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베갯머리송사 (2)
대사형의 거처에 마련된 탕옥은 예결이 지내는 별채에 있는 것보다 큰 편이었다.
예결이 깨어나자마자 씻을 걸 예상했는지 이미 받아져 있는 물에서는 더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슬금슬금 옷을 벗고 안에 들어간 예결은 몸을 구석구석 닦아냈다.
아래에서 질금질금 새는 정액을 처리하기 위해 온 것이긴 하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해야지.’
하량에게 맡기는 것보단 스스로 하는 게 낫지 않나.
다 큰 어른인 예결은 혼자서도 치과에 다녔다. 이것도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으…….”
탕옥의 벽에 울리는 제 목소리가 야릇하기 짝이 없었다.
아차, 싶어서 입을 꾹 다문 예결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스스로 아랫구멍을 벌리고 속에 든 걸 긁어내는 과정은 마냥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마차에 올라탔다가는 옷과 의자를 다 적실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잔뜩 부어 있던 하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득한 정사의 흔적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원래 단단히 닫혀 있던 그의 밀지는 손가락 두어 개는 수월하게 삼켰다.
하량이 박아넣은 곳까지 손가락이 닿을 턱이 없기에 애써 힘을 주고 낑낑거리는 동안 물이 몸에 찰싹찰싹 와닿는 소리가 야트막한 신음과 뒤섞였다
‘어딜 가나 목욕탕은 목소리가 울리네.’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목욕탕에 가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사람들의 목소리며 발걸음이 그렇게 울렸더랬다.
그때의 그 더운 공기도, 부연 수증기도 어쩐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음…….’
새삼 향수에 젖는 건 예결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밤에 꾼 꿈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적에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마 그럭저럭 괜찮은 가족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다.
조금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예결은 애써 상념을 털어내며 손을 움직였다. 얼른 준비를 마쳐야 해가 지기 전에 서녕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해 지면 움직이기 불편하지.’
길이 잘 닦인 것도 아니고 가로등도 없으니 밤에 돌아다니는 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예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아래를 헤집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백탁액 때문에 물이 부옇게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대체 얼마나…….”
얼마나 싸지른 거냐고, 채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한 까닭이었다.
‘대사형이네.’
어쩐지 순순히 보내준다 싶었다.
무시무시한 콩깍지가 낀 예결이라도 하량의 집요함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면모까지 다 더해서 제하량이라는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조금 오래 걸려서 와 봤다. 괜찮니?”
문 너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예결이 입술을 달싹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생각해보면 주저주저하다가 흘려보낸 시간이 꽤 길었다. 물도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는 미지근했다.
“혼자 처리하는 게 힘들면 내가 돕게 해 다오.”
“못 참으면 어떡해요?”
“별로 믿음은 안 가겠지만, 그래도 내 너와 한 약속을 어기진 않을 거란다.”
하량의 말에 예결은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대사형 말고, 제가 참을 자신이 없어서.”
예결은 왜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드냐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밖의 반응은 고요했다.
“그. 알았다. 침소에서 기다릴 테니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나오렴. 그러다가 감모 걸릴라.”
“네에.”
예결은 웅얼웅얼 답했다. 하량의 그림자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부산스레 움직여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얼추 준비를 마친 예결은 탕옥을 벗어났다. 방에서 기다리겠다던 하량은 처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예결이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기척을 눈치챈 사내가 이쪽으로 돌아봤다. 천천히 마주치는 시선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마음이 급해 물기를 닦아내지 않아 살갗에 살짝 달라붙은 옷이, 그리고 혼자 아래를 쑤석거렸던 방금 전까지의 일이 신경 쓰였다.
‘이럴 때는 뭐, 인사를 건네야 하는 건가?’
그것도 좀 이상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식이 되고 모든 것이 어색하다.
괜히 신경 쓰여 예결은 옷을 고쳐 여몄다.
“얼른 가요.”
“잠깐만…….”
하량은 예결을 슬쩍 끌어당겨 기둥 뒤에서 입 맞췄다.
“으음……. 흐으.”
예결은 자연스럽게 옷을 걷어내는 하량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순순히 물러난 손은 허벅지 어림에서 머무르다가 입맞춤과 함께 거둬졌다.
“보는 눈도 없는데 왜 숨어서…….”
“……글쎄.”
의미심장한 하량의 말에 예결은 깜짝 놀라 감각을 확장했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사형 진짜 미쳤냐고.’
저 놀려먹자고 여기 어디에 숨어 있는 호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대사형이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그, 혹시, 그럼 어젯밤에도……?”
뱀뱀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 빤히 알면서 예결은 잔뜩 긴장한 낯으로 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렴.”
하량은 딱 잘라 부정했다.
“다른 누가 네 신음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제법 아찔하구나.”
만약 예결을 상대로 엄한 상상이라도 하게 된다면 하량은 그 인간을 끌어다 놓고 귓구멍에 끓인 밀랍을 부을 것이다.
“……다행이에요. 누가 들었으면 어쩌나 했어요.”
그런 하량의 속내도 모르는 채, 예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량의 손에 붙들려 그의 처소에 돌아온 예결은 머리에 물기를 털어냈다. 잠시 자리를 비운 하량은 예결이 옷을 다 입을 무렵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긴 천이 달린 모자였다. 하량은 그걸 예결에게 건넸다. 모자에 매달린 하얀 너울은 그 너머가 비칠 듯 말 듯 불투명했다.
“멱리다.”
“이거 얼굴이 다 가려지겠는데요?”
답답한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예결은 이를 내려놓았으나 하량은 멱리를 건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멱리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예결에게 하량이 설명했다.
“저번에 서녕에 다녀오는 길에 살수를 만나지 않았니.”
하량이 댄 변명은 납득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전 때문이군요.”
예결은 의심치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외출 때 살수를 만났는데도 다시 서녕에 가는 게 두렵지도 않더냐?”
순간 예결은 아차, 싶었다.
아무래도 각성한 후부터는 어딜 가나 걸어서 움직이는 전략병기 취급당하던 에스퍼라 하량 선에서 전부 처리된 살수들은 위협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 사제는 대담한 건지, 아니면 이 우형을 지나치게 믿는 건지…….”
하량의 읊조림에 예결은 헤헤 웃으며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대사형이 곁에 있는데 소제가 무얼 두려워하겠어요.”
“녀석도.”
싫지 않다는 듯 예결의 콧방울을 아프지 않게 튕긴 하량이 중얼거렸다.
“너무 무방비해.”
예결은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방긋방긋 웃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가자.”
하량과 함께 마차에 오른 예결은 서녕성으로 가는 내내 일부러 그의 손을 잡았다. 신경이 쓰였는지 하량은 꼼지락거리는 예결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를 단단히 마주 잡았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는 사내의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운 날이었다.
어느새 서녕성에 도착한 예결은 마차에서 내렸다. 데이트니까 마부 같은 이 없이 단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갈까요?”
예결은 내내 잡고 있던 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하량은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몇 번이고 와본 서녕성이었으나 하량과 함께, 그것도 겨우 마음까지 섞은 직후의 방문이라 그런지 모든 게 특별하고 신기해 보였다.
“대사형, 저기 저거 보세요.”
예결은 처음 보는 독특한 품종의 말을 발견하고 멱리를 걷으며 말했다. 발목 쪽 털이 제법 수북했다. 하량이 너울을 다시 내려주며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데려올까?”
“승마는 힘들어요. 대사형이 태워주는 말만 탈래요.”
“듣기엔 좋구나.”
“빈말은 아닌데.”
오가는 대화가 장난스러움과 다정함 사이 어딘가를 맴돌았다. 예결은 그와 요릿집에를 가고, 찻집으로 건너가 재담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또 어딜 갈까요?”
예결은 슬쩍 너울을 걷으며 물었다.
“얼굴을 가리라고 준 건데 자꾸 걷으면 어떡하니.”
하량이 혀를 찼다. 예결이 기회만 있으면 은근슬쩍 너울을 걷는 게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걸 쓰고 있으면 앞이 잘 안 보여요.”
살수 문제가 거론되었으니 어지간하면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이 너울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온 세상이 불투명하게 보이는 것과 더불어, 대사형도 잘 안 보이게 된 것이다.
혼자 설레발을 치는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첫 데이트인데 블러 필터를 상시 적용한 채 돌아다니는 건 불합리했다.
‘대사형이라도 잘 보이면 몰라.’
“이 우형이 결이 네가 넘어지는 걸 두고 볼 것 같으니?”
대사형은 딱히 설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결은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그거 말고도 말을 할 때마다 너울이 이렇게 습.”
일부러 공기를 빨아들이니 가벼운 천이 입에 딱 달라붙었다.
“하고 달라붙어요.”
“계속 뒤로 밀어서 멱리가 젖혀졌구나. 내 손봐주마.”
하량이 멱리를 고쳐 씌워 주었다.
갑갑한 모자를 벗는 데 실패한 예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무방비한 게 아니라 대사형이 과보호인 거지만…….’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선배 에스퍼들은 아픈 척을 하려고 별짓을 다 해야 했다. 예결은 그냥 숨만 쉬어도 하량이 불면 꺼질세라 쥐면 터질세라 조심조심 다루니 이득인 셈이다.
“자꾸 벗으면…… 그땐 이 우형에게도 다 생각이 있단다.”
끈을 고쳐 묶어준 사내가 조용히 덧붙였다.
협박이라기엔 좀 짓궂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끔뻑끔뻑한 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내야 어떨진 몰라도 예결은 항상 대답만은 잘했다. 대답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