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64화 (164/203)

164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10)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에 예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려고 내 침상에 올라온 것이 아니니?”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연초 탓인지 붉게 충혈된 하량의 눈을 보며, 예결은 그의 손에 죽은 살수를 떠올렸다.

“저는.”

예결은 잠시 말을 멈췄다. 새삼 하량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제 긴장을 풀어 주신다고 한 거, 거짓말이죠?”

불현듯 튀어나온 질문에 하량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긴장한 건 대사형이잖아요.”

예결은 하량이 제 목을 조르던 밤을 아직 기억했다.

어떤 악몽은 원인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하량이 연죽을 사용한 건 그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분명 두 사건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다.

이를테면 자신의 안전 같은.

“아까 살수를 만나서, 혹시 제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셨던 거잖아요. 그래서 수면제……도 피우셨던 거고.”

“그래?”

하량의 반응은 정곡이 찔린 사람답지 않게 여상하기만 했다.

“이걸 이렇게 어이없이 들킬 줄이야.”

예결의 손을 놓은 사내가 중얼거렸다. 순간 그의 낯이 무표정해진 게 보였다. 화가 난 거 같진 않았다.

하량이 예결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냈다. 이대로 물러나려 하는 눈치였으나 예결은 그 손을 붙들어다가 제 심장 위에 올렸다.

“살아 있잖아요. 그렇죠?”

예결은 배시시 웃었다.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손을 거둬간 하량은 마른세수를 하더니 중얼거렸다.

“……정말 못 당해 내겠구나.”

항복의 기미였다.

하량은 눈을 내리깐 채 무언가 고심하는 눈치였다. 이내 그는 천천히 예결의 몸 위에 올라탔다. 흡사 짐승이 먹잇감을 덮치기라도 하는 형상이었다.

그의 양 팔 사이에 갇힌 예결은 놀라서 입만 뻐끔거렸다.

‘갑자기? 이렇게 과감하게?’

본인이 흑귀라고 밝힐 것 같진 않았지만 이건 예결의 짐작을 훨씬 벗어난 행위였다.

“잠시만…….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그리 중얼거린 하량이 예결의 가슴 위에 머리를 기울였다. 예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하량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이제 하나 남은 사제가 제 품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옭아맨 사내는 그의 심장 위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저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고?’

대사형의 목적은 음전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찰나 동안 좋다가 말았다.

‘하지만.’

예결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언제나 올려다보기만 했던 사내가 지금 그의 아래에 있었다.

방 안이 아니라 방 밖에 있어도 귀를 기울이면 예결의 심장 소리 정도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잔뜩 몸을 옹송그린 채 제 품을 파고드는 사내가 애틋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어쩌다가 나 같은 것에게 코가 꿰여서.’

예결은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망설임 없이 단호한 포옹에 하량의 숨소리가 훨씬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형제가 전부 죽었으니 하량이 제 생사에 집착하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교에 함께 끌려갔던 곤륜파의 인질을 가지고 마공을 익히라 협박까지 당했다니…….

‘지나가다가 십만대산 들를 일 있으면 기둥뿌리를 뽑아 버려야지.’

새삼 진영에게 이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의 분노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걸 느꼈다. 하량이 쉬이 잠들지 못하게 만든 이들의 안식을 전부 뺏고 싶었다.

‘……여기가 중원이라 다행이야.’

만약 대사형이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 시대의 방식으로 건실했을 거다. 그럼 자신처럼 잔인한 생각을 하는 에스퍼는 상대도 안 했겠지.

하량을 끌어안은 채 가만가만 천장의 어둠을 헤아렸다. 흑귀와 헤어진 데다가 이번엔 하량이 떠날 위기인지라 애써 침상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오늘의 진도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일단 침상을 차지한 데에 의의를 둘까.’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으며, 예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은 적막했고, 오로지 하량의 숨소리만 들렸다.

점점 고르게 변하는 호흡은 마치 느릿한 파도 같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몸은 예결까지 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아마 까무룩 잠든 것 같았다.

새벽 즈음, 예결은 깨어났다. 분명 하량을 끌어안은 채로 잠들었던 거 같은데, 깨어나니까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예결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하량의 두 팔이 그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어서 힘을 주지 않으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제법 기척을 냈음에도 하량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결은 그의 눈앞에 손을 휘휘 저어보다가 대사형이 숙면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잘 주무시네.’

완전히 무방비한 얼굴이다. 차갑게 생긴 얼굴이지만 잠든 이 특유의 유순함이 느껴지는 게 신기했다.

그의 가슴에 바투 붙어서 마주 누운 예결은 하량의 속눈썹이 몇 개인지 다 헤아릴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를 바라봤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여덟.

한 그 정도 헤아리고 나면 어디까지 셌는지 자꾸 헷갈렸다. 살짝 벌어져 숨을 내뱉는 입술이며 슬쩍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까닭이다. 게다가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하량의 심장 박동도 예결의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했다.

어제 대사형이 제 가슴에 귀를 기울이던 게 생각이 났다. 어쩐지 하량이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평화롭다.’

아무것도 안 하고, 나무늘보처럼 온종일 하량의 몸에 매달려 있고 싶었다. 안 된다고 해도 어제처럼 조르면 하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을 업거나 안고 다니지 않을까.

잠든 이의 낯을 한참이나 훔쳐보던 예결은 망설이다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당장에라도 손목이 붙들릴 것 같아 가슴은 조마조마했으나, 예결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손이 안착한 곳은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하량의 귓가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희게 드러난 살갗을 보기만 하던 예결은 처음으로 그 위로 제 손을 덧그려 보았다.

‘말랑말랑.’

하량의 몸은 단단한데, 그의 귓불만은 말랑말랑했다.

그 간극이 어쩐지 귀여워서 배실배실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귀까지 단련할 수 없긴 하지…….’

상식과는 별개로 귀여운 건 귀여운 거였다.

“으음…….”

순간 하량의 입에서 섬어가 흘러나왔다.

좋다고 혼자 히죽히죽 웃던 예결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하량은 대체 무슨 짓이냐고 물어보거나 일어나기는커녕 다시 고른 호흡을 내뱉었다.

한쪽 눈만 찔끔 떠서 대사형이 여전히 잠들어 있다는 걸 확인한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깨울 뻔했다.’

주섬주섬 손을 뻗은 예결은 자신이 베고 있던 베개를 끌어와서 하량의 팔에 끼우고 저는 그 아래로 쏙 빠져나왔다.

잠버릇 하나 없이 단정할 것 같았던 사내가 몸을 살짝 뒤척이는 바람에 예결은 어깨를 움츠린 채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번엔 정말 깨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하량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예결은 여전히 방 안에 놓여 있는 상자를 휙 둘러봤다. 어제 전해주고 싶었지만 기왕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 미리 디스플레이를 잘해 볼 작정이었다.

무엇보다도…….

‘다시 잠도 안 올 거 같고. 맨정신으로 저기 누워 있다가 또 대사형 덮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예결은 자기객관화를 아주 잘하는 에스퍼였다.

몰래 하량의 입술을 훔친 건 고작 한 번뿐이지만, 원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법이다. 욕심이라도 없으면 몰라, 예결의 속은 석탄보다 검었다.

그는 첫 상자를 열어젖혔다. 내용물을 들어 올린 예결은 방 안의 구조를 살피고 작업을 시작했다.

***

무언가가 바스락바스락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깨어날 때 누가 주변에 있는 건 오랜만이었기에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판단력이 느려진 가장 큰 이유는 근래 들어 가장 깊게 잠든 탓도 있었다.

천천히 깨어난 하량은 품에 안고 있는 게 예결이 아님을 깨닫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개를 밀어낼 때, 손끝에 뭔가 걸려서 툭 치자 그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어제 하량이 예결에게 건넨 단검이었다. 저 지키라고 준 것을 아무 데나 둔 것이 참으로 예결다웠다.

그래서 사제는 어디 있나,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하량은 방에 너울너울 펼쳐진 천의 향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 대사형, 깨어나셨어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 사이로 예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금살금 다닌다고 다녔는데, 제가 너무 시끄러웠나요?”

지금도 깨금발로 한 발 한 발 번갈아 가며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하량은 기가 찼다.

“결이 너처럼 작은 아이가 소리를 내면 얼마나 낸다고. 그저 깰 시간이 된 것뿐이다. 그나저나, 이게 다 무어니?”

“아.”

예결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 선예공방에서 샘, 아니 견본을 좀 가져왔거든요. 근데 마음에 들어서 일부는 제가 매입했어요. 이제 날도 점점 풀릴 테고, 대사형 새 옷이나 지어드릴까 해서요.”

“새 옷?”

방을 차지한 색들은 하나같이 곱고 화사한 색이었다. 하량은 예결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심했다.

“일단 이것부터……!”

길게 늘어진 비단을 끌어당기며 예결이 걸음을 옮겼다. 하량은 그가 들고 있던 비단이 천장에 매달려 있던 것과 얽히는 걸 발견했다.

“조심!”

잠든 사이 예결이 열심히 매달아 놓았던 색색의 비단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비단이 하도 많아서 묶을 때 귀찮다고 한 번에 묶었더니, 떨어질 때도 한 번에 떨어지게 되었다. 일부러 구김이 가지 말라고 헐겁게 매듭을 만든 탓도 있었다.

날렵하게 중심을 잡을 작정이었던 예결은 멈칫했다. 넘어지는 그를 붙들기 위해 어느새 다가온 하량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어쩌지?’

당연한 말이지만 욕망이 자존심을 이겼다. 예결은 하량의 위로 넘어졌다. 그의 위로 비단이 펄럭이며 쏟아져 내렸다.

예결은 더듬더듬 바닥을, 정확히는 자신이 깔고 앉은 하량을 짚으며 상반신을 조금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붉은 비단을 너울처럼 두르고, 저를 내려다보는 예결의 모습에 하량은 입술을 몇 번 벙긋거렸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그 언젠가의 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던 신부를 짐승처럼 탐했던 초야가.

하량은 몸을 일으키려던 예결의 등을 붙들고 눌렀다. 어쩌면 이 순간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하량은 예결의 입술 위에 자신의 것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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