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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63화 (163/203)

163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9)

예결이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아준 진영과 여태 들고 온 짐을 하량의 거처 바닥에 부려 놓은 삼랑, 그리고 하인들이 그 명에 방을 빠져나갔다.

남들이 자리를 뜨거나 말거나 하량만 바라보고 있던 예결이 성큼 다가서자 사내는 그를 만류했다.

“너무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겠구나. 불을 끄긴 했지만, 잔향이 남아 있을 수 있어서.”

“무얼 피우시기에 그리 조심하세요?”

예결의 질문에 하량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수면향이란다.”

그럴 의도로 피우고 있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금 졸리고 말 텐데 왜 그리 걱정하세요?”

이미 삼랑으로부터 저 연죽에 들어 있는 게 보통의 연초가 아니라는 걸 들어 알고 있음에도 예결은 천진한 척 물었다.

“이건.”

하량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연죽을 거치대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이건 정말 독한 약이란다. 더는 무인이 아닌 네가 이 향을 견딜 수 없을 거다.”

예결은 웃었다.

대사형은 그의 몸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웠다. 더는 단전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죽하면 곤륜을 떠나온 후에는 상단에 자리까지 마련해주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덜컥 큰 선물을 받아서 당혹이 컸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하량은 예결이 다른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일에 파묻히기를 원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더는 무림인이라 할 수 없는 몸 상태를 비관하기보다는 바빠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테니까.

그런 남자가 굳이 무인이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담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픈 곳을 눌러서 지레 달아나게 하려는 거다.

“그럼 대사형은 괜찮아요?”

“이 우형은 무인이잖니.”

“설마 대사형이 현경 같은 경지에 올라 만독불침이 된 것도 아닌데, 그런 약에 취해서 좋을 건 없잖아요. 회복이 빠를진 몰라도, 분명 후유증은 있겠죠.”

하량의 눈이 본인의 연죽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에 미미한 망설임이 서렸다.

“재워 드릴게요.”

예결은 하량의 품을 파고들 기회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분명 하량은 흔들리고 있었다. 선뜻 그러마, 하고 답할 수 없어 망설이는 눈치였다.

“항주에서, 분명 푹 주무셨잖아요. 이번에도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네?”

예결이 거듭 조르자 하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내 사제의 걱정을 당해내지 못하겠구나. 앞으로도 수련에 정진해야겠어.”

농 아닌 농이 섞인 음성은 분명 허락을 암시하고 있었다.

예결의 낯에 화색이 맴돌았다.

“그럼……. 바로 침상으로 가실 건가요?”

“선물을 저렇게 잔뜩 들고 왔으면서 보여주지도 않을 요량이니?”

웃음기 어린 질문에 예결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답했다.

“피곤해 보이세요.”

하량의 손을 덥석 잡은 예결을 거의 우격다짐으로 하량을 침상까지 끌어갔다.

“저건 아침에 일어나서 봐도 늦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차곡차곡 내려놓았다지만 하량의 침실은 유례없이 어지러웠다.

평소였으면 당장 치우라 했을 하량은 사제의 손을 놓을 수 없어 그가 미는 대로 침상에 걸터앉았다.

꼼짝없이 잘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을 기미였다.

‘잠들어도 곤란할 것 같은데.’

하량은 잠시 제 상태를 가늠했다. 저번만큼 최악은 아니었으나 강시 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건 사실이었다. 연초로 어느 정도 가라앉히긴 했다만, 제 본능이 잠들어서 완전히 무방비해진 동안 같은 공간에 타인의 존재를 허락할지는 미지수였다.

살아남기 위해 벼려진 습관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마차에서 네가 악몽을 꾸었다고 했을 때, 조금 끙끙거리더구나.”

하량은 불쑥 마차에서의 일을 입에 담았다.

“많이 불편하셨나요?”

이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예결이 묻자 하량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내 악몽은 그리 얌전하지 않을 거다.”

침상 아래로 손을 밀어 넣은 하량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집 안에 들어 있는 단검이었다.

하량의 손이 이를 살짝 뽑자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날이 보였다.

이를 다시 검집 안으로 밀어 넣은 하량은 예결에게 단검을 건네줬다. 엉겁결에 단검을 받아 든 예결은 잔뜩 긴장한 시선으로 하량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쭤도 될까요?”

“혹시 이 우형이 날뛰려 든다면, 네게 손을 댄다면.”

하량은 아무 말 없이 단검을 쥔 예결의 손 위를 지그시 눌렀다.

“어떻게든 깨워야 한다. 알았지?”

“……저만 믿으세요.”

하량이 절대 믿으면 안 될 인간을 꼽으라면 한 손가락 안에 들 예결은 뻔뻔하게 답했다.

“그럼 조금만…….”

예결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하량이 침상에 몸을 눕혔다. 한 손을 예결에게 내주느라 다소 불편한 자세였다. 예결은 머리맡에 둔 단검을 슬쩍 밀어버렸다.

“그냥 제가 옆에 누우면 안 될까요?”

눈을 가늘게 뜬 예결이 하량에게 물었다.

“좁아서 불편할 텐데.”

침상의 크기가 작다기보다는 하량의 덩치가 큰 편이라 발생하는 문제였다.

십만대산에서 쓰는 침상은 이보다 큰 편이었으나 청해에서 쓰는 장원은 급조한 편이라 그의 몸에 맞는 가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렇게 안아주시면 되잖아요.”

아무리 한 겹의 금침이 서로의 사이에 놓여 있다고 한들,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는 예결은 보통 능청스러운 게 아니었다.

하량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금침을 벌려주었다. 예결은 기다렸다는 듯 그 안으로 파고들어 하량의 팔에 머리를 괬다.

사심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저 주인의 곁이 좋아 파고드는 소동물 같지 않은가.

“저번처럼 자장가 들려주세요.”

예결은 뻔뻔하게 요구했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를 재우는지 알기 힘든 모습이었다.

“네가 나를 재우러 온 게 아니었니?”

“그때 대사형이 어떻게 푹 쉬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같이 잠들었다는 것 외에는.”

예결은 언제나 사심으로 충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핑계나 명분 없이 이런 걸 요구하진 않았다.

“최대한 항주 때랑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량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때와 비슷하게 하려면, 네가 곤란해지지 않겠니.”

슬쩍 고개를 기울인 사내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져 있었다. 의미심장한 접촉의 함의를 읽은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아쉬움을 꾹 참고 예결은 손을 들어 올려 하량의 입술을 막았다.

김이 빠진 듯, 하량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웃음 때문에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놀리지 마세요. 대사형이 푹 쉬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온 건데…….”

“으응. 그래. 이 우형이 나빴다.”

심통 난 아이를 어르듯 다정한 음성에 예결은 그의 팔에 고쳐 누우며 눈을 감았다.

“얼른, 자장가요.”

필사적인 외면이 눈에 읽힐 정도였다.

하량은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 빤한 예결의 속내에 헛웃음을 지었다. 포식자가 다가온다고 굴에 머리만 박은 채 엉덩이를 쏙 뺀 토끼를 보는 느낌이라 화도 나질 않았다.

그는 자장가를 불러주는 대신, 예결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물었다. 간질간질한 손장난에 사제의 귓가가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오늘 일로 많이 놀라진 않았니?”

“조금이요.”

“긴장했다면 좀 풀어줄까?”

하량의 제안에 예결은 상체를 일으켰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하량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본다고 이 우형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으냐?”

“시도는 해보는 거죠. 시도는…….”

“그래서, 어떤 것 같으니?”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걱정……하시는 거 같은데.”

“그럼. 이 우형은 너무도 부족한 인간인지라 매양 하나뿐인 사제의 걱정을 한단다.”

예결은 한때 하량의 사제가 두 손으로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저번처럼…… 그, 아래에 손을 대시면 안 돼요.”

“약속하마.”

붉은 혀가 시뻘건 불길처럼 날름거리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량은 금침을 걷고 예결을 침상 한가운데에 눕혔다. 엎드린 채 홑옷 차림이 된 예결은 살이 슬쩍 비치는 상황이 신경 쓰이는 것처럼 하량의 시선을 피했다.

하량의 손가락이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목덜미를 스치자 예결은 일부러 몸을 움찔 떨었다.

“춥니?”

걱정을 가장한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옷 위로 미끄러지는 하량의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무림인이라 그런지 혈을 자극하고 뭉친 근육을 풀어내는 손길이 몸을 녹진녹진하게 만들었다.

‘기경팔맥과 혈자리를 싹 외워야 심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건가.’

힘 조절을 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각오했는데, 그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당초의 목적조차 까맣게 잊을 지경이었다.

등줄기를 따라 미끄러진 손길이 날개뼈 사이를 부드럽게 압박해왔다.

“아프진 않니?”

하량의 질문에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엄청나게 조심스러우신데요?”

“살성이 물러서, 조금만 힘을 줘도 터질 거 같구나.”

걱정될 정도라고 말하는 하량의 음성에 예결은 고개를 옆으로 뉜 채 웃으며 답했다.

“에이. 그래도 다 큰 사내인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맞아. 결이 너는 다 컸지.”

그저 평이한 답변일 텐데, 이상하리만치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비스듬히 올려다본 하량의 낯에는 어스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항주에서도 느꼈지만……. 살결이 무척 부드럽구나.”

손을 거둔 하량이 예결의 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대사형?”

예결은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제지했다. 하지만 하량은 아랑곳하기는커녕 예결을 돌려 눕혔다.

“……손을 대면 녹을 것 같은데. 네가 여기에 있는 게 어찌나 신기한지.”

하량이 붙들려 있던 손을 위로 잡아끌었다. 잡아 내리려다가 도리어 예결의 손이 끌어당겨진 꼴이었다.

사내는 예결의 손등에 제 뺨을 바투 붙인 채 중얼거렸다.

“재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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