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존경하던 사형이 악당이 되어버렸다-181화 (181/203)

181화. 베갯머리송사 (8)

예결을 가볍게 안아 올린 하량은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

순간 예결은 몸을 긴장시켰다. 하량이 저를 안는 거야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남궁운과 황걸개의 명백한 적의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드러내는 하량이 걱정이었다.

‘갑자기 땅을 박차고 대사형의 등을 찌르려 한다면?’

정파인들에게 있어서 천마는 비이성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마교와 내통했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문파가 무너지는 일은 비교적 흔했다.

그건 거대한 악이었다.

강호 곳곳에 스며 있으며 무림맹이 십수 번도 넘게 무너지고 새로 태어날 때도 항상 신강의 십만대산에 도사리고 있던 정파무림의 숙적.

예결은 소매에 가려진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량의 무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오연함은 만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결은 누군가가 대사형의 등을 노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제발…….’

예결은 이를 악물었다. 이쪽을 향한 남궁운의 시선이 집요했다.

핏발 선 두 눈과 헝클어진 머리, 입가에 흐르는 한 줄기 피는 그가 명가의 자제라기보다는 어느 전장의 복수귀처럼 느껴지게 했다.

예결은 남궁운이 제발 자리를 지키길 바랐다.

아니면 에스퍼 사상 최초로 가이드를 공격하는 인간이 탄생할지도 몰랐다.

‘가만히 있어라……. 제발.’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궁운은 이쪽을 향해 새파란 시선을 던질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황걸개는 일련의 상황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예결은 하량의 걸음이 이어져 저들에게서 멀어지기까지 숨 한 번 편히 쉬지 못했다. 대사형은 그런 사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궁운은 마지막까지 예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반드시.]

거의 끊어질 듯 희미한 전음에 예결은 하량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무심코 힘을 줄 뻔했다.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구하지 마!

전생에도 그리 대단한 무인이 아니었기에 무공에 큰 미련은 없었지만, 지금은 전음을 쓸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예결은 남궁운의 마지막 전언을 못 들은 척 고개를 푹 떨궜다.

마침내 남궁운과 황걸개가 보이지 않을 무렵, 예결은 숨죽여 저를 안고 있는 사내를 불렀다.

“대사형…….”

나직한 부름이었는데, 골목이라 그런지 제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리 불러 주는구나.”

올려다본 하량의 얼굴은 반쯤 어둠에 잠겨 있어 그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예결은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예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당신이 천마냐고?

“……정말, 정말로 저들의 말이 사실인가요?”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하량은 한사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량의 품은 여느 때처럼 안온했다. 평생을 기대어 살아도 결코 기울지 않고, 힘없이 무너지지도 않을 것처럼 너른 가슴. 예결은 이곳을 자신의 안식처로 택했다.

분명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예결은 숨을 골랐다.

어떻게 이토록 짧은 찰나에 온 세상이 뒤집힐 수가 있는 걸까?

“대사형…….”

골목의 끝, 빛이 멀지 않은 곳에 당도한 하량은 우뚝 멈추어 섰다.

저잣거리는 소란스러웠다.

부모를 따라 나온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벌써 술에 거나하게 취한 자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이 깊숙하고 어두운 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일상은 너무도 가까웠으나, 못내 내딛지 않을 한 걸음이 떨어져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렴.”

하량은 예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잠깐만요.”

예결은 황급히 하량을 제지했다. 하나 언제나 예결의 부탁에 귀 기울이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깨어나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란다.”

하량이 펼친 옷소매가 예결의 얼굴을 덮었다.

무어라 더 아우성치기도 전에, 예결의 말은 그의 안에서 까무룩 죽었다. 예결이 여태 쥐고 있던 당호로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곱게 차려입은 설탕 옷이 산산이 조각난 붉은 산사나무 열매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

하량은 예결의 수혈을 짚은 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예결이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하량은 사제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쓸어보다가 그 가슴에 귀를 가만히 가져다 댔다.

쿵…… 쿵…… 하고 느린 심장 박동이 울렸다.

가까스로 걸머쥔 예결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한다.

하량은 이 일이 벌어질 언젠가를 막연히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다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사제가 사라졌을 때, 그답지 않게 혼비백산하여 점소이의 멱살을 틀어쥐고 여기 앉아 있던 예결이 어디 있냐고 다그쳤을 때, 삼랑을 시켜 묻혀 놓았던 천리추종향을 따라 그가 그려낸 궤적을 따라 내달렸을 때…….

제발 오늘이 그 순간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러나 하량의 갈원이 무색하게도, 예결은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하량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하량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잘 숨겨도 거짓말에는 언제나 끝이 존재했다.

그 선량하고 호탕한 사내가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던 날이 그랬다.

어머니가 아픈 게 아니라 사실 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순간이 그랬고…… 유모가 금방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항주의 뒷골목에 하량을 버리고 갔을 때가 그랬다.

남들은 몰랐지만, 보고 배운 것이 그뿐이라 하량은 거짓말을 곧잘 했다.

마의의 실험에 녹초가 된 몸으로 죽어가는 사형제들을 어르며 곤륜이 곧 제자들을 구하러 올 거라고, 강호가 우리를 잊지 않았을 거라고 매일매일 다독였다. 그들 모두가 하량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곤륜의 제자들도 하량의 거짓말을 배웠다. 한 명은 돌아가면 연무장에 안 나가고 보름을 꼬박 놀 거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사부님 몰래 숨겨둔 술을 먹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다. 또 어떤 녀석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 외엔 기댈 구석도 없었기에 그들은 매일매일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떠들었다.

처음 잡혀갔던 날부터, 하량 외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아…….”

피 냄새가 났다. 손바닥을 내려다본 하량은 혀를 찼다.

이러다가 예결에게 피가 묻게 생겼다.

잠시 허공섭물로 예결을 띄워 놓은 하량은 옷소매를 찢어 제 손바닥을 닦아냈다. 흉터조차 되지 않을 상흔이 벌써 희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하량은 더러워진 천을 삼매진화로 태워버린 뒤 예결을 조심스럽게 업었다.

행여라도 흘러내릴세라, 제 목에 두르게 한 예결의 팔까지 몇 번이나 고쳐준 하량은 저자로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눈부시게 밝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예결이 나오자고 해서 그런가, 아침부터 날이 참 좋았다.

꽁무니에 남궁세가의 소가주는 물론이고 개방의 장로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량은 전혀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에 업힌 이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하는 하량의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지나가다가 그들을 발견한 행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하량은 남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신을 잃은 채라 흘러내리는 예결의 몸을 중간중간 고쳐 업었다.

그는 성안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홀로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호로를 먹고 싶다더니, 이토록 곤히 잠들어서 어째?”

예결이 원했던 것과 비슷한 과일꼬치를 파는 노점상을 본 하량이 낮게 웃으며 잠든 이에게 속삭였다.

“다음엔 더 예쁘고 맛있는 걸로 사주마. 마음이 급해서 이번엔 너무 대충 고른 것 같아.”

혀를 끌끌 찬 하량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처음 헤어졌던 다관 앞도 지나갔다.

“네가 다관에 부려 놓은 물건은 삼랑을 시켜 가져오라 이르마.”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면서도 외면한 게 지레 뜨끔했는지, 하량은 잠든 사제에게 속삭였다.

“온종일 그리 열심히 골랐는데, 남이 가져가게 둘 수는 없지.”

예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새액새액, 규칙적인 호흡을 내뱉을 뿐이었다.

하량은 사제의 고개가 자꾸만 흘러내리며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제 뺨과 목덜미 사이를 간질이는 감각에 몇 번 웃었다. 참으로 실없이 즐거웠다.

그렇게 좋았다.

황홀하게 웃는 미남을 발견한 상인은 저도 모르게 굽고 있던 고기를 태워버리고 손님의 항의에 새로 해주겠다며 쩔쩔맸다. 놀러 나왔다가 그를 발견한 처자는 어디 한번 말이나 걸어볼까, 하고 자꾸만 힐끔거렸다.

하량은 그중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온 신경과 생각은 등 뒤에 매달고 있는 예결에게만 오롯이 기울어 있었다.

“너무 일찍 돌아가게 되어 아쉽구나.”

어느새 저 멀리 성문이 보였다.

하량은 내심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예결은 업은 채, 하염없이 길고 끝나지 않은 길을 걷고 싶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를 이것저것 주워섬기며, 등에 매달린 온기를 영원히 누리고 싶었다.

예결에게 말했듯이, 그가 깨어나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으리라.

망부석이라도 된 듯, 우뚝 멈춰 선 채 감상에 젖어 있던 하량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혀를 찼다.

“그나저나, 결국 기예단의 공연은 못 보게 되었구나.”

천하의 시름을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슬쩍 흘러내리는 예결을 고쳐 업으며 하량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우리 결이가 섭섭해할 거 같으니 이를 어쩐다…….”

하량은 연신 잠든 이와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말 한마디 내뱉지 않는 예결이 기예단을 못 본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토로한 것처럼,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하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른 것처럼…….

문득, 하량은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였다.

“아. 기예단을 불러들이면 되겠구나.”

명료하기 짝이 없는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하량의 표정은 결코 밝아지지 못했다.

아무리 주절주절 떠들어도, 울거나 비명을 질러도 예결은 답하지 못할 것이다. 제 손으로 재워 버렸으니까.

아마 앞으로 퍽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예결은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도 않을 거고, 조잘조잘 떠들지도 않을 것이며 웃어주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다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변변치 못한 사형이라 미안하구나. 네가 한 부탁 하나 제대로 들어주질 못하고.”

사내는 제 어깨에 기운 예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 우형을 용서해 주렴.”

머리로는 용서 같은 게 찾아올 리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하량의 마음은 그런 가당찮은 것을 원했다.

“미워해도 괜찮으니 그냥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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