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7)
그리 말한 대사형은 살수를 놓아주었다.
땅을 가르고 나무를 무너뜨리던 괴물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그 모습이 흡사 바위가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모래가 되는 과정을 빨리 감기로 재생한 것만 같았다.
“대사형!”
놈이 죽었다는 걸 확신하기가 무섭게 예결은 자리를 박차고 하량을 향해 달려갔다. 하량은 예결을 향해 한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 와중에도 본능에 충실한 예결은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하량은 다른 손을 휙 내저었다. 괴물이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명인 먼지는 하량이 일으킨 바람에 저 멀리 밀려났다.
예결은 다시 하량을 향해 달려갔다. 하량도 이번에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습격자의 시신일랑 보이지 않는다는 양 한달음에 하량의 곁에 다가선 예결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많이 놀랐니?”
하량이 그의 뒷머리를 헝클었다.
“아뇨. 그보다는, 마지막 살수가 좀 이상했던 거 같아서 걱정됐어요.”
“처리하는 걸 직접 보지 않았니.”
“방금 그건 뭐였어요?”
“독 같은 건 아니지만, 네가 들이마셔서 좋을 건 없는 거란다.”
예결도 딱히 그걸 들이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뒤에 남은 것 말고. 갑자기 살수의 눈이 붉어지더니 이상하게 변했잖아요. 중원 천지를 통틀어서 저런 건 처음 봐요.”
“아.”
하량은 짤막하게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성도 없고 무공도 못 쓰는 걸 보면 아류작이니 걱정할 것 없단다.”
“아류작……?”
예결이 그 단어를 곱씹자 하량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웃는 걸로 얼버무리려는 눈치였다.
하량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예결은 그 한정으로 쉬운 남자였다.
대사형이 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한 예결은 바닥을 훑어 하량이 쓰러뜨린 시신을 확인했다.
곡도라든가 차크람, 또 검신 끝에 구멍을 낸 기이한 무기도 하나 보였다.
예결은 저들이 든 무기에 기시감을 느꼈다.
‘청해가 사막과 맞닿아 있어서, 여기에서 영업 뛰는 살수들은 전부 저런 이국적인 무기를 쓰나?’
생각해보면 마차를 뚫고 들어온 철시도 퍽 독특한 생김이었다.
“하지만 ‘저런 걸’ 섞어 보낸 놈들이 여기까지 찾아낸 건 조금 신경 쓰이는구나.”
갑작스레 습격당한 사람치고 하량은 퍽 침착했다. 다만 예결은 대사형이 저를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하량은 마부석에 앉아 꼼짝도 안 하던 마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길 정리하도록.”
“존명.”
무표정한 낯의 마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 묶여 있던 말의 고삐를 풀어낸 하량은 예결을 번쩍 안아 그 위에 앉혔다. 하량은 날렵하게 그 뒤에 올라타더니 예결을 감싸 안았다.
“우리는 어서 돌아가자.”
“네에.”
하량이 마차를 출발시키자, 예결은 무심코 남겨진 마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시신의 위에 붓고 있었다. 살과 뼈가 삽시간에 녹아내려 흔적이 사라지는 걸 본 예결은 하량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에 처해 계신 거예요?”
“전혀.”
하량의 답은 덤덤하고 진솔했다. 예결이 보기에도 하량은 그런 살수가 트럭으로 찾아온대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마지막 살수가 기이한 형태로 변이했음에도 맨손으로 물리치지 않았던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저번에 남궁 공자를 찾아왔던 살수, 사실 저를 찾아온 거죠?”
은밀하게 움직이는 살수가 독특한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가는 눈에 띄기 십상이다. 그만큼 실력이 좋아야 할 거다.
예결이 생각하기에 중원에 그런 살수 집단이 두 곳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같은 살수. 그리고 두 번의 습격 모두에 존재했던 동일한 표적.
그건 예결뿐이다.
“…….”
하량은 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달리며 내는 발굽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래.”
하량이 예결을 제 품으로 바투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이 우형이 부족하여, 너를 위험에 처하게 했단다.”
“하나도 안 무서웠는걸요. 하지만 왜 살수를 보내는지는 궁금해요.”
문답이 오가는 와중에도 말은 쉬지 않고 내달려, 저 멀리 장원이 보였다.
“나는 적이 많지.”
예결은 하량을 올려다봤다. 부드럽게 올라간 그의 입매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게 무엇이든 해주고픈 마음에 청해상단을 넘겨주었는데…….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혈안이 된 놈들이 결국 너를 찾아내고 말았구나.”
하량은 예결의 머리꼭지에 얼굴을 묻었다. 오래전에 잃은 까닭에 아무리 가까이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예결의 체향이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고, 눈 위에 반짝이며 내려앉는 햇살을 닮은. 그런 향이.
청해상단의 주인으로 예결을 지목한 순간부터, 오늘은 이미 예견된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하량은 사제를 지나치게 눈에 띄는 표적으로 만들었다.
반쯤은 예결을 지키기 위해서였을지는 몰라도, 남은 반마저 그렇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웠다. 그도 그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으니까.
“조만간 내가 떠나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떠나요?”
예결은 고삐를 쥔 하량의 손 위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디로요?”
항주와 사천, 청해를 오가며 이제 겨우 대사형 곁에 착 달라붙을 수 있게 되었는데 떠난다니?
그간 대사형을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기초공사를 했던 예결은 집을 지으려고 모아놓은 나뭇가지가 폭우에 떠내려간 비버처럼 억울해졌다. 선 채로 졸도하는 게 이런 감각인가 싶었다.
머리꼭지가 홧홧했다.
“누가 살수를 보냈는지는 짐작이 가니, 처리해야지. 그래야 네가 안전할 테니까.”
차마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없는 이유였다. 하량에게 있어서 제 안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진영을 통해 전해 듣지 않았던가.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글쎄.”
부러 쓸쓸한 목소리를 낸 하량이 말했다.
“네가 좋아할 곳은 아니란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된 일정이 포함될뿐더러, 삭막한 곳이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여름이 되기 전엔 돌아오마.”
예결이 무어라 하기 전에 하량이 달래듯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최소한 생일에 맞춰서 돌아온다는 소리 같은데…….’
그래도 석 달은 떨어져 있게 생겼다. 예결은 자신의 인내심이 그리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래가더라도 몸이 따라주지 않을 거다.
예결은 조바심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뭔가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하량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는 예결의 목덜미를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
“아직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노인의 건너편에 앉은 남궁운이 물었다.
불콰하게 취한 얼굴을 한 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리 그리 말씀하셔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리 말한 의원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제 나이가 워낙 많고 거쳐 간 환자도 많다 보니 종종 사람 얼굴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의원 노릇을 한 덕인지 아직까진 약을 잘못 지어주는 실수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제법 능청스러운 변명이었다.
하나 외려 노인의 기지에 남궁운은 그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정말 무언지 기억하지 못했을 때는 본인도 알고 싶다는 듯 알쏭달쏭하다는 낯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밀이 생긴 이들은 눈앞의 노인처럼 신중해진다. 말해선 안 되는 걸 깨달은 이들의 입은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정작 그 신중함이야말로 비밀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는 결정적인 지표라는 것도 모르는 채.
“그럼 오늘은 이렇게 할까요?”
남궁운은 온화한 미소를 걸쳤다. 그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궁세가의 공자치고 소탈한 편이었다.
“제가 계속 의원님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었지요. 이번에는 제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공자님이 말입니까?”
노인은 떨떠름한 낯으로 되물었다.
무림인치고 곱상한 이 사내는 저번에 보호자로 함께 왔던 문 공자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다. 낯이 익다면 언젠가 환자로 만난 적이 있는 건지, 그게 언제였는지 등을 기억하는 만큼 알려주면 크게 사례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의원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살 만큼 살았다고는 하나 그는 제 목숨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예. 한 늙은 도인의 이야기입니다.”
의원님과 비슷한 나이겠군요, 하고 남궁운이 덧붙였다. 의원은 한번 들어볼 요량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도인은 젊은 나이에 조용한 산에 자리 잡은 도관에 입문했습니다.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며 사형제들과 함께 검소한 삶을 꾸려 나갔고, 점차 나이를 먹었지요.”
얼핏 의원의 삶과 비슷했다. 그 역시도 젊은 나이에 침을 잡았고, 의술을 배웠다. 여차여차 일에 쫓기다 보니 자식을 얻을 기회는 없었다.
“도의 길을 좇느라 성혼을 하진 않았지만, 아들과 같은 나이의 제자를 들였습니다. 피를 나눈 자식으로 대를 이을 수는 없어도, 정신과 마음으로나마 이어져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해줄 제자를 말입니다.”
제자라.
의원도 제자를 들이려 몇 번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영특한 제자는 그의 가르침을 쏙쏙 흡수했습니다. 도인은 이대로면 말년에 자신이 이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이, 그가 생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지식이 제자를 통해 남겨질 거라 생각하며 평온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 법이지요.”
의원은 저도 모르게 남궁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산적들이 와서 도관에 불을 지르고 도인의 사형제를 살해했으며,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약탈했습니다. 그때 도인의 제자는 스승을 지키려다가 화살을 맞고 절명해 버렸지요.”
“세상에.”
노인이 탄식했다.
“늙은 도인은 살날이 그리 많이 남은 제자가 먼저 세상을 떴음에 슬퍼하고 한탄했습니다. 곡기조차 끊으려 했으나 제자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도관이 이대로 폐허가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기에 다시 두 다리로 서서 산적들이 짓밟고 간 자리를 정비했습니다. 나무를 심고, 싹이 자라는 걸 보면서 말이지요.”
남궁운은 잠시 뜸을 들이며 의원의 낯을 확인했다. 그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도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도인은 이대로라면 그럭저럭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제자를 만나러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들었고 말입니다.”
남궁운은 술잔을 들어 차를 마시듯 입술을 축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인은 자신의 제자를 똑 닮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