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6)
“아.”
덜컹거리는 감각에 예결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꿈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표정이 안 좋구나. 잠자리가 불편했니?”
한 폭의 산수화처럼 곁을 지키고 있던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좀 악몽 때문에요. 대사형은 언제 옆으로 건너오셨어요?”
하량이 예결의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네가 꾸벅꾸벅 졸다가 마차 벽에 머리를 박을 것 같기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예결이 기대고 있던 단단한 것은 마차 벽이 아니라 하량의 어깨였다. 침을 흘리진 않았나 하고 황급히 입가를 훔치는데 하량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옷에 딱히 자국 같은 건 없는데.’
안도 반, 미심쩍음 반 섞인 시선으로 하량을 올려다봤다.
마차는 제법 넓은 편이었으나 그래봐야 마차의 한계는 명백했다. 바투 붙어 있으니 하량의 속눈썹을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처럼 가까웠다. 예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하량이 손을 뻗었다. 예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식은땀이 났구나.”
목덜미 위로 부드러운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옷소매로 식은땀을 훔쳐준 하량이 예결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무슨 꿈을 꾸었길래?”
“그냥, 옛날 꿈이요.”
대충 얼버무린 예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어쩐 일로 서녕성까지 오셨어요?”
사천에서 흑귀와 결별한 예결은 남은 일을 정리해서 청해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다소 이른 귀환이었으나 핑계야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이를테면 선예공방과 정식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사천이 아닌 청해에서도 한 발 뻗고 있을 벽조목 보증서 사기꾼을 추가로 찾기 위해서라든가.
요는 예결이 도망치듯 사천을 떠나는 데 있었다. 그래야 흑귀와의 일 때문에 예결이 심란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예결은 서녕성의 청해상단 본부에서 하량을 마주쳤다. 그는 이렇게 마주친 김에 함께 돌아가자며 예결을 붙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결은 하량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퇴근당한 줄도 모르고 그저 헤실헤실 웃으면서 하량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든 것이다.
‘역시 가이드 곁이라 그런지 잠이 잘 오네.’
한국에서는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해 고생했다. 불면증 단계까지 접어든 건 아니었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곤 했다.
그런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잠들 줄이야.
“별다른 일은 없었단다. 그저.”
하량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결이 네가 곁을 떠나 있으니 쓸쓸하더구나. 한동안 붙어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항주에 다녀오면서 퍽 오랜 시간을 붙어 있긴 했다.
“북적북적한 곳으로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하여 서녕으로 나들이를 나왔단다.”
“아…….”
“네가 오늘 돌아올 줄도 모르고 마중을 나온 셈이지.”
그리 덧붙인 하량이 활짝 웃었다.
“재미있는 우연 아니니?”
예결은 잘난 혓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양 멍해졌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 아니냐는, 멍청한 플러팅 대사 같은 것만 생각났다. 이걸 입에 담느니 혀를 깨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이 기다리고 계신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왔을 텐데.”
한 손에 턱을 괸 채, 예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신기하지. 스무 해를 혼자 보냈는데 이제 와 외로움을 느낄 줄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예결의 귀에도 충분히 들렸다. 예결은 뱀뱀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옷소매 위를 어루만지며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이 좁은 마차 안에서 하량의 위에 올라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공들인 탑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저를 보는 하량의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고지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마차가 멈추어 섰다. 심상찮은 기척을 느꼈음에도 예결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장원에 도착했나요? 아직 서녕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밖에 마부 외에도 스무 명쯤 되는 인간이 느껴졌다.
역시 산적일까? 아니면……?
‘삼랑이 있으면 알아서 해결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 삼랑은 예결 대신 서녕에 남아 상단 일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쉬이.”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기울인 하량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하량의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예결은 그가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했다.
긴장 아닌 긴장으로 예결의 몸이 뻣뻣해지자 이를 알아챈 하량이 미안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예결의 콧잔등을 쓸어주었다.
덥고 습한 숨이 하량의 손아귀에 갇혀서 그 안을 맴돌았다. 예결은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쾅!
무언가가 머리 바로 옆의 벽을 뚫고 안으로 날아왔다. 하량은 마차 너머에서 무슨 작당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를 대번에 낚아챘다.
마차의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은 철시(鐵矢)였다. 안에 탄 사람을 노리고 날아왔을 철 화살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하량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반으로 부러졌다.
예결은 하량의 손에 붙들린 철시를 관찰했다. 그 끄트머리가 일반적인 화살촉과 달리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낯선 모양새만 봐도 중원에서는 잘 쓰지 않는 형태임을 알 수 있었다.
‘구조가 저래서 마차 안까지 들어온 건가?’
거기에 내공이 부리는 조화까지 더해지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량이 갑작스레 문을 걷어찼다. 안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바투 다가와 있던 살수가 문짝에 얻어맞고 뒤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하량은 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검은 궤적의 뒤로, 붉은 안개가 피어났다. 동료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살수는 뒤로 물러나려 들었으나 하량은 사냥감이 자신의 간격에서 벗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살수의 몸은 하량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불에 몸을 내던지는 부나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에스퍼 특유의 빼어난 동체시력으로 하량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예결은 상대가 달려든 것이 아니라 끌어당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분명 곤륜의 것은 아니야.’
한때 구름 사이를 노닐던 용은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생과 사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지금의 하량이 내리긋는 검 끝에는 자비도 없고 협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정한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흐억, 헉.”
가장 마지막까지 버틴 살수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숨소리마저 내지 않을 정도로 훈련받았던 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하량이 검 끝으로 상대의 턱을 건드렸다. 반항할 의지조차 잃은 채 몸을 뒤틀던 살수의 눈이 한순간 붉게 물들었다.
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옷이 뜯어져 나가면서 놈의 몸이 부풀었다. 보기에 퍽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흉흉하게 커진 근육이 보였다. 기존의 모습에서 덩치와 키 모두 거의 한 배 반은 커진 살수의 두 눈은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둑한 숲길 속에서도 선득하게 빛나는 그 눈은 사냥감을 찾아 헤매며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렀다.
강화계 에스퍼가 힘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기괴하게 비틀린 느낌이었다.
예결은 바삐 하량을 살폈다. 자신이야 에스퍼니 시청각 자료로 게이트에 등장하는 몬스터 등을 접한 적이 있다지만 평범한 중원인인 대사형은 놀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하량은 한 발짝 물러나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변신할 시간을 주면 어떡해요…….’
마법 소녀가 변신하기 전까지 기다려주는 악당도 아니고.
대사형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별개로 예결은 심란해졌다.
충분한 시간을 준 덕에 변신을 마친 살수는 짐승의 것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덩치도 얼마나 커졌는지 평균 이상의 장신이라 어딜 가나 위압감을 주는 하량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큰 것 같았다.
예결은 변신한 살수가 하량을 향해 달려드는 걸 보고 손에 힘을 줬다. 만약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개입할 요량이었다.
하량은 상대의 공격이 앞에 쇄도할 때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봤다.
‘분명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시는데 왜 안 피하시는 거지?’
쾅!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울림과 거의 동시에, 예결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려 했다. 뭉게뭉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하량의 인영이 보였다. 그는 변이한 살수의 공격을 피했는지 멀쩡한 모습이었다.
와중에 예결이 마차에서 뛰쳐나왔다는 걸 알아챘는지 이쪽을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결아. 착하게 있어야지.]
짐짓 엄한 음성에 예결은 움찔했다.
전음은 그게 다였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소리가 전음 끄트머리에 묻어났다. 하량이 손길로 어루만지기라도 한 양 귓가가 간지러웠다.
갑자기 습격당한 상황임에도 긴장이 사라졌다. 예결은 흙먼지가 걷히고 조금 전까지 하량이 서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바닥이 움푹 패어 있고, 그 옆의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것이 보였다.
속도나 파괴력은 눈이 붉어지기 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눈이 붉어진 살수는 몇 번이나 하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량은 그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예결은 하량의 머리카락이 그의 뒤로 긴 궤적을 그리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상황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예결은 상대가 온전한 이지를 갖춘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하량이 은근슬쩍 마차에서 멀어지게끔 유도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 이 정도인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살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하량은 검을 갈무리했다.
‘왜?’
대사형이 쉽사리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결의 손가락 끝에서 금빛의 전류가 파직파직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잘 자다가 깨어난 뱀뱀이의 머리가 소매 밖으로 빼꼼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살수를 발견했는지 다시 옷자락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살수가 땅을 박찼다. 하량은 저를 향해 달려드는 이를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크윽……!”
괴물처럼 변한 살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힘을 줬으나 저를 붙든 하량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만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처럼 느껴지는데, 정작 골리앗이 힘으로 밀리고 있었다.
“내구도도 엉망이고 정신도 망가졌군.”
순간 하량의 손에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예결은 살수의 손끝이 검게 굳어가는 걸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것도 대사형이 익힌 마공인가?’
“네게 얻어낼 건 없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