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화씨지벽 (3)
예결을 쥐고 끌어당기는 사내의 숨소리가 사뭇 거칠었다.
“너를 지켜 주겠노라 맹세했으면서, 정작 내가 널 범하겠다고.”
하량이 예결의 손을 부드럽게 눌렀다.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펼치자 슬쩍 손가락을 얽어 손깍지를 낀 남자가 예결을 끌어당겨 속삭였다.
“금수만도 못한 소리를 지껄였으니 비난하고 침을 뱉어야지. 저주하고 원망해야지.”
나지막한 속삭임이 살갗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께가 오싹했다.
“저도 대사형을 원해요. 그럼 전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 아닌가요?”
예결이 제법 대담하게 묻자 하량이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결아. 이 우형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니.”
이건.
묘한 반응에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내 평생에 걸쳐 갈음하마.”
깊은 죄책감을 품은 이의 발언이라기엔 뭔가, 뭔가 이상했다.
“너는 그저 받기만 하렴.”
다 갚기 전에는 놓아주지도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렴풋이 빚을 갚아야겠다며 강짜를 놓던 흑귀가 생각이 났다. 아무리 다른 두 사람을 연기하고 있어도 결국 본질은 제하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하량은 난폭한 강탈자라기보다는 거절할 수 없는 다정을 퍼붓는 사람이었다.
볕이 지나치게 강해서 상대가 말라 죽어도, 물을 지나치게 많이 퍼부어 상대의 뿌리가 썩어서 죽어도 하량은 아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방법 자체를 모를 테니까.
평범한 그릇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넘치고야 말 사랑.
‘역시 나밖에 감당 못 한다.’
예결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부족했다. 언제나 춥고 목이 말랐다.
“그러면, 그럼 대사형은요?”
젖은 눈을 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하량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텅 비어버리면 어떡해요?”
남자는 말 없이 웃었다.
“글쎄…….”
한참이나 바라본 예결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린 하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일단 네가 나를 남김없이 갈취하게 되면, 그때 다음을 생각해 보자꾸나.”
“대사형은 뭐든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부러 토라진 투로 중얼거리자 하량이 답했다.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거든.”
예결의 목과 어깨의 사이에 하량이 입술을 묻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단다.”
들숨과 날숨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이 느껴졌다. 갓 태어난 새끼 짐승의 심장 소리를 듣는 기분이 이럴까.
그는 예결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취한 채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다음의 영원까지도.
“그러니 네게 주마.”
오로지 너에게만.
입 밖으로 채 꺼내지 않은 말을 삼키며 사제를 힘주어 안은 하량이 중얼거렸다.
“진영이 오는구나.”
“아.”
고개를 든 예결은 어느새 사위가 밝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하량과 뒤얽힐 때만 해도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남아 있었으나 금세 아침이 오고 말았다.
일과가 끝날 때가 아니라 시작하는 시간.
하량도, 예결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런 건 새까맣게 잊고 짐승처럼 붙어먹을 뻔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힘주어 끌어안고 있던 손이 천천히 예결을 놓아주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하량은 예결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고, 허리끈을 정성스레 묶었다. 구겨진 옷자락을 꼼꼼히 편 하량은 조금은 아쉽다는 듯 예결을 바라봤다.
무어라도 더 손댈 구석이 있나 없나 가늠하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예결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향하던 하량의 손이 멈칫했다.
행여라도 맨살에 닿을까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삼킨 사내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어디선가 날아온 투박한 나무 빗이 그 손에 들렸다. 하량은 묵묵한 태도로 예결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질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탓에 하량의 안에 도사린 절절한 욕망이 느껴졌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 선을 넘으면 참을 수 없어서 이미 가지런한 머리카락에 빗질만 거듭하는 것이다.
“주군.”
문밖에서 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량은 그에 답하지 않았다.
제 눈에 아로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예결을 꼼꼼히 살핀 후에야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헌앙하구나.”
천천히 예결을 놓아준 하량의 낯에는 아쉬움과 욕심이 그득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표면에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주군?”
연거푸 하량을 찾는 진영의 음성에 예결이 하량을 바라보며 마뜩잖은 재촉을 건넸다.
“진영이 대사형을 찾네요.”
“……가고 싶지 않아.”
매양 어른스럽던 사내가 투정이라도 부리듯 중얼거리는 모습이 실로 생소하면서도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다녀오세요.”
성큼 다가선 예결은 하량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대사형이 가지런히 정돈해준 머리카락이며 옷이 구겨지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여기로 돌아와서 기다릴 테니까.”
예결이 건넨 말에 다른 그 어떤 함의가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 이쪽을 살피는 하량의 시선이 초조했다.
그런 사내에게 예결은 마지막으로 까치발을 들어 그의 턱 끝에 입술을 꾹 가져다 대고 손으로는 가슴을 떠밀었다.
“어서요.”
성큼성큼 걸어 나간 하량은 드륵, 하고 장지문을 연 순간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예결은 그 시선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하량은 진영을 거느린 채 복도 너머로 멀어져갔다.
후, 하고 심호흡한 예결은 주변을 뚤레뚤레 살폈다. 부족한 가구 같은 건 없었으나 침실이라기엔 아늑함보다 살풍경함이 느껴졌다.
하여 예결은 오래전부터 품었던 야심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사 준비를 해야겠다.
***
“뭐 하세요?”
바리바리 옆구리에 베개며 옷가지를 끼고, 손에는 뱀뱀이가 좋아하는 수반 따위를 챙기는 예결을 보며 삼랑이 물었다.
“이사 준비.”
“이사?”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삼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사형 거처에 가 보니까 넓더라고. 같이 지내게.”
“거길 왜…… 가요? 이 넓은 별채를 문 공자 혼자 쓰잖아요?”
“그렇지만 대사형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한걸.”
“예?”
중원을 통틀어 가장 독립적인 인간의 주장에 삼랑은 기도 안 찼다.
“사실……. 나는 대사형이 눈에 안 보이면 입맛이 없어. 잠도 안 오고. 막 몸이 욱신욱신 아프고…….”
“그건 또 무슨 거한 꾀병이랍니까.”
삼랑(35세, 야매 의원)이 일갈했다.
독에 조예가 깊은 삼랑은 인간의 몸을 잘 아는 편이었다. 그래서 주군의 부탁이 있으면 의원 노릇도 종종 해치웠다.
하여 삼랑의 귀에는 예결의 말이 그저 헛소리로 들렸다.
“대사형이 있으면 싹 낫는 병.”
예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중원 천지를 통틀어 그의 약점이라곤 제하량 하나뿐이다.
“주군은 불로초 같은 게 아닙니다.”
불로초는커녕 인간이다. 심지어 그냥 인간이라면 또 모를까, 제하량은 천마였다.
무릇 강호에서 천마란 치료제가 아니라 만병과 근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중원 침공 같은 걸 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저 십만대산 어딘가에 천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강호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이들은 두통과 치통, 불면과 소화불량과 탈모에 시달린다.
물론 정파 놈들이란 길 가다가 엎어져서 코가 깨져도, 가세가 기울고 나라가 망해도 천마 탓을 하며 정신 승리할 놈들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하량의 곁이 편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사형제지간이라지만…….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예결을 가만 보고 있으면 자진해서 불지옥으로 기어들어 가는 부나방 같았다. 심지어 거기가 뜨뜻해서 좋다며 자리 깔고 누울 준비까지 마친 상태다.
아마 삼랑의 주군은 예결이 무얼 하든 내버려 둘 것이다. 주변에서만 죽어 나가겠지.
이대로라면 석 달 내로 진영이 위통을 호소하며 자신에게 찾아올 거다.
‘홍여야 뭐, 워낙 신선 같은 인간이니 아무런 생각 없을 거고. 나는 재밌으면 그만이지만 진영은 쓸데없이 섬세해서.’
별생각 없이 지켜보는 삼랑의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하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간을 배 밖에 꺼내 놓고 다니면 말리는 게 인간 된 도리가 아닐까.
삼랑은 생전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인간의 도의를 생각하며 심각한 시선으로 예결을 바라봤다.
“당연히 대사형은 불로초 같은 게 아니지.”
예결은 정색했다.
“불로초는 먹으면 없어지잖아.”
“그런 게 중요합니까?”
삼랑의 질문에 예결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서는 허락하셨습니까?”
어차피 내버려 두겠지만, 하고 생각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아니. 내가 간다는 것도 모르실걸.”
예결은 태연자약한 투로 답했다.
저번에 잠들었을 때 몰래 숨어들어 갔다가 목이 졸렸던 것도 그렇고, 하량을 좀 더 지근거리에서 지켜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거였다.
이렇게까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만, 하량은 자신이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결은 조금 만용을 부려보기로 했다.
“와.”
삼랑은 감탄했다.
“살면서 문 공자 같은 인간은 처음 봅니다.”
순수한 탄성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은근히 찝찝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뻔뻔한 예결은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 고마워. 이거 옮기는 것만 좀 도와줘.”
예결의 목을 감고 있던 뱀뱀이가 혀를 날름거렸다. 마치 삼랑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영물이면서 낯을 가리기라도 하는지 예결의 손목을 잘 벗어나지도 않던 뱀뱀이는 삼랑과 몇 번 특훈을 겪고 나더니 그녀의 앞에서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이리 주십시오.”
예결은 신이 나서 삼랑에게 짐을 좀 건네준 후 함께 하량의 거처로 향했다.
몇 번이나 건물을 왕복하는 사이 장원의 하인을 더러 마주쳤으나 그들은 의아한 얼굴을 할지언정 예결에게 무얼 하느냐고 따져 묻는 법이 없었다.
‘하여간. 신기하다니까.’
하량이 흑점의 일을 하는 걸 보면 사용인을 함부로 뽑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종종 저들의 행동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조금만 특이한 일이 있어도 핸드폰 카메라부터 들이대고 보는 현대에서 살다 와서 이런 위화감을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마침내 짐을 다 옮긴 예결은 하량이 퇴근할 때까지 문가에 방석을 가져다 놓고 털썩 앉았다. 삼랑을 시켜서 가져온 화로에 칼집 넣은 밤을 넣고 익어가는 걸 가만 구경할 때였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