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화씨지벽 (1)
예결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꿈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너무 간절했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량을 붙들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두 손이 그의 품 안에서 덜덜 떨렸다.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건 경직된 입술을 파고드는 말캉한 감촉 때문이었다.
서늘한 새벽의 공기와 달리 그건 델 듯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비단이 만들어낸 붉은 그림자가 하량의 얼굴 위로 너울거렸다. 예결은 하량이 혼례복을 입은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래도 되는 건가?’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 당도했건만, 성취감보다는 불안감이 성큼 다가섰다.
평소였다면 기사멸조 따윈 으적으적 씹어먹고도 남았을 텐데, 고지를 눈앞에 두었다는 게 실감이 나자 선뜻 발걸음이 떼지질 않는다.
예결은 무심코 하량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리 강하지 않은 힘이었으나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양 하량은 몸을 뒤로 물렀다.
“대, 대사형…….”
예결은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흥분과 두려움이 번진 눈이 하량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방황했다.
“이러면 아, 안 되는 거잖아요. 안 되잖아요.”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예결의 말에 잠자코 귀 기울이던 하량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두렵지?”
예결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으나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문득, 사천의 비단 거리에서 흑귀를 만나기 전 봤던 젊은 연인들이 떠올랐다. 혼례를 위해 새붉은 비단을 고르던 이들이.
그들은 예결처럼 강호의 금기며 도의 같은 건 고민할 필요도 없을 터다. 떳떳하게 온 세상에 제 사랑을 드러내고 축복받으며 혼례를 올릴 수 있을 테니까.
하여 예결은 되레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매양 음험하게 제하량을 옭아맬 수작을 세우고 그의 몸을 두 팔로 휘감아 안았다.
자신에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내가 언제든 함께 추락해줄 것을 알았기에.
“……대사형의 명성에 누가 될 거예요.”
이게 얼마나 물색없는 소린지 잘 알면서도 입술 사이로 두려움이 비어져 나오고야 말았다.
하량은 강호에서 이름난 협객이었고 뭇사람이 선망해 마지않는 영웅이었으며 예결의 구원자였다.
그런 사내를 마침내 가지게 되었는데, 새하얀 설원 위에 처음으로 첫발을 내디디려는 사람이 된 양 망설임을 느꼈다.
그를 무너뜨려 제 품 안으로 들이는 일이 두렵다. 여기까지는 계획이 있었으나, 우습게도 예결은 이다음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은 있어도, 그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예결은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어떻게 해야 계속 사랑받을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다음을 몰랐다.
하물며 이 거짓 위에 쌓아 올린 관계가 앞으로 어찌 될지, 예결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 무지가 예결을 뒤흔들었다.
“네가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이구나.”
뜻밖에도, 하량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우형은 더 올라갈 곳도, 더 추락할 곳도 없단다.”
실로 그러했다. 그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어 제가 버려진 곳에 남기를 택하지 않았던가.
협의며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하량은 멀끔한 협객의 가죽 아래 도사리고 있던 시뻘건 욕망을 기꺼이 끌어안기로 했다.
“그러니 네가 하고픈 대로 하렴.”
하량은 그의 위로 드리운 너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해주마.”
회유하듯 부드럽게 둘만의 비밀로 남겨 주겠다는 암시에 하량을 밀어내던 예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모르겠어.’
예결은 눈을 감았다.
그의 가이드가 자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에 예결은 거부하지 않은 채 하량을 받아들였다.
“흐읏, 흐.”
입술 안으로 파고든 하량의 혀가 예민한 입천장을 건드렸다. 거의 동시에 밀려 들어오는 가이딩에는 난폭한 환희가 녹아 있었다.
하량의 감정에 감응하는 몸에 전율이 흘렀다. 고작 입을 맞췄을 뿐인데 눈가를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는 사제를 보며 하량은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물러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들은 하량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무재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정작 하량은 제 재능이 무공을 빨리 익히는 오성이나 어떤 동작이든 빠르게 흡수하는 신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뛰어난 건 인내심이었다.
참으로 지난한 삶이었다. 배신과 복수 그리고 상실은 하량을 벼랑 끝까지 떠밀었다.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그 세월을 살아내지 못했으리라.
한데 예결과 다시 재회한 이래, 하량의 인내심은 갈피를 잃었다.
‘그저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그리 생각했는데.’
하량은 예결을 이런 식으로 가질 거라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그 몸을 처음 취했던 순간마저도 사제가 죽어서는 안 되기에, 다른 손에 내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저지른 짓 아니던가.
그러나 품어보니 좋았고, 가져보니 놓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 제 소유로 두어도 이 성마른 욕심은 가시지 않으리라.
“결아, 결아…….”
잠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하량은 애달피 예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렇게 불러도 닳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 같았다.
손끝이 상기된 뺨을 스치고 귓가를 맴돌았다. 등허리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팔이 예결의 움직임을 단단히 봉쇄했다.
아무도 가둔 적이 없는데, 수인(囚人)이 되어버린 예결은 그 품 안에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던 사내가 예결의 손끝에 뺨을 비벼왔다. 가만히 눈을 감은 그 낯에서 번뇌나 죄책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우습게도 그게 면죄부라도 되는 것 같았다. 예결은 손의 떨림이 차츰 잦아드는 걸 느꼈다. 그는 제 아래에 깔린 대사형을, 하량을 내려다봤다. 잠시 물러나 있던 욕망이 끈덕지게 고개를 쳐들었다.
“내게 너를 다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리한다면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 주마.”
대사형의 속삭임에 망설임은 찰나와도 같이 스쳐 지나갔다.
이 세상에 예결이 원하는 건 오로지 하량만이 줄 수 있었다.
‘일단 가지고 생각하자.’
예결은 고개를 숙였다.
대사형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흑귀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기로에 섰다는 직감이 들었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맨정신으로, 밤조차 아닌 시간에 먼저 대사형에게 다가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량에게 입 맞췄다.
“아…….”
정작 입술에 닿는 감촉이 이상해서 눈을 뜨니 그가 입술을 가져다 댄 곳은 아랫입술과 턱 사이였다.
원래는 제대로 입을 맞추려고 했는데, 떨리는 바람에 눈을 감아서 입술을 잘못 가져다 대고 말았다.
무엇이든 해보라는 듯 눈을 감고 있던 하량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야릇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예결이 부끄러움에 몸을 뒤로 물리자 그제야 눈을 반짝 뜬 하량이 사제의 손목을 옭아맸다.
에스퍼의 내숭 같은 것도 까맣게 잊고 빠져나오려고 했음에도 붙들린 걸 보면 금나수법이었다.
하량이 무공까지 써서 저를 붙들 줄 몰랐던 예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놓아주세요…….”
“하지만 방금 네가 허락해주지 않았니?”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한데 벌써 놓아달라고?”
그럴 수는 없지.
자그마한 뇌까림에 선득한 집착이 느껴졌다.
예결은 이 모든 게 자신의 소망이 빚어낸 꿈이 아닐까 싶어 어질어질해졌다.
흑귀를 거절한 순간부터 아주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할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질척한 감촉은 예결이 외려 지름길을 택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운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제 머리 위로 드리운 비단의 그림자 때문에 살이 붉게 물든 건지, 아니면 이제 몸에 익숙하게 스미는 열락의 전조에 피부가 달아오른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량의 능란하기 짝이 없는 희롱에 머릿속도 덩달아 벌겋게 익어갔다. 그 안에 거품기를 넣고 휘젓기라도 한 것처럼 이성과 욕망이 제멋대로 뒤엉켜서 곤죽이 되고 있었다.
“달아, 결아. 네가 너무 달구나…….”
거푸 들리는 대사형의 농밀한 속삭임에 귀가 녹아내릴 듯 달았다. 정신없이 옷을 헤집고 그 안을 파고드는 손길이 스치는 자리마다 화인이 찍히기라도 한 것처럼 살갗이 욱신거렸다.
에스퍼의 몸은 가이드의 손길만으로도 손쉽게 발정했다.
하량의 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올라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흡사 자신이 대사형을 먹어 치우는 몰골이 아닌가.
상의야 잔뜩 흐트러지긴 했어도 정작 예결의 하의는 온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결도, 하량도 그 아래로 손을 뻗을 겨를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정말 지독히 오래전부터 그저 맞닿아 있고 싶었던 사람들처럼 입술을 비비고 손깍지를 꼈다.
반쯤 몽롱한 눈이 된 예결은 하량의 가슴에 뺨을 비비다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예결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낸 사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지분거렸다.
예결은 제 목덜미에 와 닿는 솜털 같은 호흡에 간지럼을 느끼고 움찔했다. 하량이 장난치듯 턱과 입술 사이에 입 맞췄다.
마치 예결이 실수로 했던 일을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웠다. 동시에 여태 느끼지 못했던 친애와 짓궂은 유혹이 뒤섞여 있었다.
‘대사형 같지 않아.’
예결이 알고 있던 하량의 그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분명 제하량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량을 빤히 바라보던 예결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멍청하게 그동안 선배들이 하던 짓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