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화씨지벽 (2)
예결은 그동안 집을 짓고 있었다.
풋사랑에 지독하게 망해본 선배 에스퍼들 덕에 도면은 물론이고 태풍이나 비바람에 대처할 완벽한 매뉴얼까지 있었다. 단열재부터 마감 시공까지 완벽하게 해치울 수밖에 없는, 그런 매뉴얼이었다.
벽돌을 잔뜩 만들어 굽고 나무를 잘라 다듬어 기둥도 세웠다. 숱한 날을 지새우고 가슴을 졸였다. 지금은 고생스러울지언정 분명 완벽한 집을 지을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정작 완성된 집은 예결이 막연히 상상한 형태와 전혀 달랐다.
예결은 이 집을 혼자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하량도 반대편에서 벽돌을 굽고 나무를 잘라 다듬어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집은 예결이 상상도 못 한 형태로 완성되고 말았다.
‘하지만.’
예결은 손을 뻗어 하량의 입술 위를 덧그렸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그건 예결이 아는 그 어떤 감촉과도 달랐고 그 어떤 온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걸 상상하려 했으니, 처음부터 글렀던 거지.’
망할 통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살아서 뇌가 녹아버린 게 분명하다.
선배 에스퍼들은 예결이 아니고, 그 가이드들은 제하량이 아닌데 말이다.
“대사형.”
가만히 제 위에 몸을 겹친 채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던 예결의 낯에 생기가 돌아오자 하량은 이를 곧바로 알아챘다.
몸을 일으킨 예결은 비단을 걷어버렸다. 어슴푸레한 새벽은 어느새 지났는지 아침의 빛이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바닥에는 색색의 비단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청해의 장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언젠가 거지 소년이 누비던 항주 바닷가의 염색공방 같기도 했고, 혼례를 준비하는 이들이 가득하던 사천의 촉금 거리 같기도 했다.
예결은 반쯤 몸을 일으킨 하량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연모하고 있어요.”
수줍은 고백과 달리 요란한 심장 박동이 하량의 손끝으로 옮아왔다.
예결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채였으나, 그 시선만은 바르고 곧았다.
하량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는 사제의 연정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흑귀의 눈으로 보고 흑귀의 귀로 들은 까닭이다.
감히 대사형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이유로 사제는 사파의 무인과 몸을 섞기를 택했다. 하량은 하량대로 사제가 고작 몸의 욕정 때문에 저와 어색한 관계가 되는 걸 원치 않아 그의 거짓말과 회피를 눈감아 주기로 했다.
숱한 밤을 보내는 동안 하량은 제 욕심을 충분히 채웠다고 생각했다.
‘아둔하기는.’
이젠 알겠다. 그건 참으로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그는 말간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제를 끌어안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이, 가슴에서 영원히 샘솟을 듯한 기쁨이 하량을 진심으로 웃게 했다.
“나 또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하량의 환한 미소에 예결은 넋이 나갈 것 같았다. 동시에, 그는 저를 끌어안은 하량의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예결은 그 떨림이 제 심장 박동과도 맞물려 있다고 느꼈다.
“내게 너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결아…….”
사제를 끌어안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하량이 속삭였다.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그의 고백은 사랑이 아니라 애원이었다. 예결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하량은 언제나 저 멀리, 앞서나간 자였다. 태산과도 같은 존재감에 언제나 대사형을 우러르기만 했다. 예결은 그의 그림자 속을 거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듯 당당하고 빛나던 사내의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으면, 이토록 가엾은 언어로 사랑을 말하게 되었을까.
“저는 워낙 못 먹고 못 배우고 자라 욕심이 많습니다.”
예결은 불쑥 입을 열었다.
“한 번 손에 쥔 건 절대 놓지 않아요.”
그리 말한 예결은 하량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제게 주셨잖아요. 그렇죠?”
하량의 낯에 안도가 번지는 게 보였다. 대사형의 기쁨이 난폭했다면, 그의 안도는 묵묵하고 정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럼.”
확신을 얻고 싶었는지 입술을 달싹이다 마는 사내의 낯에는 망설임이 교차했다.
“내 무엇을 해야 네가 기쁠 수 있을까?”
예결은 짓궂게 웃었다.
“어여삐 여겨달라 하셔야지요.”
하량의 낯에 아연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또래보다 덩치가 큰 편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편이라곤 하나 곱상하다기보다는 냉랭한 인상을 주었기에 하량을 ‘어여삐 여기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량은 저와 참 안 어울리는 단어를 잘도 가져다 붙이는 사제를 가만 바라봤다. 저 눈에는 더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여삐 여겨달라 하면, 무얼 해주려고?”
“대사형이라면 업고도 다닐 수 있어요.”
예결은 단호하게 답했다. 퍽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였으나 하량은 실없는 웃음으로 난색을 지워냈다.
“……나중에.”
발칙한 사제의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깨문 하량이 속삭였다.
“나중에 업어다오.”
허리를 힘주어 안은 하량이 다시 예결에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제 품에 든 것이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거푸 부드럽게 와 닿는 입맞춤에 예결은 전율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대사형…….”
하량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옮아갔다. 목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먹잇감을 탐색하듯 저를 꼼꼼히 바라보는 시선 탓인지 이대로 물어뜯길 것 같았다. 단단한 두 팔 사이에 갇힌 예결의 몸은 달아나기는커녕 반항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예결은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지금 저를 향해 욕망을 드러낸 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제하량이었다.
흑귀의 너머에 존재하는 사내를 끌어내기 위해 그를 지독하게 들쑤셨다. 그를 할퀴는 과정이 온전한 기쁨이라 말할 수 없을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온전한 환희가 되어 예결의 가슴에 번졌다.
옷을 여며 놓던 허리끈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내렸기에 지금의 하량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결의 목을 지분거리다가 가슴으로 내려온 사내는 여린 살을 깨물어 잇자국을 남겼다.
“하으.”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하량은 그런 사제를 굽어봤다. 겁이라도 집어먹은 양 팔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결코 놓지 않는다.
흑귀였을 때도 느낀 거지만, 지독하게 무방비하고, 또 맹목적이다. 하량이 예결에게 준 것이라곤 그리 대단치도 않은데.
사제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불가항력이었다.
다시 벌어진 옷깃 사이로 파고든 하량은 그의 가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얀 살갗 가운데 붉게 도드라진 정점을 망설임 없이 입에 물고 혀로 굴렸다.
“아, 앗!”
예결은 허둥지둥 하량의 어깨를 붙들고 밀어내려 했으나 그의 몸은 단단한 바위와도 같아 옴짝달싹도 하질 않았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유실 위로 살살 혀를 굴리며 일부러 소리 내어 빠는 하량의 짓궂음에 예결은 허리를 움찔거렸다.
질척한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텅 비어가는 기분이다.
‘지독하군.’
하량은 잠시 입술을 떼고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감상했다.
언제나 도둑질하듯, 아무도 모르는 밤에 취했던 몸이 아침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잔뜩 헤집어 엉망이 된 옷은 찢어지지만 않았다 뿐이지 야금을 걸친 것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가슴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저에게 향한 사제의 시선은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는 예결의 나신이 그 염태를 드러냈다. 하량의 손길과 입술이 머무른 자리마다 붉게 물든 하얀 피부는 잘못 쥐면 손에서 녹아내릴 것 같았다.
영영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기고 싶었다.
고개를 숙여 예결의 가슴을 입에 문 하량은 이를 세워 달큼한 유두를 깨물었다.
결코 배부를 수 없는 포식이었다.
“아파, 흐읏, 아파요.”
예결이 흐느껴 우는 시늉을 하자 하량은 입을 떼며 속삭였다.
“이렇게 세워 놓고는…….”
하량의 말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는 잔뜩 성이 나 있긴 했다. 거듭된 자극 탓이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통통하고 붉어진 가슴을 내려다본 예결은 고개를 돌렸다.
아래로 느끼는 거야 생리적으로 당연했다. 그러나 가슴을 만져질 때마다 가이딩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성감이 생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결이 느끼는 건 분명 쾌감이다. 하나 외려 그 탓에 이질적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 몸이 정말 다른 그 무언가로 바뀌는 느낌.
“좋아하고 있잖니.”
“그렇지만, 거긴. 거기는…….”
수치심에 채 말을 잇지 못한 예결이 도리질했다.
다른 손을 왼쪽 가슴을 움켜쥔 하량이 꼬집기라도 할 것처럼 살짝 힘을 주자 예결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뒤로 물렸다.
“이 우형이 너를 괴롭힌 적이 있느냐?”
한순간 연약해진 음성에 예결은 도리질했다. 흑귀가 좀 괴롭히긴 했지만 일단 표면상의 제하량은 무죄였다.
‘게다가 저렇게 묻는데 어떻게 긍정을 해.’
차라리 아이에게서 사탕을 뺏고 말지.
“하면 믿어다오. 기분 좋게 해줄 테니.”
말꼬리를 흐린 하량이 고개를 숙였다.
“아흣……!”
잔뜩 물고 핥고 깨물었던 오른쪽 가슴을 놓아준 하량은 이번엔 왼쪽으로 옮아왔다.
처음부터 깊게 빨아들이며 혀끝으로 유두를 굴리는 자극에 예결의 허리가 움칠 튀었다.
한 손으로는 잠시 자유를 얻었던 예결의 반대편 가슴을 주무르는 하량의 낯은 무척 신중하고 또 집요했다.
“이상, 이상해요……. 간지럽고, 배 속이……. 흐아!”
하량은 실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내였다. 예결이 느꼈던 거부감은 전부 쾌락의 전조였는지 하량의 혀가, 손가락이 유실을 스칠 때마다 아래가 젖는 기분이 들었다.
“달구나, 네가 너무 달아…….”
몸을 일으킨 사내가 벌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낯에서 선연한 욕정이 묻어났다.
“진작 가질 것을. 왜…….”
분명 혼잣말에 가까운 발언이었으나 예결의 귀가 쫑긋거렸다. 흑귀 노릇을 했던 걸 후회하는 게 분명했다.
‘난 그것도 좋았는데.’
자주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쉬웠으나 그 나름대로 애틋한 맛이 있었다. 하량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전전긍긍하긴 했지만, 그건 평소 대사형을 대할 때도 항상 하는 생각이다.
“아, 아흣!”
가슴에서 느껴지는 날 선 쾌감은 예결의 상념을 끊어냈다. 이쪽을 바라보는 사내의 검은 눈과 마주한 순간, 그가 일부러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틀었음을 알려줬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진득한 독점욕에 예결은 성난 짐승을 달래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량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간지럽기 짝이 없는 입맞춤에 하량의 눈가가 슬며시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 예결의 살갗을 살짝 깨물고 놓아주었다.
“……너를 안을 것이다.”
젖은 입술을 한 대사형이 통보하듯 말했다. 무엇이 그리 초조한지, 예결의 반응을 살피는 시선은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예결은 조용히 하량을 올려다봤다.
“결이 네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짐승처럼 흘레붙을 거란 소리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니?”
모양 좋고 단정한 입술로 저열한 단어만 골라 내뱉는 하량의 태도가 퍽 노골적이었다.
예결은 이러다가 대사형이 또 몸을 뒤로 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요.”
그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대사형께서는 제가 수음조차 혼자 못 하는 숙맥인 줄 아실 테지만, 사실 전.”
목이 타서 더는 말이 안 나오는 것처럼 말을 끊은 예결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사내를 아는 몸인걸요.”
하량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예결에게 사내를 알려준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설령 예결의 처음을 가져간 게 자신이 아니라도, 흑귀조차 아닌 다른 그 어떤 존재라도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대신, 하나만 말해주렴. 네가 원해서 한 일이니?”
하량은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대해 잘 알았다. 만약 마의가 하량이 다른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색마의 남창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예결은 죽음 직전까지 몰린 채 발견되었다. 그런 사제에게 지난 20년 동안 아무런 일이 없었을 거라 낙관하긴 어려웠다.
회복한 예결이 기억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도 부득이 파헤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량은 그저 사제가 살아서 돌아와 준 것이 기뻤다.
“네.”
예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하량이 흘러내린 옷 아래로 드러난 예결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제가 사내를 안다는 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어떤 게 중요한데요?”
대사형을 올려다보는 예결의 눈이 흔들렸다.
“이 우형이 약속을 어겼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