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베갯머리송사 (7)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서 제하량에게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가야 하는데…….’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하는 걸 불사해서라도 남궁운과 황걸개로부터 벗어날 작정이었다. 중원은 지나치게 넓었고,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
무림에는 핸드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다.
어린 날의 예결이 죽지 않고 중원을 횡단에 곤륜까지 갔던 것도 기적이었고, 그곳에서 하량을 다시 만난 것도 실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뿐이랴, 수백, 어쩌면 수천 년 후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예결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찾아도 무림이라든가 곤륜 같은 건 픽션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었을 뿐이다. 설령 타임머신이 발명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다루는 에스퍼가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하량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런데, 그래도 다시 만났잖아…….’
이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운명은 예결과 하량을 정말 손쉽게 갈라놓곤 했다.
처음에는 육체적 거리였으나 두 번째는 시간, 어쩌면 차원이 달라졌다. 다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현명하다. 예결은 제 비합리적인 집착을 잘도 그럴듯하게 포장한 채 하량에게 매달렸다.
재회하자마자 대사형은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앞으로의 삶도 주었다. 에스퍼의 지독한 천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그의 연정도 욕망도 모두 받아주었다.
그러나 예결은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전생에 하량을 구하고 죽은 일에 미련은 없었다. 보잘것없는 목숨으로 제 은인이며 영웅이었던 사내를 구했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예결이 그때 한 일은, 하량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를 나락에 처박는 짓이나 다름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사형…….”
정녕 저들의 말이 사실인가요?
흐느낌으로만 흘러나온 말에 하량은 묵묵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오렴. 네가 그토록 먹고 싶다고 한 당호로가 다 녹을 것 같구나.”
하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참히 일그러진 낯을 한 예결에게 여상스러운 투로 말했다.
“혹,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난 거니?”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에는 옅은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예결은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화?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하량이 천마라는 사실을 숨겨왔다는 배신감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거면 좋겠다.
그러나 예결은, 그만은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 한들 하량에게 분노하거나,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나, 나 때문이야…….’
이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예결에게는 황걸개의 폭로도,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남궁운의 존재도 전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저를 향해 손을 내민 제하량이다.
‘대사형이 서 있는 공간만 도려낸 것 같다.’
온화한 음성, 다정한 표정.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다만, 제하량은 예결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사제를 향해 맹목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내가 안 가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예결은 어지러워서 휘청였다. 그러나 뒤에서 보기엔 앞으로 나서려는 것처럼 보였는지, 남궁운이 절박하게 외쳤다.
“가면, 안, 됩니다……!”
말뿐인 외침이 아니었는지, 그가 땅을 박차고 예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몸이 튕기듯 밀려났다. 예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남궁 공자……!”
“크윽…….”
쿨럭, 하고 기침을 한 남궁운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상이었다.
하량은 손에 들고 있는 당호로만 아니라면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바로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토록 다를 수도 있는 걸까.
“사형, 잠시. 잠깐만요.”
예결은 비틀비틀 걸음을 뗐다. 충격이 커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하량에게 가야 했다.
‘일단, 말리자. 남궁세가 소가주인데 건드리면 진짜 돌이킬 수가 없다.’
심지어 외부에 예결이 청해상단주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만약 남궁운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남궁세가는 제일 먼저 하량이 예결에게 준 선물을 찢어발길 거다.
예결이 갓 태어난 새끼사슴 같은 다리로 걸어오는 동안 하량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곁에 서자 그의 옷소매가 예결을 가리듯 감싸 안았다.
예결이 골라준 옷이었다. 저렇게 폭이 넓고 긴 소매가 달린 장포를 입어도 대사형은 언제나 우아했으니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분명 그랬는데…….’
어깨를 필사적으로 그러쥐는 손길이 평소와 달리 그악스러웠다. 하나 예결은 아프다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구, 구경은 다 한 거 같으니까. 돌아가요. 네?”
“네가 원한다면야.”
하량은 기어코 예결의 손에 당호로를 쥐여주었다. 이를 어찌어찌 꽉 움켜쥐긴 했으나 예결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하량은 이를 못 본 척, 평소처럼 다정하게 예결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겉보기에는 의좋고 살가운 사형제지간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남궁운은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거칠게 닦아내고 외쳤다.
“아무리 천마라 한들, 어찌 선량한 사람을 잡아다가 당신의 욕심대로 농락한단 말이오!”
하량을 노려보는 남궁운의 눈이 벌겠다.
“그를 놓아주시오!”
‘아, 제발 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고 보호 중인 개체가 별안간 맹수의 앞에 몸을 내던지는 걸 보는 기분이 이럴까.
예결은 하량의 소맷자락에 반쯤 매달리다시피 그를 채근했다.
“가요. 어서.”
그러나 하량은 천천히 떼던 걸음을 멈췄다.
“농락?”
그 단어를 곱씹기라도 하듯 중얼거린 하량의 눈길이 처음으로 남궁운에게 향했다.
벌레라도 보듯 무감한 시선이었다.
남궁운에게 꽂힌 천마의 시선에서 위기감을 느낀 건지, 황걸개는 그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적노개께서 당신과 죽은 곤륜의 제자 간의 인연에 대해 말해주신 적이 있소.”
천마의 손에 남궁세가의 소공자가 죽으면 강호는 분명 환난에 휩싸일 것이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같은 사람이 아니오.”
주름으로 늘어진 황걸개의 뺨이 바들바들 떨렸다. 본인의 목숨을 내걸고 정마대전의 발발을 막으려 했으니 실로 그 의기가 개방의 장로다웠다.
하나 황걸개의 도발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왔다.
“본좌의 사제가, 죽었다고.”
황걸개의 말에 하량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이리 살아 있지 않나?”
얼어붙어 있는 예결을 끌어당긴 하량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저 친애의 몸짓이라기엔 농밀하고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예결은 하량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의 품 안에서 들어온 이상 자력으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쉬이…….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나중이 단둘이 되면 제대로 해 주마.”
사제의 앙탈이 귀엽다는 듯, 하량이 속삭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아, 이, 무슨…….”
예기치 못한 장면에 황걸개의 몸이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목덜미에서부터 얼굴에 이르도록 살갗이 울긋불긋해지는 게 보였다.
‘젠장. 이래서 밀어낸 건데…….’
예결은 울상을 지었다. 이제 강호에 둘의 관계가 쫙 퍼질 거다.
중원에 LTE는 없지만, 개방의 방도가 있다.
대사형을 살려서 그의 인생을 악의 구렁텅이에 처박은 것도 모자라, 이제 죽었다고 알려진 사제랑 붙어먹는 패륜적인 대마두로 만들게 생겼다.
“아무리 마도천하의 주인이라 한들, 지금 그대가 지금 하는 짓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사람을 모두 욕보이는 일이오……!”
“그래서?”
하량은 두 손으로 예결의 귀를 가렸다.
“본좌가 사제와 흘레붙는 짐승이라 한들, 네놈이 무얼 할 수 있지?”
당연한 말이지만, 귀를 막았다 한들 예결은 하량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내색할 수 없어 불안한 척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설혹 본좌가 선량한 사람을 잡아다가 세뇌해서 농락한다면, 어쩔 생각이지?”
남궁운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이 아이를 구해내기라도 할 작정인가?”
예결을 뒤에서 끌어안은 하량의 모습은 실로 만마의 주인이며 저 십만대산의 지배자만이 가질 수 있는 존재감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 천마의 품에 예결이 갇혀 있었다. 결코 왜소한 체구는 아니었으나 하량에게 안긴 그는 가냘파 보였다.
처연하게 속눈썹만 내리깐 예결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휘말린 결백한 전리품 같았다.
하량이 황걸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개방은 감당하지 못한다.”
황걸개를 빗겨 간 시선은 남궁운에게 가 닿았다.
“남궁도 감당하지 못한다.”
쐐기라도 박듯 건넨 말은, 분명 황걸개보다는 남궁운을 도발하고 있었다.
‘삼 초(招)는 버틸 수 있을까?’
이를 기민하게 알아챘음에도, 뼈저린 무력감이 남궁운의 안을 채웠다. 아니, 삼 초도 천마가 봐줘야 가능한 일이다.
예결을 끌어안고 있느라 두 손이 묶인 하량은 얼핏 무방비해 보였다. 어디든 검을 찔러넣으면 무력하게 당해줄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빈틈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교룡왕을 마주쳤을 때보다 더하다.’
어릴 적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혹독한 무공 수련을 해왔다. 오로지 앞으로만, 우직하게 내딛다 보니 중원에서는 남궁운이야말로 천하제일 후기지수라고 칭송했다.
하나 천마는,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위압감만으로 남궁운에게 내상을 입혔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고작 삼초지적이라니.’
남궁세가를 떠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라도 나서서 예결을 구할 수 있는지 아무리 가늠해도 결론은 같았다.
구할 수 없다.
그 깨달음이 남궁운을 채우는 순간 그는 절망과 치욕에 낯을 무참하게 일그러뜨렸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데 나서는 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예결이 휘말려 다칠 수도.’
남궁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개 후기지수 따위가 그보다 십수 년도 전에 만마의 주인이 된 천마를 상대로 여유 같은 걸 부릴 수는 없는 법이다.
‘검이 자칫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만마의 주인이 일개 대체품 따위를 소중히 지켜줄까?
저울 위에 올라간 것이 제 목숨이 아니었기에, 남궁운은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남궁운은 검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늘어뜨렸다.
하량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현명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