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화씨지벽(4)
“대사형?”
고개를 돌린 예결이 그를 반가이 맞이했다.
“벌써 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하량의 낯에 미미한 기쁨이 스쳐 지나갔다. 예결이 야무지게 화로까지 가져다 놓고 뭔가를 하는 게 보였다.
화로 때문에 바닥에 그을음이 남을지도 몰랐으나, 하량은 설령 예결이 이 장원을 홀라당 태워 먹어도 그저 웃고 넘어갈 사내였기에 별 지적 같은 건 하지 않고 사제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무얼 하고 있었지?”
“별건 아니고, 그냥 밤을 굽고 있었어요.”
“진영을 닦달해서 일을 줄이긴 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일찍 돌아올 걸 그랬구나.”
“별로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걸요. 밤 드실래요?”
짐을 바리바리 옮기고도 하량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길어지자, 예결은 안절부절못하며 소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별채 창고에서 통통한 밤 한 소쿠리를 발견했다.
그렇게 자리를 펼쳐서 화로에 밤을 던져놓고 있노라니 자꾸만 머리가 멍해졌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만약 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상념에 잠겨 있던 예결은 밤이 타닥, 하고 익어가는 놀라 부지깽이로 뒤적였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하량이 돌아왔다.
“밤?”
예결은 보란 듯이 화로 옆에 놓은 부지깽이로 화로 안의 밤을 툭툭 건드렸다. 칼집까지 낸 게 눈에 들어왔다.
“추워서 가져다 놓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헤헤.”
남의 침실 안에서 밤을 굽고 있었으면서 뻔뻔하게 웃은 예결은 부지깽이로 밤을 들어 올렸다. 거의 화로 밖으로 꺼냈을 즈음, 툭 하고 튕겨 나간 밤이 다시 뜨뜻한 불 위에 안착했다.
“어라.”
부지깽이가 생각보다 길고 무거웠고, 밤이 둥그스름한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결은 다시 부지깽이로 목적하던 밤을 겨눴다. 이번에는 부지깽이가 밤의 표면에서 쓱 미끄러졌다.
“이게 잘 안 되네요.”
머쓱하다는 시선으로 밤을 노려보는데 하량이 픽 웃었다.
“이걸 꺼내고 싶은 게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로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예결이 깜짝 놀라 하량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는 이미 화로 안에서 밤을 꺼낸 뒤였다.
검댕조차 묻지 않은 손은 희기만 했다.
‘설마 대사형이 익힌 마공이 소수마공일까?’
예결은 무림의 역사에 악명 높은 마공 중 하나를 떠올리며 속상하다는 듯 하량의 두 손을 감쌌다.
“그러다가 손이 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고작 저 정도의 불길에는 데지 않는단다. 이렇게 손에 호신강기를 두르면.”
하량은 다시 화로 안에 손을 집어넣고 안을 뒤적여 저 아래 깔려 있던 밤을 꺼냈다.
“화상을 입을 일이 없지.”
“와…….”
예결은 신기하다는 듯 밤을 쥔 하량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밤에서 전해지는 열기 외에는 그리 뜨겁지도 않았다.
새삼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우리 대사형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네.’
에스퍼라고 해서 화상을 안 입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호신강기가 퍽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것도 꺼내주세요.”
처음엔 정색을 하더니 퍽 뻔뻔하게 요구하기 시작한 예결을 본 하량은 그가 시키는 대로 잘 익은 밤을 쏙쏙 골라내서 예결이 준비한 나무 쟁반 위에 올려놨다. 그럼 예결은 그걸 쥐고 후후 불어가며 껍질을 깠다.
노랗게 익은 군밤의 속살은 참 먹음직스러웠다. 예결은 화로를 뒤적거리는 하량의 입에 첫 밤을 쏙 밀어 넣었다.
하량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를 받아먹었다. 입술이 손가락 끝에 스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은 아니었는지 하량이 씩 웃는 게 보였다.
항주 때부터 느낀 건데, 하량은 의외로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잘 익었네. 이건 어디에서 난 밤이니?”
“별채 뒤에 밤나무가 있어서 지난가을에 모아놨던 모양이더라고요. 오늘 별채 여기저기를 들쑤시다가 잘 보관되어 있길래 들고나왔어요.”
“그래?”
왜 별채를 들쑤셨는지 묻지 않는 건 참 하량다웠다.
예결은 그 후로도 밤을 연거푸 세 개나 까서 하량의 입에 밀어 넣었다.
“나만 주지 말고 너도 먹어야지.”
“먹고 있어요.”
코끝이 간지러워서 쓱 훔친 예결은 하량이 갓 꺼낸 밤을 까려다가 멈칫했다.
대사형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꺼내서 이 밤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줄 몰랐다.
“앗, 뜨, 뜨거.”
양손에 주거니 받거니, 밤 한 알 가지고 어설픈 저글링을 하는 예결의 모습에 하량이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그건 내려놓고 조금만 기다리렴. 내가 까 주마.”
“안 돼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이 정색했다.
“이런 건 뜨겁다고 후후 불어가면서 까야 재미있는 거예요.”
“무어…….”
미적지근하게 답한 하량의 시선이 예결의 낯에 머물렀다.
“생각해보니 재미있긴 하구나.”
손을 뻗은 하량이 옷소매로 예결의 콧잔등을 훔쳤다. 부드럽고 화사한 비단 위에 묻어난 검댕에 예결은 기겁했다.
“아니 이게 언제 묻었담.”
민망함에 예결은 괜히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나 더 이상 묻어나는 건 없었다.
“글쎄.”
하량은 그답지 않게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귀엽더구나.”
“그야. 대사형은 얼굴에 검댕이 안 묻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죠.”
투덜거린 예결은 순간 떠오른 발상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아직 검은 게 묻어 있는 손을 내려다본 예결이 제 얼굴을 힐끔거리자 하량은 이를 눈치채고 답했다.
“직접 묻혀주려고?”
“들켰나요?”
예결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말했다. 실로 발칙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하량은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웃음에 놀랐다.
“어디 해보렴.”
그리 말한 대사형은 눈을 감고 잠자코 고개를 숙여 주었다.
정말 빙옥으로 깎은 듯, 서늘하고 투명한 느낌의 미남이었다. 진한 이목구비에 높은 콧대 하며 날카로운 턱선은 볼수록 감탄만 나왔다. 그저 거칠고 투박하기만 하다면 또 모를까, 얼굴선은 미려했고 속눈썹은 길고 섬세하다.
들여다볼수록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검댕을 바른다고 뭐가 달라지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흑심으로 가득했던 예결은 제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예결이 손을 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쪽 눈만 뜻 하량이 놀리듯 물었다.
“아직 멀었니?”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못 하겠어요.”
“당하는 건 난데 왜 결이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지?”
“그런 게 있어요.”
입술을 삐죽인 예결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라고 판을 깔아주셔서 그래요.”
“그래?”
하량이 예결의 손등을 감싸더니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마치 종이 위에 붓으로 그려낸 먹선처럼, 하량의 뺨에 검댕이 자리 잡았다.
“으아, 으아아…….”
예결은 이상한 탄성과 신음을 반복해서 냈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도 잘생겼다.
한국이었다면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캐스팅 당해서 천만 영화를 찍고 해외 유수의 영화제 레드카펫에 섰을지도 모르겠다.
‘……중원에는 인터넷이 없어서 다행이야.’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예결의 모습을 보던 하량이 물었다.
“얼마나 못나 보이길래 말도 못 하는 거니?”
그 질문에 예결은 하량이 본인이 잘생겼다는 사실에 큰 자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워낙 세기의 천재라서 주변의 칭찬이 죄 무공으로 쏠리다 보니 잘생겼다는 말을 들을 일이 별로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니에요.”
예결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저한테만 보여주셔야 해요.”
“너 말고 누가 내 얼굴에 검댕을 묻힌다고.”
하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혼자 보겠다는 걸 보면 마냥 나쁘진 않은 모양이구나.”
“대사형은 눈치가 너무 빨라요.”
예결은 하량이 그랬던 것처럼 옷소매를 끌어 올려 그의 뺨을 쓱쓱 닦아냈다. 몇 번이고 문지른 볼은 마치 상기된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을 떼고 제 작품을 감상한 예결은 하량의 입술에 대뜸 쪽 하고 입을 맞추고 몸을 뒤로 물렸다.
“잘생겼다.”
놀라서 눈을 깜빡깜빡한 사내가 웃으며 예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음에 드니?”
“네에.”
“그럼 네 것 하렴.”
실로 후하기 짝이 없었다.
“제 거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오늘처럼 화선지로 쓰거나, 또 이렇게-”
그리 말한 하량이 고개를 숙였다. 예결의 아랫입술을 빨아당기고 핥아 올리고는 부러 쪽, 하고 큰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마무리한 사내가 속삭였다.
“마음대로 접문을 해도 되지.”
얼굴이 확 달아오른 예결은 하량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었다.
소리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하량의 옷을 거의 쥐어뜯을 것처럼 힘을 주는데, 대사형은 아이 어르듯 예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잔떨림이 느껴지는 게, 하량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예결은 팩 몸을 돌려서는 그의 가슴에 기댔다. 아까 열심히 깠던 밤을 끌어와 전투적으로 먹어 치우는데 하량이 예결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괬다.
“네가 밤을 이리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맛있잖아요.”
예결은 보지도 않은 채 하량의 입에 밤을 가져다 댔다. 그래도 퍽 익숙해졌는지 별 반항 없이 받아먹은 하량은 밤 부스러기가 남은 예결의 손가락을 슬쩍 핥았다. 말캉한 감촉에 예결은 조금 움찔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밤 까는 일에 골몰했다.
사실 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하량이 커다란 곰 인형처럼 자신에게 치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없는 일을 만들어가며 하는 중이었다.
“이런 일로 무공을 사용해본 건 처음이다.”
무슨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양 속살거리는 하량의 음성에 예결이 되물었다.
“화로에서 밤 꺼내주신 거요?”
“그래. 그런 것.”
“제가 할 수 있었는데.”
이게 다 삼랑이 가져다준 부지깽이가 부실해서라는 누명을 씌울 작정으로 예결이 슬쩍 운을 뗐다.
“물론이지. 그저 내가 조바심이 나더구나.”
“조바심이요?”
대사형에게 그런 게 있냐는 투였다.
하량 한정으로 지독한 콩깍지가 끼는 예결다운 발언이었다. 정작 하량은 사제가 장난 섞인 너스레를 떤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답했다.
“네가 열심히 구웠을 밤이 그 잠깐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 타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단다.”
그래서 손부터 나갔구나.
예결은 이럴 땐 대사형이 참 무림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에스퍼는 화로에서 밤을 꺼내려면 머리를 굴려야 하지만 대사형은 무림인답게 피지컬로 해결을 보는 거다.
그게 왠지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자꾸만 간질간질해진다.
“화로에 밤을 굽는 게 괜찮은 생각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손도 옷도 얼룩덜룩해졌네요. 자기 전에 씻고 올게요.”
“음?”
예결의 말에 하량이 반응했다. 여기에서 자고 가겠다는 행간을 읽은 까닭이었다.
에스퍼가 얼마나 저돌적이 될 수 있는지 모르는 천진한 가이드는 제 사제에게 물었다.
“예서 눈을 붙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