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베갯머리송사 (9)
예결은 눈을 감았다 떴다.
빨간 차가 놀이터 바로 옆의 차도를 굴러간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미끄럼틀이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뒤에 있었다. 아이들이 탄 알록달록한 그네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앞뒤를 오갔고, 예결이 신고 있는 신발에는 형광색 곰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예결은 그 하나하나의 색을 천천히 음미했다.
오래된 고전영화 속,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온 세상에 색이 생겨났던 것처럼 예결의 세상에도 채도가 생겼다.
새로 태어난 세상에 애착을 가지는 만큼, 그들이 색을 입어가는 느낌이었다.
예결에게는 모든 게 특별하고 신기했다. 중원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건축 형식이며 전자기기도 그러했지만, 특히 가족의 존재가 가장 크게 와닿았다.
여전히 말수는 적은 축에 들었으나, 예결은 나름 평범하게 성장했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예결은 몸으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전생에 무인이었던 영향이라 보긴 어려웠다. 곤륜파에서는 예결보다 왜소한 사제도 물지게를 진 채 홑옷 차림으로 그 추운 설산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수련의 일환조차 아니었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노동의 일부였을 뿐이다.
숱한 곤륜문도 중에서도 말석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던 둔재였건만, 다시 태어난 후라서인지 그의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볍기만 했다.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하지?’
예결에게 최근 생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늦된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여자가 걱정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건 이미 성인에 가깝게 살아본 예결에겐 종종 일어나는 사고와도 같았다. 그럴 때면 여자는 예결을 낯설어했다.
결국 평범한 아이가 되는 거야말로 예결에겐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아까부터 예결의 눈앞에 있던 친부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예결아. 이쪽. 여기로 공을 던지는 거야.”
던지라고?
예결은 공을 든 채 갸웃하다가 그걸 남자를 향해 내던졌다.
“아이고!”
상황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들의 공을 받아줄 생각이었던 남자는 예상외의 속도에 당황해서 얼어붙었다. 여차여차 손을 내밀긴 했으나 그 사이를 휙 지나친 공은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순간 휘청한 예결의 부친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우, 우리 아들 농구선수 해야겠네.”
코피가 나는 줄도 모르는지, 남자가 애써 웃었다.
‘여긴 내공도 없고 무공도 없는 세상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다 연약한 거 같아.’
예결의 착각이었다.
한 손으로는 공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들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간 남자는 아내의 품에 안겨서 우는 시늉을 했다.
“여보! 나 아파!”
“세상에. 얼굴 좀 봐. 코피! 당신 눈가가 푸르스름한데 내일 출근 어떡해?”
“내일 출근이 뭐. 우리 예결이가 잘하면 미래의 프로 농구 선수가 될지도 모르는데.”
남자는 손을 벌려가며 예결이 얼마나 날렵하게 공을 던졌는지, 덩크슛할 인재라느니 같은 허풍을 마구 주워섬겼다.
“으이구. 둔한 몸으로 애 놀아주겠다고 데리고 나갔으면 잘 피했어야지.”
속상하다는 듯 눈을 흘기면서도 어디선가 찜질할 아이스팩을 가져온 여자가 남자의 눈가를 꾹꾹 눌러주었다.
“아이고……! 아야!”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남자가 예결에게 찡긋거렸다.
“아들아. 네가 나중에 성공하거들랑 이 아버지의 희생을 잊지 말고 꼭 게이트 안전지대에 집 한 채 마련해 줘야 한다?”
“오빠!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남자는 여자의 손에 꼬집히면서 예결에게 맞았을 때보다 더 큰 소리로 엄살을 부렸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가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걸 알고 그의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건 왠지……. 우스우면서도 몽글거리는 광경이었다.
아버지의 가족이 있다는 시골에 내려간 어느 날에는 그게 오랜만에 만난 친척 간의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예결이 특별하다는 내용으로 웃을 수 있던 것도 아마 그 해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
예결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사형, 하고 입술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차라리 수면제를 먹이지…….’
그거라면 금방 해독하고 깨어났을 텐데, 하필 점혈을 당했다. 좁은 공간에 누워 있는 걸 보니 마차에 탄 채였다. 그동안 계속 비포장도로를 달려와서인지 아니면 점혈 때문인지 어질어질했다.
또 옛날 꿈을 꾼 건 그 때문인가?
예결은 이것도 멀미의 일종일지 궁금해졌다.
열린 문으로 손이 들어왔다. 예결은 빨리 눈을 감았다. 하량이 그를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마차 밖으로 나오며, 얼굴에 찬 공기가 와 닿았다. 어떻게 일어났다고 티를 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하량이 다시 예결의 수혈을 짚었다.
삽시간에 세상이 멀어지고 있었다.
‘잠들기 싫은데…….’
또다시 가물가물해지는 시야에 진영과 삼랑, 그리고 야율홍여가 하량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게 보였다. 삼랑의 몸짓은 전에 없이 정중했다.
‘……삼랑도 직장인은 직장인이네.’
애써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예결의 귓가에 대사형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교로 돌아간다.”
“존명.”
예결은 또 까무룩 잠들었다.
***
퍼즐을 열심히 맞추고 있던 예결은 부엌을 힐끔 바라봤다. 매주 두어 번씩 방문해 어머니와 수다를 떠는 이웃이 와 있었다.
몇 년 전 결혼한 딸이 낳은 손주가 얼마나 귀여운지, 사돈의 팔촌이 땅을 샀는데 그 값이 얼마나 치솟았는지 따위의 이야기가 이것저것 오가더니, 예결의 모친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제 슬슬 애를 유치원에 보내야 할 거 같은데. 다들 자리가 없다고 해서 큰일이에요.”
남편 육아휴가도 다 썼고 이제 정말 복직해야 하는데, 하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대기표는 받았어?”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것도 정원이 꽉 찼다네요.”
심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길래 예결은 다 맞춰놓고 일부러 흩트린 퍼즐 조각을 하나 집어 들며 이걸 맞추는 일에 심취한 시늉을 했다.
“왜…… 내가 예결이 엄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니까 말해주는 건데…….”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딸이 유치원 교사라 알고 있는 거라며 덧붙인 그녀가 말했다.
“그 좀, 특별한 아이들은 안 받아준다고 하더라고.”
특별한 아이.
예결은 눈을 끔벅였다.
“특별이라뇨? 저희 예결이가 어디가 특별하다고……!”
어머니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를 냈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애써 진정하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얘기는 공고문 어디에도 없었어요. 모집할 때 서류상에 기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저희 애를 빼겠어요?”
“원래 그런 데 원장이나 선생들이 동네 정보에 빠삭하잖아. 원생 어머니들끼리 네트워크가 쫙 깔려 있어서.”
중년의 여인이 속삭였다.
“앞에서는 신청서 받고, 뒤로는 슬쩍 빼놓는 거지. 무슨 일 생기면 감당하기 싫으니까.”
“저희 예결이는 문제 같은 거 일으킨 적 없어요. 평범한 아이라구요.”
“나야 알지만…….”
이웃집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말했다.
“정말 얌전하잖아요. 봐요. 남자애들 다 공놀이하고 뛰어다닐 때 맨날 집에서 책 읽고 퍼즐 맞추는 애예요.”
“알지. 나야 아는데.”
아주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다른 문제니까.”
어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
“아…….”
다시 깨어났을 때, 예결은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걸 느꼈다. 그는 무언가 단단한 것을 베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본 예결은 자신이 대사형이 무릎을 베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량의 손이 예결의 눈가에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예결의 눈이 초점을 되찾는 동안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자연스럽게 거둬들였다.
“대사……형…….”
강제로 잠들어 있는 동안 물을 안 마신 탓인지 목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목이 마른 모양이구나.”
창문을 연 하량이 밖에 손을 내밀자 누군가가 그에게 자기 병을 건넸다. 하량은 예결의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뒤 그 입술에 병을 기울여 물을 흘려보냈다.
“쿨, 쿨럭.”
예결이 반쯤은 마시다가 반쯤은 사레가 들려 뱉어내자 하량은 이런, 하고는 대신 물을 입에 머금은 뒤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으음, 음…….”
다정하면서도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생명수처럼 기껍게 느껴지는 가이딩이 그와 함께 흘러들어 왔다. 예결은 물과 가이딩 모두를 달게 삼켰다.
반쯤 흐느적거리는 사제가 불편할 법도 한데, 하량은 그런 예결을 단단히 받친 채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마침내 몸을 일으킨 하량의 입술도 예결만큼이나 젖어 있었다.
“조금 더 마시겠느냐?”
서녕성에서 남궁운을 만난 후부터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하량의 낯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 태도에 예결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새삼 실감했다.
“……아뇨.”
하량은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자기 병의 뚜껑을 덮었다.
물병을 갈무리한 사내는 예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 품에서 벗어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래도 이만하면 반응이 침착한 편이었다.
“곧 도착할 텐데, 딱 맞게 깨어났구나.”
“어디에 도착해요?”
예결은 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십만대산.”
집 앞 편의점에 간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여상스러울 것 같은 말투였다.
예결은 닫힌 창을 가리켰다.
“……창을 열어주세요.”
주변이 보고 싶었다.
하량은 그쯤이야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는 듯, 창을 열어주었다.
마차를 중심으로 말을 탄 고수들이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예결이 아는 대사형의 수하 셋 중에는 삼랑만이 보였는데 그녀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마차 가까이에 서 있었다.
‘아까 자기 병을 건네줬던 것도 그녀가 아닐까.’
거의 다 도착했다더니, 잠든 사이 사막을 다 가로질러 온 건지 주변에는 울퉁불퉁한 바위와 초목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곤륜처럼 하얀 눈에 뒤덮인 것도 아니고, 중원의 그 여느 야산보다도 더 삭막한 곳이다. 마치 바위산처럼. 그러나 돌의 틈바귀에 악착같이 자리 잡은 야생 잡초가 더러 보였다.
그리고 저 앞으로, 자연이 만들어낸 천혜의 요새가 버티고 있었다.
검고 어두운 산. 그 거대한 위용이 흡사 하늘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태양의 방향 때문인지 대낮인데도 어두워 보였고 바위가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어 마치 마왕성을 연상케 했다.
저 깎아지를 듯 높은 절벽의 사이로 난 협곡만이 유일한 입구였다. 그리고 그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건 이 시대의 기술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육중한 금속의 문이다.
읽을 수 없는 거대한 문자가 귀퉁이에 아로새겨진 문은 일종의 불가사의처럼 보는 이를 압도하는 구석이 있었다.
‘이곳이 십만대산…….’