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베갯머리송사 (4)
“음. 생각해보니 내 사제의 얼굴을 못 보는 건 좀 아쉬운데…….”
“아뇨. 잘 쓰고 다닐 수 있어요.”
예결은 화끈거리는 얼굴에 대고 손부채질했다.
“더워 보이는구나. 잠시 다관에서 쉬어 갈까?”
때마침 바로 앞에 다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결은 조금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서 하량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무엇보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차는 어떤 걸로?”
“무조건 냉차요.”
다관의 점소이에게 안내를 받아 착석한 자리는 활짝 열린 문에서 가까웠다. 워낙 사람이 밀려드는 바람에 임시로 자리를 늘린 티가 났다.
뭐 경치를 볼 것도 아니고 목만 축이면 그만이었기에 예결은 하량이 점소이에게 주문하는 걸 지켜봤다.
아무렇게나 걸어들어온 손님이 동정벽라춘을 시키자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오래지 않아 간단한 다과와 차를 내왔다.
“이게 냉차구나.”
하량은 냉차가 든 잔을 건네주며 은근슬쩍 예결의 손목 안쪽을 문질렀다. 예결은 순간 찻잔을 놓칠 뻔하고는 멱리 너머로 하량을 흘겨봤다.
“조심해야지.”
이쪽을 바라보는 대사형의 표정은 온화하기 짝이 없어서 전혀 고의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와…… 진짜…….’
하량이 이렇게 능청을 떨 때면 과연 그가 흑귀가 동일 인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대사형은 파문당한 후 흑점으로 향하신 모양인데.’
한번 파문당한 자는 주홍글씨를 매단 거나 다름없다. 정파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철저히 짓밟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마교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간신히 빠져나왔다가 사문에 버림받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무덤이거나, 아니면 정파를 영원히 등진 채 사파의 낭인으로 떠돌거나.
하여 제하량은 그 나름대로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흑점으로 흘러 들어갔으리라.
‘……그렇게 차근차근 흑점의 위로 올라갔을 테고.’
상식적으로, 사람이 흑점 같은 곳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직업을 가지기 어렵다.
대사형의 출장이 잦은 것도 그렇고, 홍여와 삼랑의 무위며 살수의 등장도 전부 말이 된다.
뒷세계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청해상단의 규모는 설명이 안 되지만. 그것도 뭐. 대사형이 일개 간부가 아니라 흑점의 주인이라면 이해할 수 있어.’
일종의 돈세탁 용도로 만든 상단이니 큰 사업을 벌이지 않아도 자금이 항상 풍족한 것까지도 아귀가 들어맞는다.
‘이건 언제 알려주시려나.’
이미 과거사도 털어놓은 하량이 이런 걸 끝까지 숨길 것 같진 않았다.
여태 비밀로 한 건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제 앞에서 부끄러운 사형이 되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거다.
살살 긁다 보면 어떻게든 고백해줄 거다.
예결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턱을 괸 채 하량을 바라보던 예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호로 먹고 싶어요.”
“당호로?”
“다관 들어오기 전에 봤는데, 저 건너편에서 팔고 있었어요.”
사실 설탕물 입힌 과일꼬치를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하량이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보고 싶었다.
‘무슨 냉차를 마셔도 얼굴이 뜨거워.’
또, 계속 마주 보고 있다가는 장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싸구려 객잔이라도 좋으니 방을 한 칸 잡아버릴까 걱정이었다.
“혼자 다녀오라고?”
하량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저는 짐을 지키고 있어야죠.”
예결은 저자를 돌아다니며 쓸어 담은 온갖 잡동사니를 가리켰다. 하량과 함께 구경한 물건이라는 이유로 한 개 두 개 사들이다 보니 어느새 잔뜩 쌓여버렸다.
“혼자 있을 수 있겠니?”
“제가 뭐, 앤가요?”
예결은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하량은 선뜻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찰나의 망설임을 기민하게 읽어낸 예결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하량은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물론. 결이 너는 아주 믿음직스럽지.”
“이번만 믿어드릴게요.”
밉지 않게 눈을 흘긴 예결은 오래가지 못하고 픽 웃어버렸다. 예결과 시선을 마주친 하량도 그답지 않게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금방 다녀오마.”
하량은 가벼운 걸음으로 다관 밖을 나섰다. 멱리를 살짝 걷어 그 사이로 찻잔을 들고 마시던 예결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어제부터 죽,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꽃이 피는 것만 봐도 히죽거리던 한 선배 에스퍼가 떠올랐다. 그는 한 가이드와 각인을 한 뒤부터 사람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푼수가 됐다.
대체 왜 그러냐는 질문에 선배가 답했다.
‘사랑을 하고 있어서야.’
그땐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무시하며 지나쳤던 거 같은데, 지금 와 겪어보니 과연 선배의 말이 옳았다.
예결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한.
‘언제 오시려나.’
당호로를 파는 노점상 앞에 줄이 그렇게 길었나? 하며 기억을 되새기며 예결은 히죽 웃었다.
제하량이 남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당호로를 사 오는 걸 상상하니 어쩐지 귀여웠다. 생각해보면 짐을 지키겠다고 여기에 있을 게 아니라, 따라가서 그걸 지켜봐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에라도 일어나고 싶어 예결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예결의 손목을 낚아챘다. 사람이 너무 많은 통에 일부러 감각을 죽이고 있어서 접근 자체를 알아채지 못했던 예결은 이를 반사적으로 휙 털어냈다.
그러나 상대의 손은 마치 뱀처럼 예결의 손목을 휘감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예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창백한 낯을 한 남궁운이 서 있었다.
“접니다.”
***
곤륜에서 온 회신을 읽은 남궁운의 입매가 굳었다.
백양진인은 한사코 그 마두의 정체를 밝히길 거부했다. 그저, 한때 곤륜과 인연이 있었고, 그 때문에 곤륜의 제자에 대한 집착이 강한 광인이라고만 서술했을 뿐이다.
‘이래서야…….’
남궁운은 갑갑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남궁세가의 소가주라지만 별 명분 없이 가문의 무사들을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창궁비연대 같은 강력한 검수가 포함된 집단은 가주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나 혼자서는 승산이 없다.’
남궁운은 교룡선과 서녕성에서의 암살 사건 당시 예결의 호위로 붙어 있는 삼랑의 실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물며 남궁운은 예결을 그냥 빼돌리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지켜내야 했다.
전장에서 적을 배제하는 싸움보다,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싸움이 더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렵다.’
남궁운은 심란한 마음에 방 안을 서성였다.
그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군.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서 들라.”
문이 열리고 들어온 수하가 부복하며 말했다.
“일전에 언질을 주신대로 대로와 서녕성의 관문에 눈을 심어두었는데, 청해상단주가 통과하는 걸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정말이냐?”
남궁운의 낯에 화색이 맴돌았다. 일단 예결을 만나보고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행이 있었다더군요. 조금 가까이 가서 살피려 했으나 이쪽을 기민하게 알아챈지라 사람들의 틈에 섞여 물러났다고 합니다.”
예결의 동행이라면 분명 삼랑일 거라 판단한 남궁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였다. 외출 준비를 하거라.”
“존명.”
남궁운은 그길로 예결을 찾아 나섰다. 인파가 유독 몰린 날이라 그런지 예결을 찾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천지신명이 보우하였는지 다행스럽게도, 남궁운은 대로와 상단으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예결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멱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였으나 체구며 몸짓이 눈에 익었기에 남궁운은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다만, 예결의 동행은 남궁운이 무심코 짐작한 삼랑이 아니었다.
‘……저자는?’
저 남자가 의원을 찾아왔을 때, 예결은 그를 반색하며 맞이했다. 예결과는 사형제지간인 것처럼 굴었다.
분명 이름이…….
‘제하량, 이었지.’
이젠 저 남자가 백양진인이 언급할 마두일 수 있음을 아는 남궁운은 숨을 죽였다.
예결의 머릿속을 어떻게 주물러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납치범 주제에 사형을 자처하다니, 악취미도 그런 악취미가 없었다.
무심코 주먹을 움켜쥔 남궁운은 손에서 힘을 풀고 마음을 다스렸다.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합류해야 했다.
그리고 예결을…….
[쉿. 이쪽으로 붙으시오.]
성큼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남궁운을 골목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전음 덕에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남궁운은 출수하는 대신 그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의 틈바구니로 모습을 감췄다.
상대는 남궁운을 더 넓고, 더 번화하여 행인이 많은 거리로 끌고 갔다. 남궁운은 무심코 예결을 확인하려 했으나 노인이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끌어당겼다.
[숨을 죽이시오, 남궁 공자! 저쪽은 바라보지도 말고.]
지엄하게 꾸짖는 음성은 평소 반죽이 좋던 이답지 않았다.
[황 장로. 이게 무슨……?]
[조용히.]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으나 그의 눈만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상대는 황걸개로, 무려 개방의 장로였다.
골목으로 들어와 단둘이 된 후에야 황걸개는 남궁운을 풀어주었다. 기민하게 주변을 살핀 늙은 거지가 돌아와 남궁운에게 속삭였다.
“대체 저기가 어디라고 나서려 하신 겁니까? 소가주가 남궁의 대를 끊으려는 줄은 몰랐소이다.”
“아직 아버님께서 정정하신데 남궁의 대를 끊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럼.”
황걸개가 당황한 낯으로 멈칫했다.
“의기 때문에 분연히 나서려는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장로께서 무얼 의미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저 지인을 발견해서 인사를 하러 가려던 것뿐이었습니다.”
남궁운은 시치미를 뗐다. 상대가 가진 패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럴 땐 고지식하게 생긴 덕을 보는군.‘
아니나 다를까, 황걸개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지인이라니! 어찌 그런 일이……!”
“황 장로야말로…….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지인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고 하여 남궁의 대가 끊어진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남궁운은 황걸개의 손을 털어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 따라가야겠습니다.”
“가지 마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궁 공자가 알아야 할 것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