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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69화 (169/203)

169화. 화씨지벽(5)

당혹과 의아함 사이의 감정이 하량의 낯에 스쳤다.

“정확히는, 약속했던 대로 대사형을 재워 드려야지요.”

바로 어제도 재워 주겠노라 쳐들어와서는 자장가를 요구했던 뻔뻔한 침입자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가 군밤 하나 못 꺼내서 조금 못 미덥긴 하시겠지만…… 그래도 책임감은 투철하다고요.”

예결은 부러 능청을 떨었다.

그는 하량의 말에 깃든 함의를 알았다.

아침에 진영이 오긴 했지만 분명 대사형은 그를 물리고 예결을 취할 수 있었을 거다. 하량이 조금만 욕심을 냈다면 그들은 침상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으리라.

그럼에도 하량은 결국 참아냈다. 이제 겨우 싹을 낸 관계 때문에 조심스러워하는 건 이해가 갔다.

단지, 예결이 원하는 것은 하량의 인내심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이대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물론, 나는 네가 약속한 바를 지킬 것을 알지.”

하량이 유려한 말씨로 답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한 발짝 늦게 나온 걸 알아챈 예결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혹, 제가 대사형의 사적인 공간으로 파고들어서 불편하신 거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예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젠 거의 숨 쉬는 것보다 익숙해진 가증이었다.

하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한숨 아닌 한숨을 삼킨 대사형이 예결에게 속삭였다.

“네가 불편하다기보다는, 내 자신이 걱정이구나.”

“어떤 면에서요?”

검댕을 훌훌 털어내며 몸을 일으킨 예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침에.”

잠깐 사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는지 잇자국이 생겼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였다.

“분명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참지 못했거든. 한 번 저지른 실수는 두 번, 세 번이 되기 마련이니 그게 걱정이란다.”

“아.”

하량의 낯에는 참으로 가지런한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인제 와서 죄책감은 좀 늦은 거 같은데…….’

비록 흑귀의 모습이었다고 한들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운우지락을 나눴다. 몸을 섞은 횟수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하량이 예결을 다루던 방식은 지독하게 음탕하고 농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장가 다 갔다고.’

그래 놓고 시치미를 떼는 낯은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결은 제가 일어서며 내려다보게 된 하량의 낯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재가 묻지 않은 옷소매로 손을 가린 예결은 불쑥 하량의 턱을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공격이라 생각하고 반응하려 한 건지 하량의 어깨가 움찔했으나 상대가 예결임을 알기에 그는 주춤했다.

예결은 에스퍼다운 민첩함으로 그 빈틈을 잡아챘다. 고개를 숙여 하량의 입술 위에 입술을 겹쳤다.

아랫입술을 날름 핥은 예결은 놀라서 벌어진 대사형의 잇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라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대신, 한 사람만 상대한 까닭에 하량이 무얼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겹친 입술 사이로 호흡이 뒤섞였다. 말캉한 온기와 달아오른 시선도.

이래서 몸을 섞는다는 행위는 중독적인 구석이 있었다. 때때로 마음마저 섞을 수 있다는 착각이 들지 않나.

하량은 차마 예결을 붙잡지도,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놓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면 난생처음 입을 맞추는 서투른 소년 같기도 했다.

이게 연기라면 예결은 기꺼이 속아줄 자신이 있었다. 그처럼 날것 그대로의 전율이 맞닿은 하량의 몸을 통해 전해졌다.

입술을 떼며 요란하게 쪽, 소리를 낸 예결은 하량의 손등을 슬쩍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쪽을 바라보는 대사형의 망연한 시선에는 가학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실수 아닌데.”

혼잣말이라도 하는 양 중얼거린 예결은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하여간. 이놈의 성질머리.’

하량은 뒤늦게나마 손을 뻗어 예결을 붙들려 했으나 그는 보고야 말았다.

돌아선 사제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어 있음을.

‘결아…….’

예결이 방을 나선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있었던 하량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제법 살풍경하던 공간에 전에 없던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적당히 부려 놓은 옷가지라든가 나무로 된 머리빗이며 묵직해 보이는 수반 같은 잡동사니들. 그리고 또 어둑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그마한 황금빛 뱀도 보였다. 미동이 거의 없는 게 푹 쉬는 모양이었다.

고작 그뿐인데, 생활감이 묻어났다. 진정 예결이 여기에 아주 머물 생각으로 왔다는 게 절로 느껴졌다.

이런 건 예상치 못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처음 머릿속에 든 생각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긴 순간부터, 일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만 했다.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계산에 넣을 겨를조차 없이 저지른 입맞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 모든 게 거짓말처럼 잘 풀리고 있었다.

예결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 역시도 알고 있었기에 하량은 먼저 손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그랬는데…….’

하량은 사제가 입맞춤을 남기고 간 제 입술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치웠다.

방금 전의 접문을 되도록 오래 곱씹고 싶었다.

그는 제 얼굴이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치 설산에도 노을이 지는 것처럼, 하량의 낯에는 서먹한 홍조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지 않아 예결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마른세수를 했을까, 거침없이 이 방으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건 신중한 진영의 것과도, 조심스러운 하인들의 것과도 달랐다.

하량은 예결의 걸음이 성큼 다가올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그를 따라 울리는 걸 느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가 딱 그 꼴이었다.

장지문이 스륵 열리고 예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머리에서 물기를 툭툭 털어내며 돌아온 예결은 다 타들어 간 화로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하량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성큼 다가온 예결이 하량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계속 이러고 계셨어요?”

그제야 지독한 금제에서 풀려난 하량이 자신의 사제를 마주 안았다.

품에 쏙 들어와 낭창하게 감기는 몸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여리고 가늘면서도 탄력이 있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러니 상을 다오.”

두 손 두 발이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더라도 같은 말로 답했으리라.

“상?”

“이런 것.”

기다렸다는 듯, 하량은 예결의 콧잔등 위에, 눈꺼풀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럽고 말캉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감촉에 예결의 입매에서 웃음이 샐샐 새어 나왔다.

해결할 일은 산적해 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걸 가진 기분이었다.

“……잘 모르겠는데에.”

일부러 말꼬리를 늘여 빼며 기대감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예결을 본 하량은 피식 웃었다.

예결을 번쩍 들어 안은 하량은 그를 침상으로 데려갔다. 뒤로 누우며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밝은 갈색의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의 사제는 아무 걱정 없이 천진하고 맑아 보였다.

곤륜에서조차 이토록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쪽을 훔쳐보는 시선에는 선망이 깃들어 있긴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언제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었고, 예결은 하량을 어려워했다.

어쩌면 하량이 예결을 어려워했던 것만큼이나.

예결은 생명의 은인이었다가, 사제였다가, 또 그를 이승에 매어 놓는 저주스러운 속박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웠다.

다시 한번만 살아 숨 쉬는 것을 볼 수 있기를 꿈꿀 여유조차 없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제 손에 돌아왔다.

그리고 선뜻 품에 안기며 연모를 속삭인다.

“이런 건?”

옷 한 겹을 걸친 게 전부인 예결의 발목을 그러쥐었다. 한 줌이나 될까 말까 한 발목은 쉬이 꺾이고 쉬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하량은 그 연약함의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대, 대사형!”

연즉 그토록 과감하게 굴던 예결은 고작 발등에 입술을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바둥거림이 느껴졌으나 하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당초 쉬이 물러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길고 지난했던 세월 동안 하량을 진창에 처박고 강제로 복종을 맹세시키려 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량이 마음 깊이 우러나 진실로 발에 입 맞추고자 한 것은 그의 사제가 유일했다.

“좋은 냄새가 나.”

그는 예결의 종아리를 붙들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뒤집힌 옷자락 아래로 드러난 발그스름한 무릎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누르자 예결이 얼굴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떠는 게 손아귀로 전해져왔다.

기실, 벗어날 수 없는 곳에 가두고 밀어붙이는 건 사냥이지 구애가 아니었다.

다만 하량은 인간이 아닌, 짐승의 방식에 지독하게 익숙해진 사내였다.

“읏.”

예결은 제 허벅지를 틀어쥔 손길에 신음을 내뱉었다.

사제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듯, 하량은 고개를 들어 예결을 바라봤다. 저를 올려다보는 대사형의 시선에서, 예결은 검게 가라앉은 욕망을 발견했다.

그리 상냥하지도, 온화하지도 않으며 달콤하기보다는 쓰고 지독한 감정.

쉬이 벗어낼 수도 없고 털어낼 수도 없어 끈적끈적한 타르처럼 제 안에 들러붙어 있는 그림자.

‘좋아.’

제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게걸스러운 탐욕과 마주 본 예결은 무심코 희열했다.

“쉬이. 상을 달라고 하지 않았니.”

뱀처럼 다리 사이를 파고든 사내가 허벅지를 뭉근하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무른 살갗 위로 남는 붉은 손자국은 지독하게 자극적이었다.

허리끈을 느슨하게 풀어낸 하량은 예결이 입고 있던 옷을 잡아 벌렸다. 샅 안쪽으로 얼굴을 가져다 댄 하량이 입술을 묻었다.

“하읏……!”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파닥이려는 예결의 몸을 손쉽게 제압한 하량은 그의 무릎을 눌러 다리를 벌렸다. 예민한 살갗 위로 입술을 스칠 듯 말 듯 움직인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예결의 하반신을 가리던 옷자락 아래로 파고들었다.

“사, 사형. 거긴!”

덥고 습한 것이 제 성기를 감싸는 감각에 예결은 침상의 야금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지 않은 자극이었고 몸에 지독하게 아로새겨진 쾌감이 발끝까지 저릿저릿하게 퍼져나갔다.

아무리 참으려 애써도 들뜬 호흡 사이로, 교성이 드문드문 섞였다.

가리느니만 못한 옷자락 아래로, 하량의 머리가 움직이는 윤곽이 보였다. 깊게 빨아들였다가 머리를 뒤로 움직일 때마다 하량의 머리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지는 천은 야릇한 상상을 부추겼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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