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베갯머리송사 (6)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는 태도였다.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제법……. 잘 아는데?’
예결은 멈칫했다.
타이밍 때문에 크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일 테지만 실상은 타격감이 제로였다. 예결은 이십 년 전에 죽은, 바로 그 사제였으니까.
개방의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게 과연 허언은 아니구나 싶었다.
적노개의 제자라더니,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믿을 수 없습니다. 물러가 주세요.”
상식적으로라면, 황걸개의 우려는 옳다.
예결이라도 아는 선배 에스퍼가 이십 년 전에 죽은 자기 가이드와 닮았고,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일인 취급하고 있으면 기절시키고 센터 상담실에 데려다 놓을 테니까.
“그가 눈치를 채고 쫓아오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하오. 내 당장은 어렵지만, 개방의 이름을 걸고 곤륜에 있는 당신의 사부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반드시 약속하리다.”
“필요 없습니다.”
예결은 고개를 내저었다. 꽃다운 내 님을 두고 그 징글징글한 사부를 만나러 갈 이유가 없다.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가면 반항과 도주를 불사하겠다는 결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예결. 안 됩니다.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제 사형이 왜 위험한지는 한 마디도 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도망치라고만 하는군요.”
아무리 가이드를 상대라지만 이쯤 되니 예결의 목소리에도 날이 섰다.
남궁운이 초조한 낯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말하길 종용하던 예결에게 황걸개의 목소리가 먼저 와닿았다.
“……그에게, 그 마두에게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소.”
“그래도 저는 언제나 제게 상냥하고 다정하셨던 대사형을 믿지, 다짜고짜 저를 납치한 사람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예결은 부러 남궁운을 외면했다.
“정말 지독하게 세뇌당했군.”
황걸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잠시 남궁운과 시선을 교환한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결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당신이 대사형이라 부르는 자는.”
잠시 뜸을 들인 노인이 전음으로 속삭였다.
[당대의 천마, 제하량이오.]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뭐, 천마?
예결은 눈을 끔뻑였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을 더듬어 천마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무협지에서의 천마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악이다. 실제 강호에서의 천마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저자를 넘나드는 소문만 주워섬긴다면 천마는 오두육비의 괴물이며 창과 검을 동시에 쓰고 마공을 익히기 위해 동남동녀의 피를 취하는 끔찍한 존재다.
용사물의 대마왕이고 좀비물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서바이벌물의 게임 주최자…… 그리고 예결이 환생한 한국에서라면 반정부 연합의 장 정도가 그에 해당할까.
‘그러니까, 지금 내 사형이 악당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
“……천마라니.”
제하량은, 그는 예결의 영웅이었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고아 소년을 찾아냈고 삶으로 이끌었다.
당대 무림에 비할 자 없는 기재 중의 기재였으며, 외진 청해에 자리 잡아 항상 강호의 중대사로부터 한 발짝 밀려나 있던 곤륜의 이름을 저 높은 곳에서 빛내줄 존재였다.
저 한 몸보다는 사형제의 안위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 제하량이 이끌던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그의 의기와 협행에 깊이 감화되어 저마다 중원을 떠돌며 악인들을 처단하고 사람들을 구했다.
그 시절의 하량은 모두의 것이라서, 예결은 차마 그가 그립다는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어도 배가 불렀고, 항상 무겁게 느껴지던 목검과 사부님의 무심한 꾸짖음조차 달게 느껴졌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제하량의 발치에나마 닿을 수 있는 고수가 되어 그의 협행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예결이 아는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노개께서 무얼 잘못 안 모양입니다.”
예결은 파들파들 떨리는 입매를 애써 끌어 올렸다.
억지웃음에서 묻어나는 필사적인 부정에 남궁운이 예결, 하고 부르며 손을 뻗으려 했으나 그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럴 리가요.”
우리 대사형이 정도만 걷던 사내였으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길을 빙 돌아가게 되었을 뿐이다.
‘마교에서, 아무리 강제였다지만 마공을 익혀서……. 그래서 사문에 버려졌을 뿐인데.’
흑점 일이 그리 떳떳하다고 말하긴 어려울 테지만, 그래도 천마 같은 존재로 오인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도리질한 예결의 입에서 거듭 부정이 흘러나왔으나 두 번째에는 그리 힘이 없었다.
하량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문 예결은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런 걸 이들 앞에서 내보일 수 없다. 지켜주겠다는 이유로 납치까지 불사한 걸 보면, 이대로 중원 반대편까지 끌려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러가 주세요.”
예결의 음성이 매서운 채찍처럼 황걸개와 남궁운을 내리쳤다.
지금의 그는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와도 같았다.
“나는 한때 개방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들은 가당찮은 소리는 없는 일인 셈 치겠습니다.”
예결은 낯을 일그러뜨리지만 않았을 뿐, 평정을 잃었다.
“예결…….”
남궁운이 성큼 다가섰으나 예결은 그 한걸음에 불에 데기라도 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나 씨근덕거렸다.
“감히 내 대사형에게…… 천마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속이 메슥거리고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하량을 위해 죽은 것이, 이 하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삶에 한 선택 중 제일 잘한 것이었다. 분명 그랬을진대…….
“결아?”
나직한 부름에 예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량이 거기에 서 있었다.
“예 있었구나.”
손에는 설탕물을 입혀 반짝이는 붉은 산사나무 열매를 촘촘히 꿴 꼬치를 들고서, 더없이 난처하고 곤혹스러워 보이는 낯으로.
“내겐 당호로를 사다 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숨바꼭질을 시킬 줄은 몰랐다.”
예결이 골라준 하얀 옷을 입은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선인처럼 보였다. 살짝 좁아진 미간과 염려가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저를 향한 다정한 시선까지 모두.
그 모두가 예결이 아는 고지식하고 선량한 제하량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데 왜……. 왜 이렇게 낯설어 보이지?’
이게 다 황걸개가 한 말 때문이 분명했다.
“어떻게 쫓아온 거지?”
용모파기로만 접해왔던 천마의 실물을 목도한 황걸개는 침음했다.
겉보기야 헌헌장부와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손에는 아이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당호로를 들고 있지 않나.
하나, 아무도 없던 골목길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제하량의 존재는 귀기마저 느껴졌다.
“설마, 저 아해에게 천리추종향을 뿌린 건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개체만이 감지할 수 있는 천리추종향은 보통 살수가 사용한다. 목표물이 사라져도 끝까지 뒤쫓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죄인에게 묻혀 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앞에서는 저 청년이 껌뻑 죽을 정도로 다정하게 굴어 놓고, 뒤에서는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게 천리추종향 따위를 뿌려 놓았단 말인가?
황걸개는 천마의 지독한 집착에 절로 낯이 굳었다.
‘대체, 스무 해 전에 죽었다는 그 곤륜의 제자가 어떤 존재였길래?’
노거지가 충격을 받거나 말거나, 예결은 필사적인 시선으로 하량을 바라봤다.
어젯밤에는 몸을 섞고, 조금 전까지 자신과 웃으며 데이트하고 있던 남자였다. 예결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대사형, 이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해요.”
흡사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느껴질 걸 알면서도, 예결은 입을 열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죠……? 대사형이 천마일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필사적으로 대사형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의 낯에는 조금의 동요도 번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정체를 폭로 당한 이 특유의 분노조차 없다.
“예결. 그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남궁운이 예결을 말리기 위해 접근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는 날 선 물체에 베인 듯한 상흔이 생기더니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큭……!”
어느 순간부터인가, 거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마치 칼날과도 같아서, 남궁운과 황걸개를 예결로부터 갈라놓았다.
“예……결……!”
성큼 다가서려 할 때마다 남궁운의 옷이 찢어지고 그의 살갗에 숱한 생채기가 생겨났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휘날렸으며, 황걸개는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타구봉을 땅에 박아넣었다.
그러고도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난 노개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서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람 한 점 들지 않던 좁은 골목길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은 결국 원인이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제하량.
“대체, 대체 마공으로 얼마나 성취를 이루었기에……!”
황걸개가 탄식했다.
만약 천마가 마교가 아니라 정파의 인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탄식을 하는 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이르러 직접 대면하기 전까진 실감하지 못했다.
예결은 바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절망 어린 탄식에도 불구하고 돌아보기는커녕, 정면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묵묵히 서 있는 사내를, 자신의 정인을 끊임없이 탐색했다.
“대답해 주세요.”
이 좁은 길을 휘도는 돌풍은 예결의 머리카락조차 건드렸다. 남궁운을 마구 할퀴고 황걸개를 무릎 꿇렸던 것과 달리, 그 바람은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예결을 어루만졌다.
다정한 간극에 예결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량은, 오로지 그만은 이 바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결아.”
제하량은 그의 사제를 나직하게 불렀다.
“이리 오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