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베갯머리송사 (3)
“오늘따라 사람이 많구나.”
하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뭐 하나?”
“이국의 기예단이 오는 모양이야.”
잠시 주변의 소음에 귀를 기울인 하량이 알려줬다.
“재밌겠다. 우리 그것도 보러 가요.”
“너무 번잡하지 않겠니?”
“그래도, 대사형하고 나온 참에 그런 공연이 있다니 혹해서요.”
“음.”
“왜, 대사형하고 같이 나오면 항상 날이 좋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예결은 하량에게 몸을 붙이며 배시시 웃었다.
기실, 지금의 예결은 마른하늘에 벼락이 쳐도 천지신명의 축복으로 받아들였을 거다. 길을 가다가 엎어져 코피를 흘려도 뒤통수가 안 깨져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을 거고, 소매치기에게 당해 돈을 잃어도 꼭 필요한 곳으로 갔겠거니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근데 이거 진짜 치우면 안 돼요?”
예결은 너울을 툭툭 건드리며 졸랐다.
“대사형의 얼굴이 잘 안 보이는데…….”
첫 데이트라 그런지, 하량의 표정을 좀 더 면밀하게 살피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치 앞에서 들여다본다고 해서 대사형의 감정을 전부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때는 말고.”
망설이던 하량이 넌지시 속삭였다.
“단둘이 되면 그때.”
짤막하게 덧붙인 사내는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는지 예결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대사형, 대사형! 하고 당황한 척 그를 부르면서 뒤를 쫓는 예결의 낯에는 미소가 그득했다.
진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대사형이 수줍어할 때면 인내심이 확 닳아버렸다.
‘이럴 땐 너울이 있는 게 마냥 나쁘진 않네.’
히죽거려도 대사형에게 들킬 염려가 덜하지 않나.
예결은 와중에 두리번거리며 단둘이 빠져나갈 뒷골목이 없나, 하고 살폈다. 하지만 기예단이 오는 날이라 그런지 노점상이 저자에 쫙 깔려 있었고 억지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이동하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았다.
“여기 이가 빠진 작은 종이 있어요. 소리도 이상하다.”
하량은 예결이 가판의 물건을 구경하자 잠자코 그 뒤를 쫓으며 사제가 흥미로워한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와.”
그러다가 화려한 비녀를 발견한 예결은 하량의 머리에 꽂아 보고는 감탄했다. 아무리 봐도 여성용인 것 같은데 대사형에게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마음에 드니?”
예결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점에서 파는 물건인 만큼 장인의 품이 든 것보다 만듦새가 조금 조잡한데 대사형의 얼굴은 그마저도 우아하게 소화해냈다.
“네가 마음에 든다면야…….”
다른 이들이 저를 어찌 쳐다보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하량은 그 비녀를 사겠다고 노점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대뜸 비녀를 가져다 머리에 꽂을 때만 해도 도끼눈을 뜨고 보던 상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요새 세상이 험하다지만 어찌 아내에게 사내 옷을 입혀 돌아다니는 것입니까?”
찡긋하고 눈짓하며 비녀를 곱게 포장해주는 상인의 말에 하량이 무심히 대꾸했다.
“안사람이 워낙 고우니 심려가 되더군. 그럭저럭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부인이라는 걸 알아본 거지?”
와, 대사형 뻔뻔해.
예결은 감탄했다. 그러나 대사형과 부부 사이로 오해받은 것도, 하량이 이를 부정하지 않은 것도 퍽 마음에 들었기에 입을 다문 채 하량의 팔꿈치 쪽을 붙들고 뒤에 몸을 숨겼다.
“아무리 목소리를 걸걸하게 내려고 해도 부군이 그리 꿀 떨어지는 시선으로 보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건장한 사내에게 이렇게 화려한 비녀를 꽂아주는 것도 그렇고, 그걸 또 좋아라고 잠자코 있는 것도 그렇고, 라며 침이 튀기게 설명한 상인은 눈썹을 으쓱으쓱 움직이며 소곤소곤 덧붙였다.
“내 중원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이십 년을 했는데 척 보면 척이지.”
이걸 편견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할지.
하량은 셈을 치를 때 상인이 말한 가격의 두 배를 건네줬다.
“입막음 값이오.”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인.”
상인은 희희낙락하며 은자를 받아 챙겼다.
물건을 받자마자 예결과 하량은 한마음이라도 된 것처럼 바삐 상인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교환하거나 따로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적당히 거리를 벌리자마자 두 사람은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별일을 다 겪는군.”
“부인, 부인이래요……. 아, 웃겨. 어떡해.”
예결은 눈가에 찔끔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다가 하량에게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아니 그걸 또 왜 받아주고 있어요?”
이 상황을 빌어 저를 놀려먹으려는 사제의 짓궂은 기색을 읽은 것인지 하량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부인은 왜 가만히 있었소?”
대사형의 말에 예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응?”
넌지시 채근하는 말에 예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하량에게 손짓했다. 대사형은 어디 한번 들어보겠다는 듯 몸을 숙여주었다.
예결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야. 제가 어찌 상공을 모시는 몸임을 부정할 수 있겠어요?”
가가도 좋아했으니까, 상공이라고 해도 좋아하시겠지.
뭐 그런 가볍기 짝이 없는 추측에서 나온 애칭이었다.
“이제 장가 다 갔다고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 투덜거리는데, 어째 하량의 반응이 잠잠했다. 뭐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올린 예결은 불투명한 너울 너머로 멍하니 얼어붙은 제하량을 발견했다.
“대사형?”
“……아.”
하량은 황급히 옷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왜요? 왜 그러세요?”
예결은 발꿈치를 들고 기웃거렸다. 그러나 끝내 하량의 얼굴을 확인하는 건 실패했다. 그가 예결을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정말 기예단의 공연까지 봐야겠느냐?”
장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게 절절히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네에. 꼭 볼 거예요.”
예결은 단호하게 답했다. 그는 에스퍼 역사에 두루 회자할 완벽한 데이트를 하겠다는 야심으로 만만했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한 하량은 오래지 않아 평정을 회복하고는 예결과 함께 저자 탐방을 재개했다.
다만, 예결은 저를 쥐는 손에 때때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너울 안쪽에서 실없이 피식피식 웃어버렸다.
대사형을 어떻게든 손에 넣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조차도 이런 완벽한 형태를 상상하진 못했다. 그런데 이토록 일이 잘 풀리다니, 모든 게 꿈결 같다.
예결은 나무를 깎아 만드는 한 노점상 앞에 멈추어 섰다. 뱀을 조각한 나무상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몽당연필처럼 앙증맞았다.
역시 뱀뱀이처럼 귀여운 뱀은 드물다고 생각하며 예결은 그 조각상을 가리켰다.
“이거 조각상 너무 못생겼어요.”
“음, 뭐라고?”
거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예결의 답을 듣지 못한 하량은 반사적으로 값을 치르며 되물었다.
사지 말라고 말리려 했던 예결은 상인이 희희낙락하며 은자를 챙기는 걸 보고 너울을 휙 걷었다.
“그러니까요……!”
사라는 게 아니라!
저를 끌어당기는 손에 순순히 끌려온 사내의 몸이 지나가던 이에게 툭, 하고 밀리며 예결에게로 기울었다.
순간, 예결은 대사형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바투 다가선 거리에 시선이 맞물렸다.
예결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 분명, 다 생각이 있다고 하였거늘…….”
하량이 모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노점과 노점의 사이, 엉성하게 친 천막 덕에 생긴 공간으로 예결을 끌어들였다.
예결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었다. 하량이 예결을 향해 몸을 더 기울였다. 주변의 이목이 여기로 몰리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정작 상인은 돈을 셈하느라 바빴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갈 길을 가느라 분주해서 이런 구석 따위 들여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 안 돼요.”
하량이 바투 다가서자 예결은 헛, 하고 다급하게 멱리를 걷은 손을 치웠다.
저와 예결의 사이에 도로 자리 잡은 불투명한 너울에 하량이 우뚝 멈췄다.
‘어차피 대사형이 준 거고, 얼굴 잘 가리랬으니까.’
저는 잘못 없다는 듯, 예결은 제법 뻔뻔하게 그를 마주 바라봤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그를 마주 바라봤다.
사내가 가만히 웃었다.
‘아…….’
왜 그 언젠가, 멀리서 하량을 훔쳐보던 일이 떠올랐다. 무림 대회 직후였던가. 곤륜에 돌아온 그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축하받고 있었다. 예결은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먼발치에서 하량을 훔쳐봤다.
짝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조차 무색할 정도로 풋내 나는 동경이었다. 차마 가까이 다가서서 우승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지도 못한 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하량은 지금처럼 그린 듯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당시의 하량은 저를 향해 웃어주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예결은 나름대로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옛 기억이었다.
‘왜 하필 그때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수런거렸다.
예결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하량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두드렸다.
그림자가 먼저 내리고, 예결은 하량이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한 겹의 얇은 천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혀를 섞는 것도 아니고 더운 호흡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간지럽게 살짝 스쳤다가 떨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치 꽃잎을 심장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설렜다.
“아…….”
고작 한 걸음, 아니 반걸음쯤 뒤에 있는 저자는 여전히 인기척이 가득했다. 예결의 꽁무니에는 온갖 소음이 매달려 있었는데도, 그런데도 모든 게 멀게 느껴졌다.
이 순간, 하량과 단둘이 남은 기분이었다.
“잘 쓰고 다닐 거지?”
사내가 멱리 너머로 아른아른 비치는 예결의 콧잔등을 톡, 하고 건드리며 물었다.
나직한 음성에 마치 마법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예결은 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네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