죽기 전 마지막 환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빨리 죽고 싶은데.’

죽음이 이토록 무력한 것일 줄 몰랐다. 예결은 사지를 늘어뜨리고 최대한 힘을 풀었다.

그렇게,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시간도 짐작할 수 없고 오로지 소음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지내는 동안, 습관적으로 눈을 깜빡인 예결은 멈칫했다.

처음으로 눈이 떠졌다.

뭔가 검고 하얀 것들이 보였다. 죽으면서 눈이 멀기라도 했는지 윤곽만을 어슴푸레 짐작할 따름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예결의 위에서 중얼거렸다.

“아기 따라 눈 뜨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래도 일주일 만에 눈을 떴네. 고마워라.”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처음엔 소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들이 나름 대화 비슷한 걸 주고받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

“아니 그래도. 다른 애들이 다 눈 뜨고 그럴 때 우리 애만 늦어지면 괜히 걱정되잖아. 미안하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아주 튼튼하고 건강하다고.”

“맞아. 날 때부터 효자네.”

예결은 이제 자신이 마공의 환상에 갇힌 게 아니라 사후세계로 온 게 아닐까 의심 중이었다.

“출생신고서는 다 작성했고?”

“응. 이름도 꼼꼼히 확인했어.”

“다시 확인해 봐. 오빠가 좀 덜렁대야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들 이름인데 내가 세 번이나 봤지. 여기 잘 적혀 있다니까. 예결. 문예결.”

“아휴. 든든하네.”

저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가운데 웃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래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면 지옥은 아닌가?

“헉. 이쪽 본다.”

“안녕. 예결아.”

좀 더 부드럽고 가는 소음을 내는 존재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야.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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