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8)
“아이고……. 천지신명께서 도우셨구려.”
“……글쎄요.”
나오려던 감동의 눈물도 쏙 들어갈 정도로 의미심장한 말에 의원은 눈을 부릅떴다.
“도인은 망설였습니다. 자신의 옛 제자를 이 아이에게 투영하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도인은 이 소년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됩니다. 마치 손자를 보듯 소년을 아끼게 된 도인은 그에게 제자가 되어달라고 청했지요.”
강호에서 잘 팔리는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사제지연에 대한 이야기다.
“소년은 도인을 처음 만날 때부터 할아버지처럼 가깝게 여기고 존경했음을 고백하고 기꺼이 구배지례를 올립니다. 도인은 마침내 제자와 행복해질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남궁운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전에 도관을 습격했던 산적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무인이 도관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돈이 궁했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짓밟고 간 도관이 다시 부흥한 게 아니꼬웠는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남자는 혼자였고, 까닭에 산적이 몰려들었을 때처럼 도관을 전부 태우진 않았습니다. 그간 알뜰히 쌓아 올린 재물도 손대지 못했지요.”
“설마…….”
노의원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단 하나, 늙은 도인의 마지막 행복을 훔쳐 갔지요. 도인은 백방으로 사라진 제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궁운은 그리 말한 뒤 침묵했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야기가 끝이 났다는 걸 실감한 의원은 남궁운을 채근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내용에 불과하니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는 남궁운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이었다.
바로 곤륜의 백양진인으로부터.
그는 자신이 이십 년 전, 곤륜혈사에서 잃은 제자와 최근에 다시 들이게 된 제자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남궁운은 이를 적당히 각색해서 의원에게 들려준 참이었다.
“하지만 의원님은 이 도인의 이야기를 완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늙은이가…… 말입니까?”
그 질문에 남궁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도인께 부탁받아 제자를 찾고 있습니다. 의원님께서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주신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의원은 깊게 탄식했다.
“나는, 나는 정말 드릴 말씀이 없다오.”
그는 명백히 망설이고 있었다.
“……기억이 젊었을 때처럼 그리 생생하지 않아서 소소한 진료를 할 때도 항상 일지를 읽어야 하지. 내 공자께 도움이 될 수 없어 미안하구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의원은 책꽂이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다가 다시 안으로 쓱 밀어 넣었다.
“약재 정리를 하러 갈 시간이니 더는 손님 대접을 하기 어렵겠군. 부디 살펴 가십시오.”
“들어가십시오.”
의원은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남궁운은 잔을 마저 비워냈다. 차디찬 술이 몸 안에 들어오면 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감각은 언제나 기이하기만 했다.
반듯하게 일어나 선 사내는 내공을 일으켜 취기를 날려버렸다. 책꽂이로 손을 뻗은 그는 의원이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은 책이 무언지 확인했다.
의원이 언급하고 도망치듯 일지였다. 남궁운은 그 내용을 확인하며 휘릭휘릭 장을 넘겼다.
규칙적인 시간에 일어나 환자를 맞이하고 약재와 처방을 정돈했다는, 일상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분명 묘시에 약재 정리를 하다가 깜빡 잠들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쇠한 몸이라 곤했던 모양이다.
한데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의방이 아니었다.〉
그사이에 찢어진 종이가 한 장 끼어 있었다. 거의 갈겨 쓰다시피 한 글씨였으나 뜻을 알아보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 내용이 흡사, 노의원이 납치라도 당한 것 같지 않은가.
원하던 내용을 찾아냈음을 직감한 남궁운은 손을 멈추고 의원의 악필을 읽어내렸다.
〈내가 그곳에서 보게 된 환자는 약관이 갓 넘은 청년이었다.
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출혈이 심했는지 지혈을 시도한 게 보였다.
기혈이 전부 뒤틀려 있으며 침술만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다.
천지신명이 도와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아마 무인이라면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후유증?
남궁운은 새삼 예결을 떠올렸다. 밋밋한 태양혈과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아 말랑한 손바닥. 기척에 둔감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두려워한다.
백양진인도 그리 말했다. 이번에 실종된 이대제자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라고.
〈불로 지진 듯한 화상.〉
그 문장은 검은 먹으로 줄이 두 번 그어져 있었다.
〈명백한 폭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궁운의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살려야 하나?〉
다시 검은 먹으로 그어진 문장.
남궁운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백양진인은 한 마두가 자신의 옛 제자를 닮은 예결을 납치해갔다고 말했다. 그럼, 그 후에 이토록 끔찍한 일을 겪은 거란 말인가?
‘그런데, 항상 그렇게 밝은 얼굴로…….’
까닭에 청해상단주 문예결을 만났을 때, 곤륜파에서 사라진 이대제자 문예결일 거라고 의심하면서도 쉬이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갈수록 아귀가 들어맞지 않나.
일지를 덮어 다시 원래의 자리에 끼워놓은 남궁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야 알겠다. 겉보기에 상처 하나 없던 예결이 왜 청해상단의 주인이 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는지. 정신과 마음이 꺾일 정도의 폭행을 당했으니 곤륜산이 지척에 있는 청해에서 활동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남궁은 협의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하물며 예결은 그의 친우였으며, 더 나아가 은인이기도 했다.
결연한 결심이 그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남궁운은 미처 몰랐다. 그가 사건이 벌어진 순서를 착각하고 있다는 걸.
일지 사이에 끼워진 기록을 읽은 남궁운은 곤륜에서 납치당한 예결이 마두에게 고문당하고 세뇌당한 뒤 의원을 만나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남궁운은 예결이 애틋하고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사부와 생이별을 당한 데다가 마두에게 끌려가 폭행당하고 세뇌당해 상대를 대사형이라 부르며 따르게 된 것이 분명했다.
무심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갗을 파고드는 손톱의 아릿함이 남궁운의 정신을 명징하게 깨웠다.
지금은 감정에 매몰되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아니다.
‘일단, 그 대사형이라는 자를 찾아야 한다.’
정황상 그가 곤륜의 몰락을 기다리던 대마두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대사형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니,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하량이 짓지도 않은 죄가 또 그의 어깨에 추가되었다.
‘예결. 조금만 기다려요.’
친우의 불행에 남궁운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그의 안에서 예결은 마두에게 붙들린 가엾은 곤륜의 이대제자였다.
***
예결은 삼랑과 함께 하량의 거처로 향하는 중이었다.
예기치 못한 습격 직후 장원으로 돌아온 예결은 삼랑을 기다렸었다. 이번에 사천에 다녀오며 하량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이 어둑해질 즈음 상단에서 챙겨온 상자들과 함께 돌아왔다. 예결은 그녀를 닦달해서 하량을 위한 선물을 잔뜩 챙긴 뒤 바로 방을 나선 참이었다.
바리바리 준비한 게 많아서 삼랑뿐이 아니라 거처의 하인까지 셋이나 데려온 참이었다.
“나중에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꼼짝없이 예결에게 잡혀 두 손 가득 짐을 든 삼랑의 낯은 부루퉁했다.
예결은 신경 줄이 어찌나 굵은지 살수를 만나 놓고도 대사형에게 줄 선물을 내놓으라며 그녀를 괴롭혔다.
‘생각해보면 저번에 서녕성에서 있었던 습격 사건 때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긴 했지.’
곤륜에서는 눈을 녹여 식수로 쓰기도 한다는데, 혹 그 때문에 간이 커지나? 같은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삼랑의 귓가에 예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감이요.”
“그럼 기각.”
“왜요?”
솔깃한 척 귀를 기울이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일말의 기대조차 푸시식 식을 정도로 냉정한 답이었다.
“삼랑의 감은 삼랑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거지 내 사정과는 무관하잖아?”
“문 공자가 귀가 조금만 더 얇았으면 좋을 텐데.”
삼랑은 툴툴거렸다.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데 하량의 거처에서 진영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결은 짐짓 제 걸음 소리를 죽이며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살수 사이에 강시를 섞어 보낼 줄이야.”
평소보다 나른하고 탁해진 하량의 음성에 예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 붉은 눈으로 변한 살수가 인간이 아니라 강시였다는 건가?’
“마의가 죽은 후로 제대로 된 제조법은 사라졌을 텐데, 아득바득 흉내를 낸 걸 보면 제법 내 신경을 건드리고 싶었던 모양이야.”
“흉수의 범위를 좁히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산파의 멸문 후 강시를 만드는 비책은 암암리에 퍼졌으니까요.”
마의?
예결은 강시와 마의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 꼭꼭 저장했다.
“조용.”
하량의 음성에 예결은 순간 긴장했다. 분명 대사형은 저 장지문 너머에 앉아 있을 텐데, 지금 그의 손이 예결의 심장을 꽉 쥔 것만 같았다.
훔쳐 듣고 있었다는 걸 들키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결이가 오는구나.”
순간 그의 음성이 봄의 미풍처럼 부드러워졌다. 예결은 너무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량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문 앞에 다가서서 가만 보니 그 틈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엿듣기 쉽더라니.’
“대사형. 저 예결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오늘은 곤란한데.”
뜻밖의 거절이었다. 예결은 끈기 있게 거듭 요구했다.
“드릴 게 있어서요.”
다행스럽게도, 하량의 거절은 한 번뿐이었다.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예결이 오는 걸 알아채고 바로 열었는지, 방 안에는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죽을 태우며 나던 연기를 죄 몰아낸 듯했다.
하량의 손에는 연죽이 들려 있었다.
‘위화감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사형이 연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검이 잘 어울리는, 단정하고 곧은 손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 사이에 연죽이 얽혀 있는 걸 보니 묘하게 퇴폐적이다.
“모두 물러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